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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뜬 대통령, 한국을 뜬 국세청장


‘표적사정 청와대 관련설’ 열쇠 쥔 한상률 전 청장 귀국 미뤄… 검찰은 소환은커녕 무관심한 태도
등록 2009-06-05 11:32 수정 2020-05-03 04:25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칼날을 정조준하기 전, 국세청이 먼저 태광실업에 칼날을 들이댔다. ‘세무조사 칼날’을 휘두른 사람은 바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다.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다.

서울 종로구 국세청에서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한 뒤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태광실업 표적사정 청와대 관련설’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지만, 검찰은 해외에 머무는 한 전 청장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서울 종로구 국세청에서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한 뒤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태광실업 표적사정 청와대 관련설’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지만, 검찰은 해외에 머무는 한 전 청장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해 7월30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직원들이 부산 태광실업 본사에 직접 내려가 관련 장부를 압수해 오면서 세무조사는 시작됐다. 세무조사를 지시한 것은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었다. 원래 태광실업을 담당하는 곳은 부산지방국세청이었다. 하지만 한 전 청장은 지방기업의 세무조사에 ‘국세청의 중수부’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동원했다. 이 때문에 국세청 안팎에선 당시 세무조사가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권 심기 알아채고 세무조사 빼들어?

국세청의 전직 고위 간부는 “지난해 5월 청와대는 국민 정서에 반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발표해 촛불시위라는 엄청난 국민 저항을 받았다. 촛불시위가 잠잠해지던 지난여름 청와대는 진용을 정비한 뒤 촛불세력 배후를 조사했다. 청와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386세력을 촛불 배후 세력으로 간주해 이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한 전 청장이 정권 내부의 심기를 알아채고 정권 입맛에 맞는 세무조사 칼날을 빼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얘기도 나온다. 이른바 ‘하명설’이다. 아무리 국세청장이라도 정치적 논란이 불거질 무리한 세무조사에 나서기는 쉽지 않은 만큼, 정권 실세로부터 하명을 받은 뒤 칼을 들이댔다는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4월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촛불시위 문제와 한나라당 친박 의원들의 정치자금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관계회사 세무조사를 지시했고, 한상률 국세청장은 조사 결과를 민정수석실을 통하는 보통의 경우와 달리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고 말했다.

당시 세무조사는 서울국세청 조사4국3과 주도로 진행됐다. 이현동 당시 국세청 조사국장(현 서울국세청장), 김갑순 당시 서울국세청장(현 딜로이트코리아 부회장) 등 중간 라인이 있었지만, 한 전 청장은 실무진한테 상황을 직접 보고받으며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했다. 서울국세청 조사4국은 박연차 전 회장 개인의 탈세 행위 등 광범위한 자료를 확보하는 한편 박 전 회장 여비서의 수첩 등을 입수해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로 알려진 자료를 한 전 청장에게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이 태광실업 세무조사에 들어가자, 박연차 전 회장은 세무조사를 무마하려고 로비에 들어갔다. 박 전 회장이 끈을 댄 사람은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등이다. 천 회장과 한 전 청장은 각별한 사이다. 두 사람은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도 함께 수료했다. 2007년엔 이 대학원에서 주는 ‘자랑스런 원우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동문인 윤은기 총장이 세운 경영전문 대학원이다. 박연차 전 회장은 ‘형님’으로 모시던 30년 인연의 천신일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고, 천 회장은 한 전 청장에게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한 전 청장이 이 대통령에게 조사결과 직보

4개월 동안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끝낸 뒤 서울국세청 조사4국은 조사 결과를 5개 항목으로 나눠 한 전 청장에게 보고했다. 한 전 청장은 지난해 11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무조사 결과를 ‘직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당시 보고에는 전·현직 검찰 간부와 현 여권 인사 등의 검은돈 수수 내역도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 ‘국세청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칭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끝낸 뒤 매출 3천억원의 태광실업에 250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세청이 회사 규모에 비해 무리한 과세를 했다.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박 전 회장이 아무리 노 전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였다고 해도 박 전 회장은 원래 기업인이다. 박 전 회장이 검찰에서 쉽게 무너진 게 바로 그 이유가 아니었겠냐”고 말했다.

당시 태광실업 세무조사 라인은 모두 영전했다. 조홍희 당시 서울국세청 조사4국장은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으로, 신재국 당시 조사4국3과장은 서초세무서장으로, 류기복 당시 조사4국3과1계장은 동울산세무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국세청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국세청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국세청에서 자료를 넘겨받았지만 청와대 민정 라인은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잠시 미룬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형인 건평씨가 연루된 세종증권 수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박 전 회장과 건평씨가 구속되고 세종증권 로비 사건 수사가 일단락되자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됐다. 대검 중수부에 특수통 검사들이 대거 파견됐다.

지난 3월 중순 대검 중수부는 본격적인 수사를 선언했고, 수사 시작 보름도 되지 않아 노 전 대통령이 박 전 회장에게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져나왔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4·29 재보선 직전, 노 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씨가 검찰의 타깃이 됐다.

한상률 전 청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로 유임이 확실시됐지만 그림 로비 의혹과 부적절한 골프 회동으로 낙마했다. 한 전 청장은 지난해 12월25일 크리스마스 휴일을 이용해 경주와 대구에 와 정권 실세 인사들을 만나 골프를 치고 회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전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씨의 셋째언니 남편인 신아무개씨한테 ‘충성주’를 올리며 국토해양부 장관직을 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나, 한 전 청장은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신씨인 줄도 몰랐다”고 부인했다.

한 전 청장은 퇴임하던 1월16일까지 “사퇴를 표명했다”는 청와대 발표를 부인하다 결국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끝까지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전 청장은 지난 3월15일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 뉴욕주립대 공공행정정책학과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머물고 있다.

천신일 회장 등 거물급들이 로비 전면에 나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비는 한 전 청장에게 직·간접적으로 집중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를 갖고 있는 한 전 청장을 빨리 국내로 소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선 먼지떨이식 수사에 나섰던 검찰이 막상 한 전 청장 소환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박연차-천신일-한상률’로 이어지는 커넥션을 수사하고 있지만 정작 의혹의 고리를 풀어줄 한 전 청장 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박연차 리스트에 현 정권 핵심 인사들의 이름까지 오르내리자 의혹의 실체를 알고 있는 한 전 청장을 정권 안보 차원에서 도피시켰다는 의혹까지 나온다.

정권 뜻에 동원된 오욕의 역사들 즐비

국세청은 국가정보원·검찰·경찰과 함께 4대 권력기관으로 통한다. 정권 핵심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세청을 동원한 역사도 오래됐다.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1년 국세청은 현대그룹에 특별세무조사의 칼을 빼들었다. 두 달 넘게 정주영 명예회장과 일가의 변칙 주식이동, 상속·증여·법인세 탈루 등을 샅샅이 뒤져 1361억원의 세금을 물렸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재벌의 소유 분산과 부의 세습을 막겠다’며 정 명예회장을 조준했다. 정 명예회장이 대통령 공약사업인 경부고속전철 사업을 앞장서 반대하는 등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맞서던 때였다. 정 명예회장은 세무조사가 ‘정치 탄압’이라며 소송을 내 추징당한 세금 중 1200억원을 돌려받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집권여당이 23개 재벌그룹에서 166억3천만원에 이르는 불법자금을 모은 이른바 ‘세풍사건’에도 국세청이 동원됐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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