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은 애정보다 진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렇게 한 줄로 애도를 축약할 수 있는, 그래서 순정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이들은 어쩌면 행복하다. 여기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같은 가지에서 났으나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를 보면서 때로 핏대를 세우고 때로 속울음을 울었던 사람들.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 하냐”고 어제의 동지를 비판하고 입맛이 쓰렸던 사람들. ‘바보 노무현’의 승리에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나, ‘노무현의 바보같은’ 최후에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렇게 비판을 하고서 왜 이제는 우냐는 힐난을 받는 사람들. ‘애’와 ‘증’이 교차했으나 ‘증’의 세월보다 ‘애’의 세월이 길었다고 추억하는 사람들. 그들은 운동권 변호사에서 출발해 5공 청문회 스타를 거쳐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을 강산이 두세 번 바뀌는 동안에 지켜보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황망한 최후 앞에, 모든 진보가 슬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왼쪽에서 서 있던 이들 가운데 깊은 슬픔에 젖은 이들도 많다. 진보의 눈물은 왜 진한가.
“민주화 이후 최대의 비극”(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함께 운동하는 동지가 죽었단 느낌”(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 “잘되기를 기대했고, 희망했고, 실망했고… 억울한 사람, 노무현”(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한국 운동사회의 영원한 ‘위원장’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가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에 박 대표는 고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 안의 노동상담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부산의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도 노동상담소가 있었다. 그는 상담소 교육을 위해 부산에 자주 들렀다. 거기서 젊은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 국회의원’이 되고도 교류가 많았다. 박 대표는 “우리는 의원실의 노동정책에 도움을 주고, 우리에게 들어오는 노동상담은 의원실에 많이 소개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소개한 인물들 중에는 나중에 노무현 캠프에서 일하다 청와대에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다시 박석운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것은 탄핵 정국이 끝난 뒤에 대통령이 진보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였다. 박 대표는 “그때 노 대통령이 ‘알 만한 분들이 비판하니 더욱 속상했다’고 말하는데 남에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비판의 강도는 더해져 박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투옥됐다. 옛 동지의 정권에서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그래도 그는 “대통령 본인이 양극화 해소에 누구보다 앞장서기를 바랐을 텐데, 얼치기 전문가들에게 둘러싸여…”라며 여전히 진정성을 믿는다. 그렇게 애증의 세월을 보낸 박석운이 기억하는 노무현은 “시대의 풍운아”이자 “솔직담백해서 매력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좋은 재목이 어쩌다 그런 상황까지 갔는지… 억울하다”고 탄식한다.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도 동시대인 노무현과의 20년을 추억한다. 88년에서 89년으로, 전교협이 전교조로 발전하던 당시 노무현은 전교조의 법률자문을 해주던 인권변호사였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에 ‘교사가 노동자냐’ 논란이 있었다”며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란 악법은 깨어서 고쳐야 한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처지가 바뀌었다. 그는 탄핵 정국 당시에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이 최고위원은 “탄핵이 끝난 다음에 만나니 자신은 솔직히 변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대통령이 되고 보니 야당 의원 시절처럼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실제 자신의 생각도 변했다는 것이다. 이 최고위원은 “비정규 노동자가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매고, 용산의 철거민이 불에 타서 숨지는 것과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하나로 보인다”며 “사람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애통해했다.
“아버지 잘 계시냐.” 2000년대 중반, 당시 김창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만난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였다. 그들은 88년 뜨거운 ‘무쇠 바람’ 부는 울산의 하늘 아래서 만났다.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당시 현대중공업 파업 때문에 내려온 노무현 의원과 함께 다녔다”며 “그 뒤로 국회의원직을 내던진다고 하고 울산에 왔을 때는 둘이 술을 마시며 그에게 무슨 운동을 그렇게 즉흥적으로 하냐고 쓴소리를 했던 적도 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김 위원장이 구속됐을 때 변론은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다. 문 변호사는 나중에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가 석방운동에 앞장서달라고 당시 노무현 의원에게 찾아가 호소했다”며 “그런 인연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각별한 인연에도 진보정당 활동가인 그는 노무현 정권에 “따뜻한 눈길보다는 냉정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더욱 눈물이 흐른다”고 말했다. 서거 소식을 들었던 다음날 그는 부인과 함께 봉하마을로 달려갔다. 지금 그는 “진작에 봉하에 가서 만났어야 하는데…”라며 회한을 삼킨다. 침묵 끝에 그는 “민족이 전쟁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지금, 10·4 남북 공동선언만 생각해도 재평가를 받을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 전근대성과 싸웠던 이로서 공감대비록 생전에 말하지 않아도, 비주류의 공감대는 저변에 흐른다. 1990년대 초반 한국노동당부터 2000년대 후반 민주노동당까지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해온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록 양김씨의 정치적 도움을 받았지만 개혁 진영 정치가 중에는 가장 독자적 행보를 걸었던 사람”이라며 “비록 방법론은 달랐지만 지역주의 극복을 필생의 목표로 했던 이로서 남다른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던 정치인 노무현은 자신보다 왼쪽에 선 운동가들에게도 “우리의 고민을 이해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과 싸웠던 이로서 공감대다. 김창현 위원장의 말처럼 “어느 자유민주주의자의 고통”에 진보 인사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도 “사실은 동료 의식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 대표도 인간 노무현을 두 번 기억한다. 최초의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둔 1994년,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였던 노회찬씨는 낙선 의원 처지인 노무현씨를 ‘모시고’ 지자체에 관한 강연을 열었다. 노 대표는 “자신에게 선을 긋지 않고 불러줘서 고맙다며 강사료도 사양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둘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노씨 스타’로 만났다. 그는 “서민으로 출발해서 서민으로 돌아갔던 최초의 대통령”이라며 “현실의 공과를 넘어서 노무현이 상징했던 시대정신에 공감했던 이들이 다 함께 슬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직선제 이후로 뽑힌 대통령 가운데 가장 젊은 대통령이 가장 먼저 숨졌다”고 되새겼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 시대의 비극이란 것이다. 그는 “자신은 구시대의 막내를 자임했지만, 우리는 그가 새 시대의 맏이가 돼줄 것을 기대했다”며 “그래도 노무현 시대는 낡은 정치가 더 낡아 보이는 진전은 이뤘다”고 평가했다.
진보 진영에도 뇌쇄적이었던 스타일동시대 진보뿐 아니라 젊은 진보가 느끼는 슬픔도 깊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철들고 나서 받은 최대의 충격”이라며 “그분의 서거는 정치적 존엄사”라고 표현했다. 이 부대변인은 때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비판 성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큰 틀에서 보면 지향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정책이 못 미치거나 단계별로 방법론이 달라서 강하게 비판도 했다”며 “예전에 썼던 성명을 다시 읽어보니 어떤 부분은 야박했단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밑에는 말할 필요가 없는 공감대도 있었다. 그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말도 노무현 정권의 한계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한계”라며 “우리가 함께 남은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스타일은 진보 진영에도 매혹적이었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는 “정치인 노무현은 한 번도 한국 정치의 정해진 길을 가지 않는 반정치의 정치를 했다”고 평했다. 그에겐 그렇게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단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이 겪었을 영육의 분리에 슬픔도 느낀다. 엄 활동가는 “빈농의 아들로 험난한 정치 인생을 걸었던 그는 통치자로서 자신조차 비극적 위치에 놓였던 사람”이라며 “대통령이 된 뒤에는 ‘내 영혼은 당신들과 같이 있지만 통치자로서 나는 당신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의 서거를 통해 왜 그리스 비극이 인간 삶의 보편성을 상징하는지 새삼 생각한다”며 “퇴임 뒤에 고향에 내려가 비로소 분열에서 벗어나 비극성을 벗었던 그를 검찰 수사로 다시 끌어내 죽게 만들었으니 분노가 끓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했을까. 그의 영혼이 왼쪽으로 기울었다면, 그가 발딛고 선 땅은 신자유주의 영토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국의 수구세력에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위협이 되었던 유일한 사람, 노무현은 기억된다.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여성학)는 ‘한국 아저씨’ 노무현의 최후에 우리네 아버지 생각이 겹쳐서 더욱 슬프다. 권김 강사는 “그는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경상도 아저씨였지만,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선 변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며 “그것은 전후 세대 아버지들이 열심히 세상을 사는 모습을 닮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피부에 내장된 가치관을 넘어서 새로운 것에 귀를 열었던 그를 미워하긴 어려웠다”고 돌이켰다. 노 전 대통령은 1994년 발간한 에세이 에서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렇게 노무현은 끊임없이 고백하는 인간이었다. 아내를 때렸단 과거도, 자신이 변했단 말도, 나를 버리란 글도, 고백할 용기가 없으면 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투신으로 그는 자신의 진심을 끝까지 고백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산 사람이다. 권김 강사는 “자신 아닌 무엇, 이른바 국가와 시대를 빌려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아저씨들이 너무나 많은 사회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끝없이 물었던 예외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는 다른 민주화 세력 아저씨들과도 다르게 자신의 권력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단 것이다. 그렇게 진짜 보통 사람 노무현은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캬~ 좋다” 말하는 모습이 어울렸다.
다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왜 진보가 슬퍼하는지를 묻는 것이 슬프다”며 “좌든 우든 생각은 달라도 자신의 논리 안에서 철저하고 결백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 슬픈 것이 정상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한국에서 드물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걸었던 빈농의 아들은 자신의 몸을 고향 뒷산에 던지는 ‘투신 공양’으로 잠든 민주주의를 다시 깨웠다. 그렇게 개천에서 났던 용은 개천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용의 도전일지 모른다. 지금 여기는 다시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이들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진하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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