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황학동에 놀러갔다. 온갖 진기한 것들이 널브러진 시장 속 인파에 섞여 있다보면 한나절이 훌쩍 가곤 했다.
“황(黃)색의 학(鶴)이 날아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도깨비시장’ ‘벼룩시장’으로도 불렸어. 속된 말로 아기엄마만 처녀로 못 만들어줄 뿐 뭐든 다 된다고 해서 ‘만물시장’이라고도 했지.” ‘황금전자’ 황옥현(73) 대표는 ‘만물’의 유래를 설명하며 웃었다. 명함에는 대표라고 나와 있지만 임직원을 통틀어도 딱 한 명, 바로 그 자신이다. 반 평도 안 될 공간의 중앙에는 40kg 매킨토시를 올려놔도 끄떡없는 조그만 작업대가 있고 사방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부품들이 매달려 있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봇짐 메고 피란 다니며 인생의 고달픔을 몸으로 배웠다. 밀린 수업료를 달랄까봐 졸업식에 못 가서 중학교 졸업장도 없다. 공부는 그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학교에서 뭘 만들든 1등을 하던 그의 솜씨를 눈여겨봐온 큰매부가 대전에 전신(전자)학원이 생겼으니 가보라고 권했다. 그 일이 오늘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학원 졸업 뒤 전파사에 취직했으나 전파사 사장님은 대전에선 더 가르칠 게 없다며 얼마 뒤 그를 서울로 올려보냈다. 1957년,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다.
아시아백화점에서 ‘호마이카 전축’과 ‘티크 전축’, 진공관을 조립하는 걸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소니·나쇼날·파나소닉 모두 일본 제품이고, 한국 전자제품은 하나도 없던 시절이야. 얼마 안 가 금성에서 전기 말고 ‘밧데리’(배터리) 쓰는 라디오가 나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소니 라디오를 최고로 좋아했어.” 손으로 하나하나 땜질하고, 구리선은 한 바퀴 두 바퀴 입으로 세가며 감아 하루에 7~8대의 전축을 조립했다. “‘월부 전축’이라고 진공관에 불 들어오는 거, 아마 모를 거야.”
196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4년째 그는 황학동에 ‘있다’. 그는 혹시 한곳에 뿌리박힌 나무가 아닐까. “기술자라 그런지 나는 이곳이 좋아. 다들 고물을 들고 오니까 오래된 나는 이곳에 있어야지. (웃음) 게다가 충청도 태생에 A형이야. ‘집식구’(아내)는 O형이라 성질이 좀 급해서, 나한테 말 느리고 답답하다고 그래.”
그런 그를 시장 사람들은 ‘오디오계의 맥가이버’라고 부른다. 그렇대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부속을 못 구하거나, 호환되는 부속이 없으면 못 고치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부속이나 빼서 쓰라고 놓고 가는 이들도 있어. 요새 이베이(eBay)나 구라파 쪽에서 들어오는 건 못 보던 것도 많아. 늘 신기한 세계야.”
‘약전’ 하던 사람들이 ‘강전’으로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수입이 빤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때인가 월남에 간 기술자들이 돈을 벌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쟁터니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그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빽’(돈)을 써야 한다고 했다. 돈 벌려고 가는 건데 돈을 쓰라고? “지금이야 잘못 쓰면 큰일 나지만, 옛날엔 큰 ‘빽’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다 취직됐지. 난 빈털터리여서 결국 못 갔어.” 거둬 먹일 식구가 몇이나 되기에 돈이 그토록 절박했을까. “자녀를 물어보면 여자 둘에 딸 셋 그랬어. 상대방이 ‘알맞게 낳으셨네요’ 하다가 곧 그게 무슨 뜻인지 다시 물었지. (웃음) 당시는 딸 많이 낳으면 말도 못 꺼냈어. 근데 키워보니 딸이 좋아. 덕분에 아들도 다섯이나 생겼고 그 애들이 각각 아이를 둘씩 낳아서 손주가 모두 열이야. 집안 행사라도 치르면 우리 집엔 총 22명이 모이게 돼,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1970년대만 해도 ‘전기로 밥 먹는 사람’이 좀 됐지만 80년대 초반부터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집을 얼마나 지어댔는지 ‘약전’(약한 전기, 전파사) 하던 사람들이 돈이 되는 ‘강전’(전압이 센 일, 건물 전기배선)으로 대부분 돌아섰다고 했다. 돈이 절박했다면서 왜 돈 벌리는 강전에 합류하지 않았을까. “정규 학원을 나온 게 억울해서이기도 했지만 이곳을 뜨기도 쉽지 않았어. 황학동은 옛날부터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들어왔어. 여기 오면 밥은 먹고 살았으니까. 들어와서 돈 좀 벌면 나갔다가 까먹으면 또 들어와. 그런 사람들을 늘 받아주는 곳이지. 삼일아파트가 헐리는 바람에 지금은 노점이 없어졌지만 그땐 볼 게 많아서 뭐 하나 고치러 오면 ‘한 바퀴만 돌고 오쇼’ 하고 그 안에 다 고쳐놨어. 그 코스가 3시간은 걸렸는데 지금은 한 바퀴 돌 데가 없어서 30분도 안 걸려.” 인터뷰 중에도 손님들이 들락거렸다. 단골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앰프가 고장 났는데 어디로 가면 잘하나요, 그렇게들 인터넷에 올리는 모양이야. 경상도, 전라도 어디서든 와. 옛날엔 무거운 앰프를 들고 전남 목포에서 올라와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택배로 물건만 오고 가. 세상 참 좋아졌어.” 그러면서 천장에 매달린 두툼한 택배 묶음을 가리킨다. “믿고 소개해줬으니 100% 살려 보낼 수밖에 없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또 오는 모양이야. 엄밀히 말하면 단골은 없지, 다시 고장 나기 전까지는 안 오니까.” 그렇다면 온라인 홍보에 좀더 공을 들여보는 건 어떨까 하니 금세 고개를 가로젓는다. “인터넷에 떠들썩하기에 가봤더니 그런 것도 못 고치더라, 그러면 어떡해? 젊은이들 속도를 내가 따라갈 수도 없고, 쓰기 시작하면 내 나이를 고려해주지는 않을 거 아냐. (웃음)”
그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소리만 들어도 기기를 안다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다고 했다. “아, 저건 마란츠 몇 번 소리야, 어쩌고저쩌고해. 근데 소리를 너무 캐면 즐거움이 사라져. 진열용으로 ‘앞얼굴’ 좋은 걸 폼으로 쓰는 사람도 있어. 옛날엔 전축을 가지면 부자였잖아. 그 집 앞에서 음악 소리 크게 나면 좋다고 서서 듣다 가고 했으니까. 요즘 그러면 시끄럽다고 신고 들어가겠지만.”
라디오 전화 노래대회 도전 취미
황 대표는 안경은커녕 돋보기도 안 쓴다. 케이블 피복 하나를 손톱으로 벗겨내더니 다발에서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선 한 가닥을 쑥 뽑아낸다. (내게도 해보라고 할까봐 잠시 떨었다.) “눈과 귀가 밝은 편이고 건강도 괜찮아서 평생 병원에 안 갔어. 이제 가려니 엉뚱한 소리 들을까 걱정이야.” 술은 반주로 즐기지만 담배는 못 배웠다. 총각 때 흰 와이셔츠에 까만 바지를 즐겨 입었는데 셔츠 주머니에 담배 꽂는 게 싫어서였다. 버스와 지하철만 타고 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다닌다. 택시도 타지 않는다. 하루 세끼를 천천히 먹고 간식은 안 먹는다(‘100살까지 건강하게 사는 법’ 같은 책의 일부를 옮겨놓은 게 아니다!). 늘 신나는 뽕짝을 틀어놓고 일하는 그의 취미는 인터넷 장기와 라디오 전화 노래대회 도전하기다. “노래경연은 월말 결선까지 올라간 적 있어. 노래를 좀 해, 내가.” 말끝마다 미소를 마침표로 붙이는 그에게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 물으니 “80살, 너무 욕심내나?”라고 되묻는다. ‘미즈 김’인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황 대표님, 욕심은 그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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