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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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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던 생도 꺾지 못한 화사함

지진 피해 귀국한 도쿄 한식당 주방장 홍선자씨…

부잣집 며느리에서 식당 아줌마까지, 기구한 삶에도 밝고 고운 그녀
등록 2011-03-31 16:17 수정 2020-05-03 04:26

요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를 뒤늦게 챙겨 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짧은 장면이 유독 앙금처럼 남았다. 친구 남편을 가로채 동거하는 ‘전직’ 성형외과 의사 이화영(김희애)이 시름에 잠겨 포장마차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그녀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이화영은 그 소리가 안 들린다는 듯 술만 홀짝인다. 그러자,
옆 테이블 총각: 아주머니! 전화 왔는데요.
이화영: 알아. 그런데 누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허락했어?
옆 테이블 처녀:
주머니 아니에요?
이화영: 아주머니 아니야.
옆 테이블 총각: 그럼 뭐예요?
이화영: (사이) 흐음… 닥터 리.








홍선자씨는 얼마 안 있으면 일본으로 돌아간다. 모든 걸 예전처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든 가야 한다. 그녀가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한겨레 정용일 기자

홍선자씨는 얼마 안 있으면 일본으로 돌아간다. 모든 걸 예전처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든 가야 한다. 그녀가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한겨레 정용일 기자

‘아줌마’라는 이름의 여자

그 대사들이 어찌나 시리던지. 이번에 인터뷰한 이도 그렇다. 사람들이 허락받지 않고 ‘아주머니’(아니 아주머니라는 비교적 고상한 표현보다는, 솔직히 ‘아줌마’)라고 부르는 사람. 동시에 드라마 여주인공하고는 달리, “누가 날 그렇게 부르라 허락했느냐”며 발끈하지 않는 사람. 난 그렇게 부르는 대신 ‘여자’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껏 너무나 많이 아줌마라고 불리었으니까. 여자의 이름은 홍선자다. 올해로 51살.

여자는 오랜 세월을 ‘식당 아줌마’로 지내왔다. 이 나라에서 ‘저기요, 이모, 여기요, 어이, (주로) 아줌마’로 불리며,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평균 시급 4천원 정도 받고, 하루 10~12시간 고된 육체·감정 노동을 하는 게 보통인 직업 말이다. 처음에는 요리 솜씨를 살려 한정식집 찬모로 출발했다. 몸이 너무 힘들었다. 이내 홀서빙으로 전향했다.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아 많이 전전했다. 여자가 나른 음식은 중화요리 코스, 장어구이, 갈비, 회 등 각양각색이다. 가끔 남은 음식을 집에 싸갖고 왔다. 자식들은 어느 날에는 갈빗집 밑반찬인 마카로니샐러드나 깻잎절임, 어떤 날에는 장어요릿집의 장어등뼈튀김 찌꺼기를 먹으며 가을날 단풍 들 듯 철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더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여자는 몸과 마음이 힘든 와중에도 열심히 생각했다. 생각은 식당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많고 많은 식당 아줌마들의 사연처럼 여자도 생활력 없는 남편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했다. 막내가 한밤중에 퇴근한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다 말고 불쑥 “왜 이혼 안 해?”라 물었을 때, 여자는 “너 때문이지”라고 농처럼 받아쳤다. 막내는 그게 절대 장난이 아니라고 느꼈단다.

남편이 일으킨 대부분의 ‘지진’

몇 년 전 여자는 고민 끝에 일본으로 가 취업했다. 굽이굽이 여러 곡절을 거쳐 지금은 어느 한국음식점의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곧 추진할 사업을 구상 중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그래도 일본에 있는 편이 좋다. 일일 근무시간은 적은 반면 급여는 훨씬 높고, 법정공휴일에 무조건 쉬고, 초과근무수당을 철저히 챙겨주고, 본인만 건강하면 할머니가 돼도 경력을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고, 점심과 저녁 영업시간 중간에 2시간의 완전한 휴식이 있다. 프랜차이즈 식당 얘기가 아니다. 개인이 하는 식당이라도 ‘이곳은 직장이다’라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분명하다고 한다. 여자는 “일본은 좀, 뭐든 그런 식으로 딱딱 잡혀 있다”고 말했다. “빨리 돌아가 일해야 하는데….” 여자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얼마 전 지진과 원전 사태 때문에 일시 귀국했다. 나는 메아리처럼 “아직 위험하다는데…”라고 응수했다.

여자의 직장이 있는 건물 외벽은 쩍쩍 금이 갔지만 용케 안 무너졌다. 그 지역은 다행히 끔찍한 재앙을 면했다. 강진이 왔을 때 여자는 주방의 가스 밸브를 모두 잠근 뒤 핸드백까지 챙겨 들고서 뛰쳐나왔다. 홀에는 일본인 손님 한 팀이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지진이야 금방 멈출 텐데 뭘 그리 유난은…’ 그런 표정들이었다고 한다. 지진보다 방사능이 더 두려운 존재로 급부상하자, 여자는 최신 한국 드라마 DVD를 잔뜩 빌리고 각종 인스턴트 식품을 사서 집에 틀어박혔다. 강진이 또 오면 언제든 대피할 수 있도록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자는 밤이 이어졌다. 한국의 가족들은 날마다 전화해 귀국을 종용했다. 여자는 “실내에 있으면 괜찮다고 뉴스에 나오는데” 했지만 자식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면 어떡하느냐”며 답답해했다.

큰일이 일어나면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더 침착해지는 성격. 그녀가 가진 장점 중 하나다. 지진처럼 닥치는 별별 문제에 단련이 돼서일까? 이국 땅에서 겪은 블록버스터급 지진 또한 여자의 평정심을 깨뜨리지 못했다. 듣다보면 ‘참, 결혼한 여인의 일생이란 뭘까’ 씁쓸한 의문을 갖게 하는 그 큰일들을 여기다 차마 다 쓰지는 못하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자의 인생에 일어난 ‘지진’의 대부분은 남편이 일으켰다.

맞선으로 만나 3개월 데이트하다 결혼한 남편은 혼자만 해사한 ‘소년’이었다. 여자가 ‘아줌마’가 되든 말든. 친구 만나기 좋아하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쏘다니면서 수석 줍고, 낚시하고, 사냥하고 놀았다. 미술적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 재능은 순전히 취미용으로만 써먹었다. 채집해온 수석을 괴어둘 나무받침대를 조각한다든지 하는 일에. 직업은 재능과 딱히 상관없는 것들, 누구든지 아무나 쉽게 시작해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일뿐이었다. 아주 많은 직업을 가졌으면서 또한 아무 직업도 없는 사람이었다. 경제권을 손에 쥐자 친구들 빚보증을 서주고 받아내지 못할 목돈을 여기저기 빌려줬다. 시아버지가 자수성가해 모은 재산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편 친구들에게로 옮겨가 흩어졌다. 그러다 어느새 벽지가 곰팡이로 뒤덮이고 화장실은 아예 현관 밖에 있는 단칸방을 ‘우리 집’이라 불러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파란만장했던 한때, 그런 곳에서까지 산 적이 있다. 지금 떠올리면 아득한 옛날 일이다. 자식들은 사춘기 내내 온갖 열악한 주거환경을 체험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었다.

<font color="#017918">[금과옥조]
우리 엄마·아빠처럼 살지 않으려면?
</font><font color="#638F03">① 확실한 밥벌이 기술이 있는 배우자를 찾는다.
② 친구와 돈거래는 웬만하면 하지 말자.
③ 빚보증은 무조건 거절한다.
④ 착한 사람보다 안 착한 사람이 더 잘 산다.
⑤ 사람은 무릇 자기 집이 꼭 있어야 한다.
⑥ 친구는 가려서 사귄다.
⑦ 머리 검은 짐승은 믿을 게 못 된다.
</font>행복하고 단란했던 신혼

하루는 자식이 우리 집 가훈은 뭐냐고 물었다. ‘우리집 가훈의 뜻과 의미 조사해오기’가 학교 숙제인 날이었다. 남편이 급조한 가훈은 ‘가화만사성’이었다. 자식들에게는 존재감 희박한 가화만사성보다 저 금과옥조들이 더 힘셌다.

여자가 일본에서 돈을 벌자 집안 사정이 훨씬 좋아졌다. 자식들이 장성한데다 남편이 취직해 적은 돈이나마 월급을 타니 차츰 그리 되었다. 남편은 2년째 어느 곳 경비로 나간다. 여자가 일본으로 떠나고 홀로 한국에 남게 되자 남편이 변했다. 마음 붙이고 재미나게 산다. 경비 일이 꽤 적성에 맞는 건지, 그 직장이 마음에 드는 건지 동료들 사이에 평판이 좋다. 쾌활하게 일 잘한다고 말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남편은 먹다 남은 생선뼈 나부랭이를 챙겨가 일터에 얼쩡대는 고양이들 먹으라고 으슥한 구석에다 뿌려두곤 한다. 순찰 돌다 살펴보면 길고양이 일가족이 그걸 주워 먹다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치단다. 그렇게 살뜰히 길고양이를 챙기듯 자기 가족도 신경 쓰는 가장이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럼 여자가 겪어야 할 시련이 줄었을 텐데.

중요한 건 이거다. 여자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밝고 곱다는 사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한국 트렌디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자식이 선물해준 립글로스를 바르고 다니고, 텔레비전에서 조금만 슬픈 장면을 보면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라는 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세요?”

나는 의 강호동이 아니지만 이렇게 물었다. 게스트라면 “지금이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라 대답하겠지만, 여자는 시아버지 건강하고 자식들이 아주 어렸던 시절을 꼽았다. 그땐 걱정거리가 많지 않았다. 애들은 잘 자랐다. 남편은 시아버지 사업을 얌전히 돕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여자를 딸만큼 아꼈다. 아들보다 며느리 편을 들어줄 정도였다. 버젓이 ‘응접실’과 ‘앞뜰’이라 불러도 남부끄럽지 않은 공간이 있는 단독주택, 그런 시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큰며느리라 일이 많아도 좋았다. 한동네에서 어울리던 또래 주부 친구들에게 시집 잘 갔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생활력 없는 남편이 경제권을 쥐면서 집안은 서서히 영락해갔다. 여자가 맛본 가정주부로서의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영락에 가속도가 붙는 동안 여자는 시아버지 병수발 잘한 며느리라고 그 고장 효부상을 받고, 두 번쯤 식당을 개업했다가 접고 식당 아줌마가 되었으며, 결혼 생활에 위기를 맞이했다. 이윽고 더 이상 주저앉을 게 없는 상태로 영락이 완결되자 옆 나라에 건너가 취직했다. 그리하여 조국으로 피난을 오는 현재에 다다랐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길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여자의 일상은 이러했을 것이다. 장소는 일본, 식당에 출근해 주방장으로서 주방 내부의 일을 통제하고 지시하며 음식을 만든다. 사장과 신메뉴 레시피나 식재료를 상의한다. 봄철이면 매번 삼나무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는다. DVD 대여점에서 최신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녹화본을 빌려다 본다. 근무 중 휴식시간이나 일요일이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한다. 엔과 원의 환율을 체크한다. 출퇴근하는 전차에서 휴대전화 무선인터넷으로 한국의 가십거리나 뉴스를 찾아 읽는다. 정기적으로 마사지받아 피로를 푼다. 절에 간다. 집안일을 한다. 사업 구상을 한다. 기타 등등.

그런데 예정에 없던 이번 귀국으로 일상이 깨졌다. 매일 친구, 친척, 가족들과 돌아가며 만났다.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여자의 안부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차례로 밥을 샀다. 여자는 오랜만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실컷 웃고 떠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그녀는 돌아간다. 모든 걸 예전처럼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든 가야 한단다. 자꾸 괜찮다고 그런다. 괜찮지 않다고 거듭 말해봐야 안 먹힌다. 돌아가야 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니까(반납 연체 중인 DVD 7개가 그 이유들 중 하위권에 있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여자에게 묻고 싶다.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고. “지금”이라는 대답을 들으면 참 기쁠 거라고, 분명 그럴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글 한혜경 제1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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