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찰리 윌슨 회장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GM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수물자를 납품하면서 미국 최대 기업으로 부상한 뒤였다. 기업체의 최고경영자(CEO)가 행정부에 입성하는 것을 두고 워싱턴 정가에서도 말이 많았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유시장은 없다뜯어보면, 그 말 이면의 논리는 단단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간기업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기업은 부와 일자리, 세수를 만들어낸다. 개인은 기업을 통해 일자리를 얻고, 국가는 기업을 통해 세금 수입을 걷는다. 기업이 만들어낸 부로 국가 경제의 파이가 커지면 혜택을 보는 이는 사회 구성원 전체다. 따라서 정부가 할 일은 시장에서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다. 기업들의 발목에 족쇄를 다는 규제는 기업뿐 아니라 경제 전체에 해악을 미친다. 이 논리는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휩쓴 신자유주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을 믿는 신자유주의는 2000년대 한국에는 ‘MB 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상륙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신자유주의 기관차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요란한 굉음을 울리면서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 완화는 미국 금융기관의 막대한 부실로 이어졌다. ‘기관차’를 이끈 신자유주의 일색의 주류 경제학자들의 답변은 궁색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을 두고 영국 아카데미는 왕실에 보낸 보고서에서 “경제학자들이 개개인은 유능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일은 잘해내고들 있었지만 금융위기 직전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제학의 실패’, 혹은 너그럽게 봐도 ‘경제학자들의 실패’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뜨는’ 학자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그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국가의 역할을 한결같이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새 책 를 냈다. 여기서 ‘그들’은 주로 신자유주의자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한국 땅에서 그들은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을 선전하거나 집행하는 학자 및 관료집단이다. 장하준 교수의 프리즘을 통해 본 현재의 경제 상황은 분명히 다른 색이었다. 그가 말하는 ‘23가지’ 가운데 두 가지만 골라 살펴보자.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첫머리를 장식하는 1장은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시장만능주의를 정조준했다. 그는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19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819년 영국 의회에는 아동 노동을 규제하기 위해 면직공장 규제법이라는 법안이 상정됐다. 아홉 살 미만의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열 살 이상의 아동 노동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당시로선 ‘급진적’인 이 법안을 두고 시장론자들이 들고일어섰다. “신성한 계약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자유시장의 기반을 파괴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21세기 문명화한 사회에서 아동 노동을 시장에 편입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자유시장에 대해 합의된 ‘경계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금만 생각하면 ‘시장의 자유를 가로막는’ 규제는 지금도 허다하다. 노예나 마약, 인간 장기매매도 규제 대상이다. 총기나 대학입학자격도 마찬가지다. 장 교수는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13장의 제목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다.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부자 감세' 논란과 맞닿아 있다. 국제 자료를 보면, 1980년대 이후 소득 불평등이 심해졌지만 미국·일본 등 주요 7개국(G7) 국가 모두에서 국민총생산 대비 투자 비율은 줄었다. 부자들에 대한 혜택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는 상류층에 누적됐다. 1989년부터 2006년 사이 미국 총소득 증가분의 91%는 소득 순위 상위 10%에게 돌아갔다. 특히 상위 1%는 총소득 증가분의 59%를 차지했다. 경기 부양을 위한 부자 감세의 어두운 귀결인 셈이었다.
“장 교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라”
경제 전반에 걸쳐 23가지 주제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능수능란하다. 주제의 폭도 넓다. 아프리카의 저개발, 자본의 국적, 탈산업화 등의 문제에 대해 신자유주의가 유포한 통념을 뒤집는 주장을 편다. 논거로 제시되는 자료들은 시공을 폭넓게 아우른다. 19세기 초 영국 법안부터 1970년대 미국의 만화영화, 최근 아프리카의 경제지표까지 곳곳에 등장한다.
복잡한 경제 현안을 다룬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수식과 도표가 없다. “경제학의 95%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책은 상식적인 언어로 경제 현상을 풀이했다. 그가 2007년에 낸 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강의였다면, 이번 책은 아예 강단에서 내려와 일반인과 눈을 맞추며 내놓은 해설로 볼 수 있다.
쉽다고 해서 내용이 얄팍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을 두고 영국 일간지 은 저자 인터뷰와 함께 서평을 두 차례에 걸쳐 실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신문의 한 고정란에서는 아예 에드 밀리밴드 영국 노동당수에게 “장 교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라”고 권유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가리켜 “좌에 속하지도 우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장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볼 확률은? 안타깝게도 높지 않다. 그의 책 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28일 헌법재판소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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