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행복 상자의 심실(心室)을 확장하자”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등록 2016-05-18 07:01 수정 2020-05-02 19:28
우리 시대 한국인은 지구상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압축적인 경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번영 속의 불행’에 빠져 있다. 그 불행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김문조(67) 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는 “행복 상자 깊이를 심화하고 삶에 활기를 불어넣을 창조적 행복의 심실을 확장하자”고 주창했다. 김 교수는 2014년 12월 네이버 ‘열린연단’에서 ‘행복의 추구’를 주제로 특강을 한 바 있다. 한국사회학회장을 지냈고, 저서로 (2008) 등이 있다. 지난해 정년퇴임했다. 인터뷰는 지난 4월11일 서울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 한국학관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손정민

손정민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딱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매우 추상적인 단어다. 개인적·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개념이기도 하다. “일단은 만족이나 기쁨을 동반한 긍정적 마음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서 제시한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고귀한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안락 추구를 넘어 자신의 잠재 능력과 가능성을 삶 속에서 펼칠 수 있는 ‘자기완성적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단기적·말초적·무절제적인 쾌락적 즐거움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한국어 ‘행복’과 영어‘Happiness’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 차이가 있는 걸까. “우리한테 사실 행복이란 말은 낯선 용어다. 우리는 행복 대신 ‘운이 좋다’고 말하는 데 더 익숙했다. 행복은 마치 행운처럼 멀리서 주어지는 것쯤으로 알았다.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그냥 멀리 있는 것이고 운이 좋으면 하나씩 걸려들어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예전에 행복을 일상용어로 감히 쓰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행복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한 배경은 뭘까?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궂은일부터 챙기는 게 예의였다. 기쁜 일은 그다음이었다. 즉, 고통이 우선순위고 행복은 조금 멀리 해야 하는 것이며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왔다. 나 행복해, 라고 당당히 말하면 ‘그래, 잘났어’라고 면박이나 받을 것 같았다. 그런데 행복 담론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아니었나 싶다.

이전까지 억눌려 있던 열광이나 기쁨을 당당히 표출하고 누릴 수 있다는 이른바 ‘탈인습적 전환’이 일어났다. 어쩌면 물질적인 풍요나 압축 성장에 이어 행복 역시 압축적으로 느껴야겠다는 열화가 폭발적으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2012년 대통령선거 때 ‘국민행복’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다. 그전에 그에 대응되는 개념은 ‘국가발전’이었다. ‘국가’가 ‘국민’으로, ‘발전’이 ‘행복’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국민들의 마음 상태, 사람들의 내면이 굉장히 황폐한 시기다. 양극화 심화와 ‘갑질’, 사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불만, 불안 차원을 넘어 이제 일종의 ‘원한’ 같은 게 쌓이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한’이 맺힌다고 할까.” 

‘번영 속의 불행’으로 묘사할 수 있는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경쟁도 보통 경쟁이 아니라 고투, 전쟁을 치르듯 기를 싸매지 않으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양극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희망계급과 낙망계급이랄까, 몇 번 잘 안 되어도, 파이가 계속 커지고 있으니 ‘나도 언젠가는!’ 하는 게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자본을 독점하는 극소수 야망계급이 있고, 또 한쪽엔 ‘너네나 잘해봐라’며 냉소하는 다수의 절망계급이 등을 돌리고 있다.

“우리에게 낯선 행복… 양극화 탓, 원한 쌓여가”

계약직은 물론 정규직, 대기업 임원들조차 절망계급이다. 생물학적으로 한 민족이라 해도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이 되어버리고, 계급 간 단절이 크다. 지위 상승의 통로가 막혀, 단순히 절망이 아니라 원한이 되어가고 불평등 격차가 고착되고 있다. 수년간 달라진 것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걸까? 생애 전체를 통해 궁극적으로 정말 ‘행복’이란 것을 추구하는 것일까? 생존과 종족 번식이 인간의 목적이지, 행복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진화론의 주장도 있다. “행복은 인류만이 얘기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환원론자는 종족 번식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중간에 설정할 수 있는 과정들이 또 있다. 문화적 유전인자, 밈(meme)이라는 게 있다. 특정 생명체마다 어떤 문화적 습속에 의해 유전자처럼 굳어지고 계승·전승되는 게 있다는 이론이다. 인간 사회에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밈이 축적되고 있을지 모른다. 종족 번식이 목적이라는 설명은 인간과 다른 생물 간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행복을 보통 ‘요건’으로 생각한다. 재산·지위·명예·성적·건강·결혼·자식 같은 요건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식이다. “요건을 충족하고 있느냐에 주목하는 관점을 ‘요건(component) 모델’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일정한 문턱을 넘어서면 사람들의 만족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있다. 즉 어떤 경계를 넘어서면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 많이 생겼다. 이걸 어떻게 채울 것인가? 요건 모델만으로 완전한 설명이 안 되니까 심리학자들이 ‘욕구’라는 것을 끌고와 설명했다. 물질적·금전적 수치가 있는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아쉬운 사람일수록 더 벌면 훨씬 더 만족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학력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야 좋은 대학 가는 게 큰 만족감을 주겠지만 대안교육을 생각하는 사람한테 외국어고교는 별로 필요 없다. 결국 욕구와 요건의 합체가 중요하다. 저마다 원하는 욕구를 채워줘야 행복이 따르는 것이지, 요건을 많이 갖췄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재산과 지위는 본질적으로 ‘많을수록 행복을 북돋우는’ 동기 요인이라기보다 ‘없을수록 불만을 더하는’ 요인의 전형이다. 물적 소유를 외면한다기보다 일정 수준의 물질적 요건이 주어지고 나면 소속감이나 사랑 등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요소에 대한 ‘욕구’가 발동한다는 얘기다.

행복과 만족감은 흔히 욕구와 요건의 순수한 결합, 즉 둘을 곱한 면적의 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물욕이나 갈증 외에 빠진 것이 더 있다. 바로 ‘가치’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복방정식은 요건과 욕구에 가치까지 포괄하는 ‘통합 모형’이라고 그는 요약했다. “사회학자가 보기에 개인들의 욕구는 문화적·역사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재개발할 때 이른바 ‘알박기’가 있다. 제일 골치 아픈 사람이 ‘죽어도 못 판다’는 알박기다. ‘증조할아버지가 산 땅이라 백만금을 줘도 못 판다’는 것이다. 순교자도 마찬가지다. 그냥 내 목을 치라고, 이렇게 순교해야 하느님한테 가까이 가는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런 ‘가치’가, 기존의 욕구와 요건 외에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행복 축으로 설정된다. 결국 행복 상자는 욕구와 요건의 곱셈에서 가치까지 포함한 3차원 형태를 이루게 된다.” ‘필요(Need)이론’에 따르면 만족은 행복과 통한다. 그러나 거기에 만약 가치가 결여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과연 배부른 돼지가 궁핍한 소크라테스보다 행복한가?

“행복방정식, 요건·욕구 외에 ‘가치’ 담겨야”

우리 헌법에 행복추구권이 명시돼 있고, 1789년 프랑스혁명 선언에도 ‘모든 이의 행복’이란 구절이 포함돼 있다. 철학자 칸트도 ‘행복은 오늘날 모든 세계의 표어’라고 했다. 행복은 개인적 건강, 욕구, 가치관뿐 아니라 노동시간·임금격차·직무 스트레스·가족관계·지배구조·대형 참사 등 제반 사회 여건의 함수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행복이 아닌 불행과 고통의 길을 자의적으로 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존엄하려면 어느 정도 필요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요컨대 행복은 존엄한 존재로서 개인이 사회적으로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다. 포만이나 편익 같은 보편적 욕구도 있지만 집단적 가치도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 수준을 넘어선 집단적·공동체적 행복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법적·제도적 관여나 개입이 정당성을 지니기도 한다. 행복의 조건들이 굉장히 불공정하게 분배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은 공적 담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런 불공정은 국가가 시정해야 하고 국민이 권리로서 주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의 행복정책은 행복할 여건을 조성하는 데 있지 어떤 시책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행복은 사회적으로 누려야 할 기본권”

경제지표는 세계 10위권 안팎을 오르내릴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반면, 자살률·독신율·이혼율·음주량·고소율 같은 사회지표는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열한 상태다. 이를 대비해보면, 행복국가 반열에 진입하기 위한 공적인 정책 대안이나 제도적 노력이 강구돼야 한다는 “조급증이 발동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국민행복시대’는 정치적 레토릭이거나 오만한 발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저마다 행복을 느끼는 것이 다른데, 국가가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해줄 수 있느냐는 따져봐야 한다.”

과연 행복이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층위를 지닌 쟁점이라면 물질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다 해도 항상 불행한 상태는 아닐 수 있는 것일까? “개념적으로 행복의 반대를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행복과 불행이 우리 의식에 들어오는 방식은 다르다. 자기 직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자체의 보람이라는 직업의 내적 가치를 좋아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은 내적 가치보다 봉급이 적다거나 작업 조건이 고약하다는 외적 요건을 꼽는다. 대체로 불행을 감지하는 건 외부 요건 때문이다. 즉, 불행은 자기 내부에서 주관적으로 선별하는 기제가 덜하고 외부에서 직접 온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면 그냥 불행하다. 행복은 그렇지 않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어린아이들은 순진하니까 그저 신난다,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그럴수록 자제해야 한다’며 경계할 수도 있다. 이처럼 행복은 불행보다 훨씬 복잡한 경로로 들어온다. ‘불행은 바깥에서 오고 행복은 안에서 온다’는 말이 그것이다. 행복은 우리 내면에서 ‘아, 이게 행복이야’라고 풀이해줘야만 느끼는 것이다. 신나 보이는 일이 있다고 즉각적으로 행복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는 한국인의 행복 관련 정신세계에 ‘관계주의, 현세주의, 배상주의’라는 3대 정맥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듯 한국인의 의식 세계도 쉽사리 진단하기 어렵지만 표층에 “끼리끼리” “빨리빨리” “많이많이”로 표현 가능한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한국인은 누구인가’ 그 상을 깊이 탐구해볼 기회가 있었다. ‘마음의 습속’ 같은 것을 묶어보니 3대 정맥이 보였다. 친족관계 중심으로 인간관계·학연·지연 등을 중시하는 ‘관계주의’가 그 하나다. 두 번째는 현세주의다. 죽고 나면 끝이니 현세에서 다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총의료비용의 절반 정도가 죽기 한두 달 전에 전부 쓰인다는 통계가 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한국인은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안 가보려는 강박 같은 것이 대단하다. 또, 현세를 누려야 하니 얼마나 바쁜가. 이는 ‘빨리빨리’와 연결된다. 또 다른 하나는 ‘배상주의’다. 기회 있을 때 조금이라도 틈새가 있으면 뽑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뽑아먹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상’은 그동안 내가 이래저래 당한 것을 이 기회에 다 받아내야겠다는 심리다. 요컨대 ‘잘 아는 사람끼리, 살아 있을 때, 챙길 수 있을 만큼 최대로 챙기자!’는 삼위일체의 세속주의다. 이런 사회심리가 행복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삼발이 행복은 늘 위태, 행복 기둥 더 늘리자”

김 교수가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말한 용어가 ‘행복 상자’다. “행복 상자가 우리나라에는 몇 개밖에 없다. 전형적인 것이 ‘부귀다남’(富貴多男)이다. 자식(다남·아들이 많음)은 이제 더 이상 행복 요소가 아니다. 건강은 자신의 건강이고 부는 가족의 부, 귀는 사회적 지위로서 사회라는 맥락에서 그 행복이 결정된다. 사회는 가정과 나를 포함한다. 그래서 ‘귀’는 나와 가족까지 포섭되는 가장 넓은 개념이다. 말하자면 가장 총체적으로 우리는 ‘귀’를 위해서,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들이 대학입시에 몰두하는 것도 자식이 귀하게 됐으면 하는 거다. 우리가 관심으로 삼는 행복 상자에 든 것은 건강·부·귀, 이 세 가지밖에 없다. 행복 상자에 담길 수 있는 것을 자꾸만 늘려야 한다.” 행복 상자에 있는 기존 세 가지의 양을 더 키우자는 게 아니라, 가짓수를 늘리자는 주장이다. 고대 거석상으로 알려진 영국 스톤헨지처럼 큰 거석을 받치는 행복 기둥이 많아질수록 더 견고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삼발이 행복은 늘 위태위태하다. 우리도 행복의 기둥이 여러 개 있으면 좋겠다. 영화 의 원작 제목은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지주가 여러 개 있으면 안정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상자에 담기는 기둥 수를 늘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눔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베풀고 나누면서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한비야 같은 사람이 그렇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 조금씩 와닿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한테 주류는 앞의 그 세 가지다. 세 가지를 다 채워놓고 나서 부가적으로 다른 걸 늘려보려는 것이지, 세 가지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채우려는 건 아직 아닌 것 같다. 자기 자녀가 대학 안 가고 전통주를 빚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 집안이 한번 뒤집어져야 하지 않는가.”

김 교수는 “마음이 열려야 창조적 행복 기둥이 많아진다”고 요약했다.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품는 만큼 느낀다’가 바로 행복의 심실(心室)을 확장하는 것과 직결된 언표다. 기쁨이나 보람을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원천, 요컨대 행복의 샘을 얼마나 많이 품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행복의 샘은 주변 현실 이모저모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특권이다. 금이나 보옥이라고 항상 번쩍이는 건 아니다. 쇠붙이든 유리조각이든 빛을 받아야 비로소 반짝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 부여가 되지 않은 일에서는 기쁨이 나올 수 없다. 풍성한 가치 부여가 행복의 샘을 늘이는 첩경이다.” 김 교수는 “같은 현실이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건 우리가 빛을 쏜 것”이라고 은유적으로 말했다.

조계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동향분석센터장 kyewan@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