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직장에서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으레 이런저런 건배사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요즘에는 “건배!”라는 고전적이고 교과서적인 건배사는 그리 인기를 못 얻고 있고, 그 술자리를 있게 한 인연이나 동일성에 부합하는, 또는 세태를 반영하는 재치 있는 건배사를 해야만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래서 회식에 대비해 재미있고 창의적인 건배사를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순발력이 부족해 톡톡 튀는 건배사를 못하는 사람에게는 ‘위하여!’가 가장 무난한 건배사이다. ‘위하여!’ 앞에 자기의 희망사항이나 지향점, 또는 그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를 정리해 짤막하게 덧붙이면 그런대로 판을 깨지 않는 건배사가 된다.
그러나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 차츰 톡톡 튀는 건배사들은 밑천이 드러나고, 이후는 그냥 ‘위하여!’가 이어지게 되는데, 중년 이상의 세대라면 대개가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가 단골 메뉴다.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신다? 전국의 술꾼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위하여! 위하여!’를 숱하게 외친 그 다음날 아침의 당신의 머리와 위장을.
1만여 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술을 접한 이래, 술은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나 한 사회의 유기성을 유지하는 면에서나 숱한 논란을 야기했다. 특히 술은 그 기능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바, 백해무익하다는 한 극단에서부터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이롭다는 설, 심지어 술이 치료약이 될 수 있다는 연구까지 술과 건강과 관련한 담론은 끝이 없다. 그 논란은 정확한 결론 없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술이 백해무익하다는 근본주의적 시각은 오늘날과 같이 술의 존재가 인류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 된 이상 더 깊은 논리 전개가 먹혀들지 않는다. 적당한 음주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발효주 문화권과 15세기 이전 증류주를 몰랐던 시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높여 약주라 부른 것, 그리고 유럽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건강식품으로 여겨 즐겨 마신 것에서 그 단서를 알 수 있다.
치료약으로서의 술, 술을 이용한 치료법을 ‘에틸로세라피’(ethylotherapie)라 한다. 12세기 아랍인들은 술의 영혼과 같은 술의 주성분 알코올을 알아냈다. 이 물질은 곧 살레르노 학파에 의해 유럽에 알려졌다. 유럽의 수도사·연금술사·이발사·의사들은 서로 다투어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발효주를 증류해 신비의 묘약이자 무병장수의 영약으로서 이 물질을 처방했던 바, 바로 이것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증류주의 탄생과 확산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독한 증류주는 젊음을 지켜주고, 쓸데없는 근심을 없애주며, 심장 기능을 강화하고, 복통·마비·치통을 치료해주는 동시에 페스트조차 예방할 수 있는 만능의 물질로 여겨졌다.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이 가진 멸균 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치료약으로서 술이 광범위하게 취급된 것은 약이 흔치 않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술이 건강에 좋고 웬만한 질병에 모두 약으로 치료될 수 있다는 중세 유럽인들의 생각은 많은 민간요법으로도 번져갔다. 프랑스의 한 인류학자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지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민속 전통에는, 타박상에는 비둘기 똥을 탄 백포도주를 끓여 마시고, 폐병에는 고급 적포도주에 집고양이의 오른쪽 귀에서 뽑아낸 세 방울의 피를 타서 마시면 낫는다는 황당한 처방전도 있다.
적당한 음주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해 술이 만병통치약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세상 천지에 술이 넘쳐나게 되고, 또 그로 인한 천형의 질환 알코올의존증이 만연하게 됐으니, 술을 치료약으로 보는 관점은 이제 폐기돼야 할 것이다. 한 달째 달고 산 감기가 온갖 약으로도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몸이 오슬오슬 춥고 골이 띵하다. 에라,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한잔 마시고 푹 자볼까?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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