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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림 가득 걸린 일본 전시장


일본 도치기현립미술관 큐레이터 하시모토 신지가 기획한 ‘조선왕조의 회화와 일본’전
등록 2008-12-09 14:11 수정 2020-05-03 04:25

“사실… 이 전시를 꾸리려고 10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제 전공은 아니지만, 고고한 조선의 옛 그림이 사랑스럽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10년! 일본의 산골 소도시 박물관의 학예사가 털어놓는 고백 속엔 결기가 맺혀 있었다. 전문가가 없어 숱한 조선시대 그림들이 일본·중국산으로 낙인찍히는 게 무엇보다 안타까웠다는 ‘전시기획자의 변’ 앞에 기자는 민망해졌다. 그는 5년여 전부터 일일이 조선 그림을 소장한 일본 각지의 개인 컬렉터들과 골동상들을 수소문해 작품을 모아왔다. 수시로 한국의 국공립 박물관을 돌면서 국내 작품 대여도 직접 교섭했다고 한다. 앙숙인 이웃 나라 옛 그림에 대한 그 핍진한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생긴 것일까.

큐레이터 하시모토 신지. 한겨레 노형석 기자

큐레이터 하시모토 신지. 한겨레 노형석 기자

“힘들었지만, 조선 그림이 가득 걸린 전시회장 전경을 손꼽아 고대해왔다”는 하시모토 신지(45). 수도 도쿄에서 북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일본 우쓰노미야시 도치기현립미술관의 큐레이터다. 일본에 숨어든 조선시대 미공개 전통 그림들을 대다수 공개한 특별전 ‘조선왕조의 회화와 일본’전을 기획해 양국 학계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 11월2일 그가 재직 중인 도치기현립미술관에서 시작된 이 전시(12월14일까지)는 요즘 조선시대 옛 그림 애호가나 연구자들에게 반드시 들러야 할 순례 코스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내년 7월12일까지 시즈오카, 센다이, 오카야마 등 현지 3개 미술관을 추가로 순회할 이 대형 전시는 전시 얼개나 출품작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다.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 미술관의 조선 회화 비장품들이 200점 이상 출품된 초유의 조선 회화사 종합 소개전이다. 조선왕조의 미술 역사를 아우르는 통사 형식의 기획전은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한 국내 어떤 공사립 박물관도 기획하지 못했다. “양국 연구자들이 한-일 그림의 영향 관계에 대해 서로 다양한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장이 될 것”이라는 그의 기대는 빈말이 아니었다.

산수화를 비롯해 불화, 도자기, 민화, 자수화 등 모두 320여 점이 나온 전시장은 회색톤의 편안한 분위기였다. 1부 조선 회화의 정화, 2부 일본인의 시선으로 나뉘어 시기별로 조선 회화를 일별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핵심은 전기, 중기 작품들이었다. 국내에는 거의 없어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희귀한 그 시기 작품들이 차곡차곡 진열창에 걸려 있었다. 들머리에서는 를 그린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15세기 와 중종의 사위 구한의 인장이 찍힌 를 볼 수 있었다. 안개 낀 대기 속에 담담한 기암 계곡의 정경이 다가오는 는 17세기 일본에 건너가 천황가 시종이 소장하고 있다가 왕실 기관 궁내청에 넘긴 것이라고 했다. 좀처럼 컬렉션을 공개하지 않는 궁내청이 기획자의 간청으로 처음 공개했다.

중국의 큰 호수 동정호의 정경을 상상해 그린 조선 전기의 소상팔경도들을 차분히 둘러보는 맛도 남달랐다. 조선 전기 산수화들은 11~13세기 중국 송·원나라대의 기괴한 산악 풍경을 담는 화풍의 전통을 잇되, 중국·일본과 달리 훨씬 선이 원만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그 완만하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풍경의 숲을 걸었다. 조선 중기는 일본 에도시대 거장 가노 단유가 낙관까지 베꼈다는 16~17세기 최명룡의 산수도 등이 그윽한 풍취로 다가왔다. 후기 작품 중에는 고독의 화가 심사정이 손가락으로 그린 꽃과 새 그림, ‘오력’이란 낙관이 붙은 담백한 관동팔경 진경산수화가 아릿했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과 한지 콜라주 그림으로 유명한 거장 이응로가 초기 일본 유학 시절 그린 우키요에풍의 천연색 조선 풍속화도 눈에 띄었다. 2부에서는 조선 초 강아지 그림의 대가 이암이 그린 그림을 본뜬 에도시대 거장 소타쓰의 강아지 소품과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확대해 그린 1811년 통신사도권의 생생한 채색화 등이 전시되어 한-일 회화 교류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놓았다.

시쳇말로 시골 미술관인데도 전시장에는 일본 특유의 철저한 준비와 작품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원래 진열장이 없는 현대미술 전시장인데 진열장을 주문해 관객 눈높이와 동선에 맞춰 배치했다. 막대한 작품 수량에도 불구하고 산만한 느낌이 거의 없었다. 하시모토는 원래 일본 무로마치시대 수묵화를 연구하다 그 시대 영향을 준 조선 회화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내 연구기반이 거의 없는 이상 논란이 되더라도 분석이 가능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기회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며 “내년 예정으로 조선 회화에 대한 연구논문집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기자와 동행한 강관식 교수는 그에게 “굉장히 고맙고 부럽지만,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 전시로 많은 조선시대 작품들이 회화사 연구의 지평으로 나왔다. 연구된 것이 없는 만큼 상당수는 진위 및 국적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는 이제 국내 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하시모토는 당부했다. “서울과 도쿄는 가까워졌지만, 과거 가까웠던 두 나라 옛 그림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배용준씨의 한류만 아니라, 옛 그림 한류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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