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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진실 혹은 거짓?


백제 미륵사 사리 봉안명문기 발굴로 불붙은 ‘서동요’ 진위 논란, 역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등록 2009-02-11 16:44 수정 2020-05-03 04:25
<삼국유사> 오류 논란을 촉발시킨 익산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의 출토 모습.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금판이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삼국유사> 오류 논란을 촉발시킨 익산 미륵사 서탑 사리장엄구의 출토 모습.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금판이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한국사의 ‘아라비안나이트’? 13세기 고려 승려 일연(1206~89)이 편찬한 의 텍스트를 둘러싼 후대의 열광과 논란은 80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지속된다.

새해 벽두부터 텍스트를 둘러싼 ‘쑥덕공론’이 한창이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북 익산 백제 미륵사 서탑의 사리 항아리와 사리 봉안명문기 발굴로 의 ‘서동요’ 설화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금판에 새긴 봉안기 명문에 나온, 백제 고위관직인 좌평의 딸이 미륵사 건립을 발원한 무왕의 왕비라는 구절은 날벼락과 같았다. 무왕이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한 왕비 선화 공주가 절을 발원했다는 기록의 진위가 당장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연말 경주 사천왕사터 목탑터 기단부 발굴 결과 다시 불거진, 기단부 신장상 부조가 사천왕상이냐 팔부신중이냐의 논란도 바로 의 기록이 빌미를 준 것이었다. 걸출한 조각승 양지가 탑 아래 팔부신중을 빚었다는 기록의 진위가 바탕에 깔린 까닭이다. 이달 초엔 일연이 를 집필한 경북 군위 인각사 경내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국보급 공양구 유물들이 다수 발견돼 그의 행적이 다시금 회자되기도 했다.

‘서동요’ 설화의 허구성을 따지는 건 의미심장한 상상력의 경연이다. 설화의 실체 자체를 왈가왈부하는 건 가당치 않다. 문제는 상상력으로 역사를 형상화한 일연의 의도를 오류로 재단하는 실증의 편견이다. 역사적 개연성을 놓고 허구적 창작의 배경을 따질 수는 있어도 기록이 가짜라거나 오류라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전제다.

기실 다른 사서와 비교하면, 는 기록성과 설화적 성격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학계에서는 누구나 이 사서의 풍부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한다. 가능한 대로 사적들의 전거를 밝혀놓았을 뿐 아니라, 인용 문헌 또한 원문대로 살리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신라어의 자취와 당대 의식 세계를 날것으로 전하는 ‘서동요’ 같은 향가 14수를 실은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방 뒤 역사를 진동시킨 고고 발굴의 현장에는 거의 어김없이 의 내력이 깔려 있었다. 문무왕의 동해룡 전설이 서린 경주 감은사 발굴, 풍납토성 위치 비정, 경주시가 최근 석탑을 복원 중인 남산 염불사 창건 등의 배경에 고증과 설화가 몸을 섞은 의 기록들이 자리잡고 있다.

칠순 넘긴 일연이 800여 년 전 경북 군위 산골에서 를 쓸 때 그는 정사의 사관들에겐 성도 안 찼던 민초들의 구전담 같은 자투리 사료들을 ‘남기는 이야기’라는 뜻의 유사에 엮어냈다. 민중·불자들의 부스러기 역사를 중요한 사료로 삼되, 현장 답사와 고증에 인색하지 않았다. 2006년 번역본을 펴낸 허경진 연세대 교수는 서문에서 “일연의 글쓰기는 단순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면서 “엄격한 사관의 모습으로, 구도하고 전법하는 자세로 유사를 썼다”고 단언한다. 미륵성불의 꿈을 이룬 백월산의 두 성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일본에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 연오랑과 세오녀, 뜬구름 인생의 함의를 전해주는 조신 설화가 그의 붓끝을 타고 살아남았다. 절실한 소망과 기원으로 현실을 헤쳐나갔던 장삼이사들의 속내가 숨어 있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계급·계층에 따라 숱하게 다른 관점의 진실이 갈래친다는 것을, 그 가운데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힘의 논리로 기록된다는 현실을 그는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른다. 일연이 승려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평생 모은 자투리 설화 사료들을 고증하며 사서의 내용을 채운 이면에는 역사의 다기한 단면을 기록하려는 열정이 자리잡고 있다. 메시아적인 미륵불 신앙을 공통으로 받들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거듭했던 6~7세기 신라·백제의 정치사를 극적인 러브스토리로 바꾼 ‘서동요’ 설화의 채록이야말로 그런 일연의 다원적 사관을 드러내주는 증표다.

미륵사 사리장엄구의 발굴과 ‘서동요’ 논란으로 재연된 의 오류 공방은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후대에 어떤 방식으로 전해질까란 물음도 새삼 던지게 한다. ‘역사는 권력’이라는 철학자 푸코의 해체주의적 명제를 꺼내지 않더라도. 후대 역사는 권력 쟁투에서 승리해 지식을 독점한 강자들의 논리로 윤색되곤 했다. 일제시대와 해방, 한국전쟁에 대한 엇갈린 해석이 극심한 사회적 갈등으로 되살아나고, 고구려를 둘러싼 한-중 역사 전쟁이 벌어지는 오늘날도 역사는 여전히 치열한 뿌리 찾기의 투쟁이 아니던가. 용산 철거민 화재 참사를 좌경 세력의 테러로 몰아가는 공안 설화,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서 경찰 버스 바리케이드를 ‘명박산성’이라고 불렀던 지난해 여름 촛불행진의 추억 등은 훗날 어떤 설화로 윤색될까. 우리는 역사에 휘둘리면서도, 그 엄숙한 의미에는 무감하다. 1300여 년 전 미륵사 사리 명문기와 의 ‘서동요’에 어린 역사적 함의를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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