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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신홍순 사장님께

등록 2008-08-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식’의 목표를 가진 ‘강남 부유층을 위한 문화공간’을 벗어난 예술경영을 보여주길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13년 전 신홍순 사장님의 육성을 기억합니다. 1995년 LG패션 사장 시절 당신이 직접 모델로 출연해 찍은 TV 광고 말이지요. 그때 깔끔한 컬러풀 셔츠에 총천연색 멜빵을 메고서,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로 ‘패션공화국’의 포부를 이야기하셨지요. 옷 잘 입는 멋쟁이 최고경영자(CEO)의 이미지가 남았습니다. 지난달 국내 대표 공연시설인 서울 예술의전당(이하 전당)의 수장이 됐다는 소식에 그때 광고를 떠올린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사장님은 문화로 온전히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영인으로 꼽히더군요. 20년 이상 패션업계를 경영한 이력, 재즈·클래식 마니아, 말단 직장인 시절 박수근의 스케치 그림을 사들인 컬렉터, 서울 강남에서 6년 이상 실험적인 재즈 공연을 매달 꾸며온 공연기획자, 99년 정년퇴임 뒤에도 대학원에서 5년여간 패션 경영을 강의한 교육자, 인도 요리를 좋아하는 식도락 전문가 등등. 전통 세계에 침잠했던 의 시인 신석초의 조카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죠. 전방위로 문화를 호흡하면서 채워간 삶이란 느낌이 드는군요.

그래서인지 전당 직원들은 신홍순 체제에 대한 기대감이 생각보다 절절했습니다. 검증된 문화 경영자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난해부터 오페라극장 화재와 공연 취소, 대관 비리, 사장 공석 장기화 등 최악의 악재에 만신창이가 된 상황 탓이기도 할 겁니다.

지난달 취임회견에서 3년 이상의 중장기 공연·전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셨지요. 전당의 경직성을 이야기하면서 유연성을 키우는 책임경영의 뜻도 밝혔고, 국가 지원을 받아 수익이 아닌 공익사업을 하는 곳이 전당임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맞는 말씀들이지만 몇몇 의문들이 생기더군요. 전임 사장들도 그토록 외쳤던 공익성과 경영자 출신이 강조하는 공익성은 어떻게 다를까, 지금 전당의 공연·전시 기획은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을까, 전당의 대표적 공연 콘텐츠로 기억되는 건 어떤 것일까 등등이었지요.

주부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킨 오전 11시 음악회가 전당을 대표하는 색깔일까요. 전국 교향악단들이 학예회처럼 모이는 교향악축제를 들어야 할까요. 오페라, 연극 쪽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기획공연을 벌여왔지만, 공연·전시 측면에서 전당의 고유색을 인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한 클래식 평론가는 “강남 부유층을 위한 문화공간이야말로 전당이 지닌 어쩔 수 없는 때깔 아니냐”고 되묻더군요.

거쳐간 국내외 공연단의 지명도와 기업 마케팅으로 이미지가 특징지워지는 ‘럭셔리’ 대관시설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 또한 그렇습니다. 공연의 60~70% 이상을 민간 기획사에 떠넘기는 대관 공연 중심의 관행은 갈수록 심화해왔지만, 국가 지원의 한계와 재정 자립도 강화라는 명분으로 묻어버리는 풍토가 10년 이상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전당의 한 간부는 “기관의 기획력과 공공적 정체성 약화는 경영자의 철학 부재와 직결된다”고 했습니다. 비전문 관료들로 주로 채워진 전임 사장들은 취임 때마다 공익, 문화 향수권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효율성 중심의 수익 대관과 관료주의가 공존하는 조직의 기형성만 강화시켜놓고 나갔습니다.

지난해 12월12일 오페라극장 화재만 해도 인건비를 줄이려고 무대기술팀을 해체해버린 데 따른 후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가수 이소라의 야외공연에 직원이 별도 뒷거래를 요구한 대관 비리도 그 연장선상의 문젭니다. 운영 합리화의 와중에 전당의 색깔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대관업의 전당으로 어느새 퇴락해버린 모습을 많은 문화인들은 목도하고 있습니다.

문화복지를 모토로 하고 나랏돈 지원을 받는 예술의전당 공연장에서는 유명 대관 공연의 경우 서민들의 공연 관람 기회를 사실상 가로막는 협찬 기업들의 좌석 싹쓸이가 종종 진행됩니다. 복합문화예술센터를 표방하면서도, 관객 동원력이 떨어지는 서예 미술 전시장은 공연 분야 예산의 4분의 1 규모로 연명하며 시설 개수, 인력 보강 등에서도 소외되는 콘텐츠 양극화가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곳 또한 전당입니다. 신 사장의 임무는 기획력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겉 다르고 속 다른 전당 예술행정의 양면성, 그 표리부동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문화의 속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식’의 목표를 정하는 기업 논리로만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 문화행정입니다. 관료주의에 젖은 채로 자괴감, 무력감 속에 있는 직원들에게 예술경영의 상상력을 보여주십시오. 사장께서 13년 전 광고를 통해 했던 말을 이런 공약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요. “오직 문화로만 기억되는 전당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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