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무계? 그게 바로 원없이 상상하는 행복이다.”
발파라이소에서 만난 40대 화가 마르티네즈는 벽에 걸린 자기 그림을 보며 껄껄 웃었다. 잉카문명의 요람인 마추픽추 유적이 보이는 집의 창문 안쪽에 버섯처럼 눌어붙은 짐승들을 담은 동판화였다. 다른 그림들에도 사람 머리에서 싹이 돋고, 나뭇가지로 변하고, 가지가 다시 핏줄처럼 갈라지고, 물고기들이 승천하는 황당한 변신이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표정과 몸짓들은 해학적이며, 필선은 흙처럼 부드럽다. 다문화가 공존해온 라틴아메리카의 인간사를 암시하는 그림이라고 했다.
그는 좁고 길쭉한 남미 칠레의 한중간, 태평양에 맞닿은 발파라이소 항구의 언덕에 산다. 화랑 겸 작업실을 차리고서, 울긋불긋한 함석지붕 집 들어찬 언덕길과 태평양의 푸른 물안개를 20년 가까이 지켜보았다. 매일 보는 태양과 바다 풍경에 영화·음악을 보고 들으면서 순간의 느낌대로 쓱싹 그려넣고 다듬어내면 새 그림이 꾸물꾸물 기어나오고 상상력이 충전된다는 이야기. “자연이 삶을 긍정하는 힘을 주었다”고 그는 단언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펼쳐진 공연예술 축제 아밀 페스티벌(1월3~27일)을 취재하던 중 이 작가를 만났다. 세계 곳곳의 연극·춤·퍼포먼스 기획자들이 몰려드는 중남미 굴지의 예술 축제에서 한국의 연극·국악·춤 단체의 공연 활동을 살펴본 일주일의 기억은 공연보다 작열하는 햇살과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먼지의 질감이 더 강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중남미의 초현실 예술은 스페인 지배 시절부터 다문화적 요소가 뒤섞인 데서 비롯한 문화적 유전자다. 특히 바다와 사막, 산맥을 끼고 좁은 국토가 펼쳐진 칠레에서는 초현실적 요소가 지닌 혼합과 긍정의 힘이 자연 일체, 회귀의 갈망으로 나타나곤 한다. 네루다의 연애시들이 대부분 대지와 바다, 태양에 대한 은유로 수놓아졌고, 빅토르 하라의 민중가요들이 투박한 안데스의 대지를 태반 삼았다. 칠레와 인근 안데스의 선사 유물을 전시한 산티아고 프리콜롬비아노박물관의 출토품들 역시 인간이 흙으로 동물로 탁자로 변신하는 이형적 변신, 곧 메타모르포시스의 산물이었다.
아밀 축제에 출품한 칠레의 현대극들은 빈부 차이나 민족 정체성 등에 대한 현실참여적 메시지를 강하게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내면에는 기실 황당무계한 변신, 변형의 설정이 끼어들곤 했다. 지난 1월13일 저녁 산티아고 도심 극장에서 열린 1인극 의 여주인공은 1시간여 동안 유럽, 코스타리카, 아랍 등지로 간 세 사람의 이민자로 변신한다. 칠레가 싫고 적응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다가 결국은 좋은 나무와 과일이 자라는 칠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으면서 맺는다. 모티브는 민족주의라기보다, 조국의 자연에 대한 모태 신앙 같은 향수다. 관중들 중 일부는 콧잔등을 찍어내면서 울었다. 같은 날 밤 공연된 작품 의 무대는 하천 위에 걸린 진짜 다리였다. 거센 급류가 흐르는 다리 밑 풍경이 창가에 비치는 가설극장 무대에서 10대 소녀 3명이 칠레 사회에 던지는 날선 사회 비판의 메시지들이 펼쳐졌다. 다리는 세대 간 의식을 교감하는 마음의 다리로 변신한 셈이다.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에 있는 칠레의 대시인 네루다 생가는 배가 되고픈 욕망이 샘솟는 집이었다. 세상을 항해하며 사랑과 저항의 시어를 길어올린 시인에게 집은 선창이었고, 자신은 선장이었다. 집 거실과 그 앞 네루다의 무덤 자체가 배의 마스트 얼개를 띠며, 집 안도 서양 범선 앞머리 장식물과 해도, 배 그림으로 가득했다. 태양과 물결의 모습만 그려진 시인의 무덤 비문 너머로는 일망무제의 바다가 포말로 부서지고 있을 뿐이다. “물은 닳는 법이 없다, 습관도 시간도 없다”(‘화물선 유령’)고 시인은 말했었다. 프리다 칼로와 연인 디에고 리베라, 자살한 민중가수 비올레타 파라의 그림이 가득 내걸린 산티아고 모네다궁의 미술관에도 변신은 활개친다. 기타에서 생명수가 비어져나오고, 몸에서 싹이 자라는 파라의 자수 그림들은 순정했다. 한국 극단 서울공장의 소리실험극과 들소리의 타악 창작 무대에 현지 청중이 보여준 기대 이상의 열광 또한 분별심 없이 미지의 사물을 받아들이는 순정한 감성에서 비롯됐을 터다.
칠레의 여성 대통령 바첼레는 1월14일 관저 모네다궁에 페스티벌 참석자들을 초청해 오찬을 베풀면서 애틋한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그가 영어로 건넨 인사말은 뭉클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러분의 연극이 있어 우리는 상상하고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을 주신 분들 앞에서 얼마나 영광인지요.”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풍성한 자연·문화적 자산과 본능적 자부심으로 충만한 칠레인들의 일상을 부럽게 지켜본 일주일이 흘렀다. 입국 때처럼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뽀얀 흙먼지와 태양의 빛살 속에서 산티아고와 칠레는 멀어져갔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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