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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에 허리가 휜 문화재

척추 잘린 시청사를 묵인해주기로 한 문화재위원회, 권위와 양심은 어디로 갔나
등록 2008-10-02 15:21 수정 2020-05-03 04:25

변심했는가. ‘문화유산의 보루’라는 문화재위원회 위원들에게 지금 많은 이들이 묻는다. 권력의 자장에 위원회의 권위와 양심이 휘어지고 있어서다.
서울시의 무단 철거로 사경에 놓였던 옛 서울시청사를 척추 잘린 불구자로 남겨두는 것을 위원들은 묵인해주기로 했다. 문화재위 근대분과는 최근 모임에서 옛 서울시청의 안전판인 사적 가지정 해제를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2주 전 칼럼에서 옛 서울시청사의 사적 지정 수순이 어긋나면 300여 등록문화재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이 될 것이라고 썼다. 지금 그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변하고 있다. 항심을 지녀야 할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 쪽과 요구 조건을 주고받는 사실상의 정치적 흥정을 벌였다. 그리고 타협했다.

지난 9월25일 옛 서울 시청사 보존 향방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문화재위 근대문화재분과 회의. 연합 하사헌

지난 9월25일 옛 서울 시청사 보존 향방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문화재위 근대문화재분과 회의. 연합 하사헌

옛 서울시청사는 멀쩡한 척추가 잘려나간 채 살아야 한다. 문화재위의 지도에 따라 태평홀은 이전돼 원형 복구된다고 토를 달았지만, 현 위치에서 철거 해체는 불가피하다. 언제 하느냐의 문제만 남았다. 문화재위원회가 아무리 엄격히 감독해도 홀은 원래 위치에서 헐린 뒤 사라진다. 그 잔해를 짜깁기해 어딘지 모르지만 다시 모아 재축조할 뿐이다. 지난 8월26일 서울시가 태평홀 일부를 무단 철거했을 때 문화재위가 이에 맞서 사적 가지정 조치를 취하면서 밝힌 성명 등을 다시 보면, 지금 해제 결정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한눈에 드러난다.

문화재위는 당시 서울시 쪽의 태평홀 철거 뒤 보존 복원안은 사실상의 재축조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괴 상태의 조속한 복원도 주문했다. 그런 공식 발언을 9월25일 회의에서 스스로 뒤집었다.

문화재위는 태평홀을 제외한 시청사의 다른 부분은 사실상 손대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약속을 전향적이라고 평가한 것이 결정의 근거가 됐다고 밝혔다. 신청사 공사 차질에 따른 재정 부담 등도 명분으로 든 모양이다. 무단 철거 뒤 시와의 격한 대립을 풀고 타협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외형일 뿐이다. 행정 명령이 아닌 권고 형식이지만,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이 한 번도 거부되지 않았던 권위의 힘은 보존 원칙의 일관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화재위원회는 25일 결정에서 스스로 지정한 문화재 보호 조치를 유례없이 거둬들여 조직의 생명과도 같은 일관성을 저버렸다. 지난해 2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회유를 받았다는 의혹에 시달리며 서울시청의 신청사안을 조건부 통과시켜줄 때부터 사실상 단추를 잘못 뀄던 것이지만, 9월25일 결정은 문화재위원회가 권력 앞에 언제든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옛 서울시청사가 망가지기까지 청사의 운명을 둘러싼 논의를 좌지우지한 것은 권력 욕망이었다. 논의의 발단은 지금은 대통령이 된 이명박 전 시장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돌연 옛 청사 뒤에 서울시신청사를 신축하겠다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그리고 후임 오세훈 시장은 2006년부터 2년여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디자인을 바꾸는 공방을 문화재위원회와 벌이면서 옛 청사 뒤의 신청사 신축을 숱한 논란을 무릅쓰고 관철했다. 1930년대에 조선에 들어온 근대 모더니즘 건축의 과도기적 단서라거나 내부의 아르데코 장식 스타일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미학적 논의는 하등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지금도 서울시청사 신축과 보존의 논의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자의 실적에 대한 욕망이다. 시장이 대권 후보 물망에 오른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그 권력장에 근대 문화재는 물론 문화재위원들까지 휘둘리고 있다는 단언이 과연 무리스러운 것일까. 원수처럼 맞섰던 문화재청과 서울시 쪽은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색을 바꾸고 화해 모드로 돌아섰다. 문화재청은 오 시장 얘기를 하기 꺼리는 눈치다.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재과장은 25일 회의 직후 문화재위원들의 결정문에 오세훈 시장에 대한 사과 권고가 들어 있다는것을 일부러 빼고 발표했다. 기자들이 추궁하자 웃으면서 딴청을 피우다가 자리를 떠버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서로 타협하면 통용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문화재 행정이라는 것을 두 기관들은 실증하고 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건축의 서광을 비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전 앞에 지은 6층짜리 멀건 건물을 놓고 오스트리아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치열하고 아름다운 논란을 펼쳤다. 그 시절 빈의 담론들을 21세기에도 이 땅에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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