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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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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미술가들을 아시나요

등록 2012-05-15 21:24 수정 2020-05-03 04:26

지난 몇 년 문학을 한다지만, 문학인들보다 미술인들과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소중한 벗들이 있다. 파견미술팀이라는 10여 명의 작은 모임이다. 처음 만난 곳은 2006년 경기도 평택 대추리였다. 판화가 이윤엽은 아예 마을 빈집에 들어가 살고 있었고, 우린 안타까운 마음에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사람들이었다. 자주 보다 보니 정이 가고 신뢰가 갔다. 그곳에서 여러 미술인들과 함께 평화동산을 만들고, 주민역사관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벽화와 벽시를 그렸다. 전미영은 거대한 동학농민혁명군상을 대추초교 앞에 세워두었다.

대추리·기륭·용산으로 이어진

대추리에서 나온 우리는 2008년 기륭전자에서 다시 모였다. 서울 구로디지털산업단지 후미진 골목 안, 당시 1천 일째 외롭고 삭막한 투쟁을 하던 거리농성장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검고 칙칙한 분위기에 아름다운 색채들이 입혀졌다. 8t 트럭 한 대 분량의 미술품이 실려오기도 했다. 현장미술관이 세워지고, 비정규직 철폐 기원탑이 들어왔다. 파견미술팀은 전국의 작가 50여 명의 힘을 모아 대형 모자이크 걸개그림을 그려주었다. 이 그림은 이후 미국 원정투쟁 등에 함께하며 세계적인 그림이 되었다. 지금도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이 작품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히 여긴다. 2010년 기륭 투쟁은 한마디로 아트였다. 사람들은 김소연 분회장 등이 올라가 점거농성을 하던 대형 포클레인이 하루하루 진화하는 모습을 보며 기가 막혀 했다. 파견미술팀들은 모두가 돌아간 늦은 밤 1~2시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때부터가 작업 시간이었다. 버려진 플래카드 천도, 빗자루도 그들에겐 모두 미술 재료였다. 그들의 재밌는 상상력에 따라 포클레인은 당집 포클레인에서, 캠핑 포클레인으로, 거북선 포클레인으로 날마다 변해갔고, 목숨을 걸고 점거한 포클레인은 어느새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즐거운 포토존이 되어 있었다.

그 힘은 서울 용산으로도 이어졌다. 참사 다음날 파견미술팀은 이윤엽의 판화가 들어간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대형 걸개를 제작해왔다. 전미영과 정윤희와 나규환은 대형 카고 사다리를 타고 맨 처음 참사 건물로 올라간 이들이 되었다. 그들이 내려왔을 때 4층 간판엔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라는 그리운 말 한마디가 또렷이 남았다. 파견미술팀은 그곳에서 1년 가까이를 철거민들과 더불어 지냈다. 1년 동안 그들이 용산 현장에서 진행한 미술행동의 가짓수를 센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힘들이 모여 희망의 버스가 가능했다. 희망의 버스가 있기 전 김진숙의 농성 100일차에 우린 다시 먼 길을 달려 한진중공업을 찾았다. 1박2일 동안 다시 윤엽의 걸개를, 규환과 상덕과 미영의 설치작품을, 유아의 바람개비를, 진경의 그림을 만들고 걸었다. 희망버스 과정 내내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우리 주변엔 늘 아름다운 파견미술팀들의 맑은 눈과 마음의 터치가 함께했다.

아픈 세상 향해 ‘파견’ 보내는

정말이지 이 모든 과정에 단 한 번의 경제적 배려도 고려도 없었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을 스스로 아픈 세상을 향해 ‘파견’ 보낸다. 전미영과 나규환과 상덕은 벌써 몇 달째 매주 한 번씩 제주 강정을 향해 고단한 몸을 떠나보낸다. 이윤엽과 신유아와 나는 다시 서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농성장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전진경과 정윤희는 인천 콜트 공장 안에 다시 허름한 작업실을 꾸렸다. 우리 모두의 벗인 이원우 형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작업을 하고 있다. 온갖 사욕과 추문과 비리와 폭력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런 아름다운 벗들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빅토르 하라의 노래처럼 ‘삶에 감사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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