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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조합’과 민주주의

[노 땡큐!]
등록 2012-03-08 10:10 수정 2020-05-03 04:26

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회를 곧잘 ‘노동조합’에 비교한다. 실제로 학생회는 영국 등에서 ‘스튜던트 유니언’(Student Union)이라고 불린다. 노동조합(Labor Union) 같은, 구성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조합인 것이다. 학생회를 ‘스튜던트 거번먼트’(Student Government)라고도 하는데, ‘학생 정부’라는 뜻이 된다. 학생회란 학생들의 뜻을 민주적으로 모아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학생들의 조합이자 정부인 것이다.

‘학생조합’과 민주주의.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학생조합’과 민주주의.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자치도 참여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학생회는 구성 과정에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때,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자’여야 한다는 규정을 대개의 학교가 가지고 있으며, 교사 추천서를 요구하는 학교도 많다. 심지어 내신성적이 상위 몇% 이내여야 한다는 따위의 기준을 둔 학교도 있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려면 ‘근무 태도가 성실한 자’여야 하고, 기업 이사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고, 근무성적이 상위 몇% 이상이어야 하는 셈이다. 노동조합의 간부를 뽑는 데 이런 식으로 간섭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런 식으로 한다면 ‘어용조합’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초·중·고교 학생회에서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회의 자치 현실은 처참하다. 학생회 회의 안건을 교사가 자르는 사건, 학생회에서 신문을 발간하려고 했는데 제지당한 사건, 학생회 부회장이 강제 자습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했단 이유로 징계받고 부회장에서 잘린 사건, 학칙 개정을 위해 학생회에서 설문조사를 하려는데 교사가 불허한 사건 등 매년 탄압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학생회에 권한이 없으니, 학생들도 학생회를 전혀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학 입시에서 스펙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친목모임이 돼버리는 경우도 있고, 학생회에서 나서서 교장이나 교사들 편을 들며 선도부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이처럼 ‘자치’가 이뤄지지 않으니, ‘참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초·중·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동등한 주체로서 실질적으로 참여할 길은 거의 전무하다.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노동조합은 ‘단체협약’ 등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으며, 단체행동을 통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초·중·고교 학생회의 권리를 요구해온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2000년대엔 학생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요구, 학생회 법제화 운동 등이 이어졌다. 1980년대 중고생들은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투쟁해 학생회 직선제를 이뤘다. 1920년대에도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고등학생들이 자치권, 학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직원회에 학생 대표 참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도 교육계에선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경기·광주·서울 등지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학생들의 자치권과 참여권을 조금이라도 보장하려고 하자, 교육과학기술부는 아예 대놓고 제동을 걸기까지 한다. 독일·핀란드 등 선진국에서는 학생회의 자율성 보장과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가 자연스러운 일인 것에 비교해보면 창피한 노릇이다.

학교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와 직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대해 알고 참여할 권리, 민주주의의 권리는 인권이다. 학교의 민주주의 수준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과 직결되는 듯하다. 이럴 때 루소의 말이 떠오른다.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 그런데 아뿔싸. 청소년·학생들에게는 사실, 투표할 권리조차 제대로 없다.

공현 청소년인권운동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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