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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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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질문과 대답

등록 2008-12-16 13:50 수정 2020-05-03 04:25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0민사부. 온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수석 재판부.
재판장이 법원 내 가장 고참이고(기억나는 것만 해도 이 재판부 재판장에서 곧바로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이 되신 분이 여럿이다) 긴급하고 덩치 큰 가처분 사건을 모조리 다루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이 재판부의 심문이 열리는 법정에는 큰 로펌의 내로라하는 변호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줄지어 기다리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짙은 색 천장에 동굴 같은 법정 모양도 위압적이어서, 패소가 뻔한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을 당한 노조 쪽 변호사는 이 법정에서의 변론이 깊은 골짜기에 대고 듣는 사람 없이 소리치는 것 같다는 엉뚱한 환상에 빠지곤 했다. 아니 적어도 지난 12월2일 이전에는 그랬다.

1천 일 전에 소송을 했다면

소박한 질문과 대답.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소박한 질문과 대답.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날 이 재판부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했다. KTX 여승무원들이 3년 전 우리에게 던진 소박한 질문, “철도공사가 뽑고, 그 기차를 타고, 공사 직원의 부하인 우리는 과연 누구의 직원인가”에 대한 단순 명백한, 그럼에도 너무나도 오래 걸린 응답이었다. 물론 지난해 승무원들의 형사 사건과 올 4월 가처분 이의 사건에서 확인되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다른 법률 쟁점을 다루면서 나온 것이었다면(직접 다루지 않아도 될 쟁점을 굳이 들춰내, “승무원들의 사용자는 철도공사”라고 확인해준 두 사건 판사님들께도 큰 박수를!), 이번에는 승무원들이 그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판단을 한 것이고, 그 결정이 ‘끕’ 있는 민사수석부에서 나왔으며, 상대방도 유명 법률사무소에 거금을 주고 변론을 맡겨 총력을 다한 결과인데다, 즉시 집행력을 갖는 가처분이어서 곧바로 임금 지급 의무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승무원 쪽에서 먼저 취한 법 절차로는 처음이라고 했더니(물론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고, 노동부도 두 차례나 불법파견 조사를 했기 때문에 법적 절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왜 그동안 안 했느냐”며 궁금해했다.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크게는 진행 중인 교섭에서 “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흔한 핑계에 빌미를 안 주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 법원을 그다지 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지못미, 사법부). 그리고 이 싸움이 그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다. 정부가 적어도 공공 부문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고, 민주화 운동 경력이 화려한 인사가 사장이었으니, 이 정도 소박한 질문에 대한 당연한 답변은 쉽게 이루어 질 것 같았다. 하지만 교섭은 어려웠고 삭발·단식에 고공철탑 시위까지 안 해본 것 없는 3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 소박한 질문은 터덜터덜 법원을 향하게 되었다.

법원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진즉 그리로 갈걸 그랬다는 말도 한다. 그렇지만 처음 이 문제가 불거져나온 시점에서 바로 법원으로 갔더라도 같은 답변을 받을 수 있었을까. 철도유통이라는 자회사에서 관광레저라는 다른 자회사로 옮기라고 했을 때, 그들이 이 소박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다 생각조차 못했던 것처럼, 그들의 지난 1천 일이 없었다면 아마 법원도 계약 뒤에 숨겨진 진짜 사용자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박한 질문으로 시작해 지지 않고 버틴 목소리가 울림을 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결국 법원까지 스며들어 깨운 것이라 믿는다.

원고쯤 몇 번 고쳐쓴대도

이제 그 ‘누구’만 더 깨우면 될 텐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단다. 본안 판결이 나오면 다시 항소하고 상고해서, 그렇게 다시 1천 일을 가자고?(원고를 마감하고 있는데, 철도 노사가 복직 문제를 포함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복직 교섭이 성사된다면, 원고쯤은 몇 번을 고쳐써야 한다고 해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텐데).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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