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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메르켈 | 김신명숙

등록 2005-10-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신명숙/ 작가


누구나 깨닫게 되는 일이지만 세상사가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이쪽에 있나 싶으면 저쪽에서도 보이고 토끼처럼 보이던 것이 관점에 따라 늑대 형상으로 바뀌기도 한다. 누가 요지경 아니랄까봐 세상은 꽤나 복잡하게 얽혀서 돌아간다. 문제는 이 혼란스런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죠? 찍으세요. 글쎄, 누굴?

골 때리는 보수당, 남자의 여자

지난 9월 공연히 남의 나라 일로 심란했다. 슈뢰더냐, 메르켈이냐?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여자가 유력한 총리 후보로 나섰고, 이 나라에서 재채기를 하면 저 나라에서 몸살 조심을 해야 하는 지구촌 시대라 전혀 ‘딴 나라 얘기’로 여겨지지 않았다.

메르켈이 돼야지. 총리 자리가 남자 전용인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일단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그가 속한 정당이 골치를 썩였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인종 문제에서도 너그럽지 못하며 여성 문제에서도 ‘골 때리는’ 보수당, 기민련(CDU)의 당수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찍어야 하나? 게다가 전력을 봐. ‘남자의 여자’잖아? 콜 총리의 눈에 들어 동독 출신인데도 ‘콜의 소녀’로 불리면서 승승장구한 여자, 당수가 된 뒤론 여성 문제에 대한 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배신을 때린’ 여자….

어째 세상사는 꼭 이 모양이다. 짝이 잘 안 맞는다. 대처도 보수당 당수였고 라이스도 부시 휘하에 있다.

역시 생물학적 구분은 믿을 게 못 돼. 실질적인 정책을 봐야지. 독일 여자들도 지금까지 기민련보다 진보정당인 사민당(SPD)에 표를 더 많이 던졌잖아? 슈뢰더가 낫지, 뭐.

그러나, 역시 찜찜했다. 슈뢰더는 마초에 가까운 인물이고, 이념과 정책을 우선하고 합류했다가 치를 떨며 돌아선 여자들이 한둘인가? 사민당도 남성 정당이긴 마찬가지. 게다가 생물학적 차이가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게 아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 다르게 길러지고 차별적으로 나뉘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총체적으로 살핀다면 블레어보다 반여성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어도 대처가 여남관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생물학의 승리다.

성이냐, 정책이냐. 골이 아팠다. 메르켈이 어떤 여자인지 더 자세히 살펴봤는데 독일 여성주의 저널 <엠마> 최근호에서 지난 1993년 그가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서 기고했던 글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우리 여성들은 제도화를 통해 앞으로 더 전진해야 하며 공적인 권력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우리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성별 역할 구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상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웃과 교류하는 남자, 오후에 학교에서 아이들 행사에 함께하는 남자, 설거지하고 화장실 청소하는 남자의 모습을…. 내가 이해하기에 동등권이란 여성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데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 것이며 모든 의무를 똑같이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쓴 글을 알고 있다

흠잡을 것 하나 없는 페미니스트 메르켈의 목소리였다. <엠마>가 케케묵은 옛글을 아까운 지면에 다시 실은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우리는 당신이 12년 전에 쓴 글을 알고 있다”는 협박성 호소 혹은 기대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엠마>의 발행인이자 독일 여성운동의 대모인 슈바르처는 메르켈에게 자신을 속이지 말고 ‘동독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꼭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메르켈은 선거 막판에 ‘여성 총리가 나와야 양성평등이 완성된다’며 ‘여성’ 정치인의 면모를 확실히 드러내 다시 나를 유혹했다. 그럼 역시 메르켈?

그러나 그가 속한 정당은 여전히 께름칙했다. 갈수록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독일식 사회복지 모델이라도 꿋꿋이 버텨줘야 불안한 보통 사람들, 실업자·여성·노인·장애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선거 결과를 보니 여성표에 대한 기민련과 사민당의 득표율이 35%로 똑같았다. 지난 선거에 비해 기민련은 1%, 사민당은 6%를 잃었다. 이 수치에 여성 유권자들의 고민이 담겨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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