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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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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고시원

등록 2008-10-29 10:18 수정 2020-05-03 04:25

고시원에는 꿈들이 산다.
중국에서 온 동포들. 돈 많이 벌어 고향 마을에 두고 온 아이들을 찾아가는 꿈. 붉은 수수밭이 펼쳐져 있고 옥수수밭 끝 간 데 없는 그곳. 러시아에서 온 동포들. 돈 많이 벌어 고향 마을에 두고 온 나타샤를 찾아가는 꿈. 자작나무 흰 숲이 펼쳐져 있고 보드카 한 잔에 발랄라이카 소리 흥겨운 그곳. 그러나 목을 조여오는 연기에 고통스럽게 깨어나야 하는 꿈. 날카로운 금속 물체가 몸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그만 접어야 하는 그 꿈들.
이 땅의 또 어떤 쪽방에서 한 달을 몇만원으로 버텨야 하는 노인들. 세상을 뜨기 전 헤어진 자식들과 해후해 기름진 저녁 한 끼 맛있게 먹는 꿈. 이 땅의 또 어떤 농가에서 똥값이 돼버린 농작물값에 소주를 들이켜는 농민들. 오뉴월 소나기 같던 땀방울만큼만 손에 쥐어 자식들 호주머니에 넣어주고픈 꿈. 이 땅의 어느 곳, 방도 아닌 길거리에서 농성의 밤을 보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저 남들과 똑같이 일한 만큼만 돈을 받고 싶은 꿈. 이 땅의 어느 지방 도시 공장 기숙사에서 지친 몸을 누이는 이주노동자들. 돈 많이 벌어 에메랄드빛 바다 드넓은, 가난한 고향 마을에 찾아가 장가드는 꿈. 이 땅의 수많은 아파트와 전세방에서 주가 하락 뉴스에 맘 졸이는 사람들. 들라기에 든 펀드인데, 염라대왕한테서 “탐욕스런 놈”이라고 꾸중 듣는 악몽.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철거 소식에, 직불금 사기 칼날에, 천일 싸움에도 귀 막은 세상 표정에, 인정사정 없는 불법체류자 단속에, 무능한 정부 대책에… 불현듯 깨어나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들.
그래서 이 땅은 온통 고시원이다.
여러 차례 고시원에 불이 나 사람들이 죽어갔건만, 바뀌는 건 없다. 고시원은 여전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쉼터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불안한 주거 형태요,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이나 어스름 새벽에야 스며들어 거덜난 몸을 누이는 곳이다. 어느 누가 히키코모리처럼 사람들과 단절돼 한 평짜리 공간을 한숨으로 채우고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사방을 도배해도, 심지어 방 주인조차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그곳.
똑같이 닮았다. 서민들은 가뜩이나 힘겨운 삶에 금융위기까지 겹쳐 진짜 고시원 신세로 전락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데, 정부는 그동안 잔뜩 배 불린 건설사나 도와주고 부유층 세금은 더 깎겠다고 야단이고 쌀 직불금 가로챈 땅투기꾼들 조사는 달팽이 걸음이다. 어디에서도 아쉬운 사람들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은 그런 곳에서 벌어진다. 고시원 주변의 사람들, 고시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그곳을 관할하는 공무원들이 세심해져야 한다. 실낱같은 꿈이라고 그 꿈을 살해당하거나 스스로 놓아버리는 이들이 있다면 가련하지 않은가.
고시원 살인 사건에, 직불금 사태에, 증시 패닉에 마음 스산한 이 밤, 우리 모두의 운명에 대한 운영권을 쥔 분의 이름을 따서 인사하자면, “여러분 ‘MB 고시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도 거대한 고시원의 밤은 깊어가고, 집에 들어가 잠들기가 무섭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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