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 한 친구가 있었다. 실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연은 없다. 그는 복도 쪽 어두컴컴한 자리에 줄곧 앉아 있었고 학교를 자주 안 나왔다. 어쩌다 나왔을 때는 흡연 등의 이유로 학생부실에 자주 가 있었다. 흡연하다 걸린 학생들에게 담배를 잔뜩 입에 물려놓고 서 있게 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2학년 때인가 그는 학교를 그만뒀고 이후로는 아예 소식도 모른다.
세계 최초일 수밖에 없었던 주홍글씨
그는 이른바 ‘문제아’였다. 어느 선생님께서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탕아’를 바라보는 목자의 마음인지 교사로서의 직업적 의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선생님은 ‘문제아’ 친구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지나친 면이 있었다.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신념이 그 친구에게 강렬하게 투사됐다. 거의 회개와 개종 수준의 뉘우침을 요구하는 시간은 씁쓸했다. 그 친구가 학교 밖으로 나가버린 것은 제도교육의 악습뿐만 아니라 ‘너무’ 선한 선생님의 일방적인 인도주의도 작용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이천수 선수가 그런 상황에 직면한 적 있다. 2009년 3월 초순의 이야기다. 새 시즌이 개막하는 전남과 FC 서울 경기에서 이천수는 오프사이드 깃발을 든 심판을 향해 무례한 동작과 욕설을 내뱉었다. 이로 인해 6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60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남 광양 홈구장에서 페어플레이기 기수로 나서는 ‘사회봉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곽영철 상벌위원장은 “선수가 페어플레이기 기수로 나서는 것은 세계 최초”라면서 “이를 통해 새 사람이 되고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천수는 그 ‘사회봉사’를 이행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씁쓸한 장면이다. 이천수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페어플레이기를 들고 경기장에 섰다. 경기 직전의 짤막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이천수의 표정은 침통해졌다. 징벌성 사회봉사를 마친 이천수는 관중석으로 올라가 자기 팀의 홈경기를 쓸쓸히 지켜봤다. 대검찰청 강력부에서 마약이나 조폭 범죄를 다뤄온 곽영철 상벌위원장의 조처는, 그 자신의 말대로 ‘세계 최초’의 일이다. 그는 짐짓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도 왜 그런 징계 방법이 세계 최초인지는 전혀 성찰하지 못한, 매우 저열한 수준의 징계였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낮은 조처였다. 한 줌의 자존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냉혈한 징계를 내리며 마치 ‘개과천선’의 은전을 베푼 듯한, 그리하여 정녕 우리가 인간이기는 한 것인가 하는 통탄할 만한 모욕감을 안긴 천박하고도 저열한 징계였다.
그것은 흡연한 학생더러 담배를 잔뜩 입에 물고 화장실 앞에 서 있게 하는 수준이었으며, 훈련 자세가 형편없다고 속옷 차림으로 광주 시내를 뛰게 한 수준이었다. 당시 박항서 감독은 “연맹의 징계로 인해 이천수가 정말 성숙되고 올바른 길로 간다면 좋게 받아들여야겠지만, 단순히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라면 정말 잘못된 선택이다”라고 침통한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3년여가 흐른 지금 다시 그런 파문이 재연되는 듯하다. 지난 10월21일, 이천수가 다시 광양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남과 인천유나이티드 경기에 앞서 이천수는 경기장 입구에서 팬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고 관중석에 올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일각에서는 ‘언론 플레이’라고 비난한다.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비난도 있다. 여러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이천수는 구단에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팬들에게 사과 인사를 하고 관중석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대화의 상대방이자 ‘진심 어린’ 사과를 기다리는 구단은 빼놓은 채 언론에 그럴듯한 그림 하나를 제공한 언론 플레이라는 것이다.
물론 구단 처지에서는 할 말이 많다. 2009년 이천수는 자신을 질책하는 박항서 감독(현 상무 감독)과 하석주 수석코치(현 전남 감독) 등에게 욕설을 퍼붓고 몸싸움까지 한 끝에 팀을 무단이탈했다. 구단은 그를 임의탈퇴 선수로 처리했다. 이후 이천수는 중동·일본·중국 등지로 전전하며 K리그 복귀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성사되려면 반드시 전남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전남이 지금처럼 이천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계속 묶어두면 31살의 공격수 이천수는 머지않아 스스로 축구화를 벗게 될 것이다. 이는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이다. 이천수는 하루라도 빨리 K리그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어 한다. 전남 역시 자신들의 조처로 인해 이천수가 자연도태돼 은퇴하는 상황을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된다면 전남은 ‘탕자’를 고사시켜버린 구단이 될 것이다. 이는 모기업 포스코 그룹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은유적 의사표시 이제 필요 없어
이젠 해결해야 한다. 이천수는 구단과 대화해야 한다. 어떤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의사표시도 이제는 효과가 없다. K리그에서 은퇴한다는 자세로 구단과 만나야 한다. 아울러 구단도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는 너무 추상적이다. ‘광양에 내려와 묵묵히 봉사 활동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비현실적이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또 다른 주홍글씨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2009년의 페어플레이기 사회봉사 명령 때 소속 선수들과 지역 팬들은 ‘축구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징계’라며 분노했다. 지금 이천수에게 다시 그런 굴욕의 해법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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