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애용하던 배달 마트 앱에서 식료품을 주문했다. 30여 분 뒤 배달기사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돈’인 배달기사들은 보통 문을 두드리거나 벨을 누르고 고객이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주문한 물건을 문 앞에 둔 뒤 황급히 다음 배달 장소로 이동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그 배달기사는 내가 물건을 받은 뒤에도 떠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셰셰”(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문을 닫으려는 찰나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절 기억 못하겠어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다시 불안한 마음에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고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 리씨예요. ××동네에 살 때 삼륜차 몰던…. 20여 년 전 춘절에 나랑 아내와 같이 콩나물시루짝 같은 귀성열차를 타고 우리 고향집에도 같이 갔었잖아요. 기억이 좀 나요?”
세상에나! 내가 어찌 ‘그 시절’ 리씨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눈앞에 서 있는 그 배달기사 얼굴에서 예전의 리씨를 떠올리긴 힘들었다. 나보다 두 살 적은 그는 이미 나이보다 훨씬 더 ‘팍삭’ 늙은 얼굴이 되어 도무지 알아볼 재주가 없었다. 다음 배달 시간에 쫓기던 리씨는 나에게 연락처를 알려주면서 밤 9시 이후에 문자로 다시 연락하자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 많이 안 늙어서 금방 알아봤어요. 나는 중늙은이처럼 변해서 못 알아보겠죠? 그래도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요….”
리씨는 2002년 무렵 내가 살던 동네에서 자주 이용하던 삼륜차 기사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개혁개방 정책이 심화하고 시장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 농민들이 도시로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8년 국유기업 개혁 등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수많은 노동자도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등 일자리가 많은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리씨도 그 시절 농민공 물결에 휩쓸려 베이징으로 흘러들어온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네이멍구 츠펑에서도 서너 시간을 더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산간 오지에 살던 리씨와 그의 아내는 1990년대 말 고향을 등지고 베이징으로 와서 건설현장 인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민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리어카를 개조한 삼륜차가 대체 교통수단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벌이도 제법 쏠쏠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고된 건설현장 인부 일을 그만두고 삼륜차를 사서 ‘운송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공유 자전거도 없었고, 지하철도 노선이 몇 개 안 되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거리를 갈 때는 삼륜차가 제일 편했다. 리씨의 주요 ‘영업장소’는 당시 내가 살던 동네 주변이었고 나는 그의 단골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다 2004년 춘절 때, 나는 그를 따라 인간 짐짝 같은 귀성열차를 타고 그의 고향집을 찾아가 설을 같이 보냈다. 고향집에는 당시 네 살배기 어린 아들이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내가 그때까지 경험했던 가장 힘들고 험한 여정이었다.
리씨의 삼륜차 사업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어느 날 그는 ‘샤리’라고 불리던 빨간색 자동차를 몰고 나타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중국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면서 거리에는 ‘샤리’와 ‘산타나’ 같은 비교적 저렴한 서민형 자동차가 삼륜차와 자전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도시에는 신종 직업인 ‘헤이처’(黑车·택시 등과 같은 합법적인 운송수단이 아닌 비합법적인 사적 자동차 운송영업)가 유행했다. 그 사이 얼마간의 자본을 축적한 리씨도 샤리 자동차를 사서 삼륜차 대신 헤이처 자동차 영업을 시작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의 헤이처 단골 손님이 됐다. 삼륜차와 달리 헤이처 영업은 더 멀리, 더 안전하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줬다. 특히 공항을 자주 오가는 외국인들을 단골로 확보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주변의 한국 지인을 많이 소개해줬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는 제법 배도 나오고 몸이 불어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말로 ‘파푸’(发福·돈을 벌었다는 뜻)한 모습이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인근 아파트 단지로 파견해주는 경비인력업체를 운영한다고 했다. 올림픽을 전후해 베이징 등 대도시에는 부동산 붐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아파트 공화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파트와 오피스 등 부동산 경기 붐은 자연스럽게 경비 인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장삿속 빠른’ 리씨는 다시 재빠르게 헤이처 기사 대신 경비인력업체 ‘라오반’(사장)으로 변신했다. 1998년 국유기업 개혁 등으로 전국 각지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자, 당시 중국 언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시대의 발전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 리씨는 중국 정부가 요구하는 ‘시대의 발전 흐름’에 가장 완벽하게 적응하고 순응한 사람이 됐다. 2010년께 잠시 다른 동네로 이사하게 되면서 나는 더는 리씨와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사이 나도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사는 게 복잡다단해지면서 리씨와의 인연은 차츰 먼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다.
15년여 만에 리씨를 아주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만난 날 밤, 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언제 시간 되면 밥 한 끼 먹자”고 했다. 한참 뒤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사는 게 바빠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는 힘들 것 같다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풀어놨다. 당시 어린 아들은 이제 다 커서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청년이 됐고, 고향에서 직업고등학교를 마친 뒤 베이징에 올라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은 정규 일자리가 아닌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전전하는 중이란다. 베이징에서 줄곧 가사와 육아 도우미 일을 하던 아내는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자주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아내 치료비로 많은 돈을 썼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찾아오면서 모든 기반이 무너졌다.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작은 구멍가게를 마련했지만 팬데믹 기간 동안 투자금을 다 잃고 2024년 초 결국 문을 닫았다고 한다. 원래 계획은 베이징에 있는 가게가 안정되면 자신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목 좋은 곳에 조그만 국수 가게를 운영하며 노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모든 꿈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고 했다.
그는 전화를 끊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가 끝나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더 힘들어졌어요. 올해는 아주 최악이었죠. 내년에 좋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어요. 우리는 다시 1990년대 말 베이징에 처음 도착했던 시절로 돌아갔어요. 그때는 젊었고 기회도 많았지만 지금 우리는 늙고 병들어서 더는 기회도 없을 것 같아요. 아들 미래가 더 문제지요. 진짜 올해는 너무 힘들었어요.” 리씨와 그의 아들은 지금 둘 다 호구지책으로 배달기사를 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부단히 ‘시대의 발전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중국 관련 세계적인 논픽션 작가인 피터 헤슬러는 2019년 10여 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인인 그는 1996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처음 중국에 왔다. 당시 그는 쓰촨성 푸링이라는 도시의 한 사범대학에서 영어 작문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대부분 1974년이나 1975년에 태어난, 마오쩌둥 사후 개혁개방 시대에 청춘기를 맞이한 행운아들이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책 ‘젊은 인민의 초상’에서 당시 학생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역사적인 운이었다. (…) 이들이 겨우 서너 살이던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내놓았다. 푸링의 학생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성장했고, 내가 개혁개방 세대라고 여기게 된 세대의 일부였다.”
2001년 중국은 역사적인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성공했다. 그 후 약 20년 동안 중국은 세계 최대의 외국인 투자 유입국이 됐고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약 10%에 달하는 초고속, 압축적인 경제 발전기를 누렸다. 헤슬러가 당시 푸링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은 그런 중국 경제 발전기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들은 나중에 대다수가 이른바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산층이 됐다. 농민공 출신 리씨도 한동안 그 ‘역사적인 운’을 공유했던 행운아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인 2019년, 피터 헤슬러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2021년까지 쓰촨대학에서 그때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학생들 대부분은 1996년 자신이 가르쳤던, ‘역사적인 운’을 타고난 70후 세대의 자녀뻘이다. 이들은 200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였고 이른바 ‘시진핑 시대’의 아이들이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시대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권력을 강화했고 2018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을 폐지했다. 이 대학생들은 시진핑이 평생 국가주석을 할지도 모르는 체제에서 성인이 된 첫 번째 세대였다.”(‘젊은 인민의 초상’ 중에서) 피터 헤슬러는 공교롭게도 ‘개혁개방 시대에서 시진핑 시대까지 중국의 두 세대가 건너온 강’을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을 통해 목격하고 관찰한 셈이다.
그가 2019년에 다시 돌아와 관찰한 중국은 1996년의 중국과 판이한 모습이었다. 강의실과 거리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중국 도시 전역에는 디지털 감시 장치가 촘촘하게 인민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1990년대 말 그가 목격했던 중국은 사회 곳곳에 활력과 희망이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2019년 다시 돌아온 중국은 그에게 다소 낯선 세계로 변해 있었다. 권위주의 통치와 감시체제, 네이쥐안(內卷·무의미한 과잉 경쟁) 이라 불리는 무한경쟁 속에서 ‘시진핑 시대의 아이들’은 부모 세대 격인 개혁개방 세대에 비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운신의 폭이 대폭 축소되거나 제한된 ‘커밍업 쇼트’(불확실한 시대에 온전한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였다. 중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말로는 ‘란웨이와’(烂尾娃·경제 하락과 실업 증가 등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청년들)다. 헤슬러는 다소 비관적으로 이들의 미래를 상상했다.
“1990년대의 젊은이가 맞닥뜨린 도전은 막막하기는 했어도 명확하고 달성 가능한 면이 있었다. 교육받고, 도시로 이주해서, 빈곤을 탈출하면 된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문제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시스템의 뭔가 근본적인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믿음을 갖고 있지만 이들의 미래는 더 복잡할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30여 년 만에 재회하는 친구가 베이징에 잠시 왔다. 친구를 데리고 자금성과 천안문(톈안먼) 등 베이징의 주요 관광지를 구경했다. 자금성을 구경하던 중, 우리 뒤쪽에서 오던 젊은 여성 서너 명의 대화를 들었다. “올해 주변 친구 중에 학교 졸업하고 구직에 성공한 사람 있니?” “글쎄, 난 아직 소식을 들은 게 없어. 인턴만 전전한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 “어휴. 진짜 죽겠어. 언제 취직이 될까? 이렇게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도 너무 짜증 나. 요즘 내 소원이 뭔 줄 알아? 출근하는 거라고!” 베이징에 처음 온 친구는 아주 놀랍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도 경제 상황이 심각한데 중국은 더 장난 아닌 것 같아. 연말인데도 어째 이렇게 썰렁해? 문 닫은 상점은 왜 이렇게 많고. 진짜 중국 경제 심각한 거야?”
자금성과 천안문으로 이어지는 베이징 최대 번화가 창안제 주변은 초저녁인데도 불 꺼진 건물이 즐비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온 거리 가득 불빛이 휘황하고 연말연시를 맞아 각종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2025년은 더 암울할 것이라는 전망도 쏟아져 나온다. 45년 만에 다시 군인들이 들이닥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과 다시 암울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 나는 요즘 자주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한 해’를 보내면서 울고 싶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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