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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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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누가 ‘중화민족의 정신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가?

한국에는 반공투사가, 중국에는 ‘나팔바지가 펄럭이던 시절’이 부활하네
등록 2023-09-15 22:04 수정 2023-09-21 13:50
왕가위(웡카와이,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정궉윙, 장궈룽)이 거울 앞에서 맘보 춤을 추는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왕가위(웡카와이,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정궉윙, 장궈룽)이 거울 앞에서 맘보 춤을 추는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다음은 중국 고등학교 ‘사상정치’ 과목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유형이다. 재미 삼아 한번 풀어보시라. (주의: 사지선다형에 익숙하고 ‘(답) 찍기’에 도가 튼 ‘구세대’라고 해서 절대 자만하면 안 된다. 정답이 상당히 ‘헷갈리는’ 문제들이다.)

1) 1978년 장발의 나팔바지를 입은 한 청년이 물에 빠진 아이를 용감하게 구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중의 눈에 불량청년으로 비치던 청년이 어떻게 미담의 영웅이 됐을까? 이 현상이 설명하는 당시의 상황은.

A. 경제발전으로 도덕적 개념이 혼란스러워졌다.

B. ‘좌’경향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심각하게 남아 있었다.

C. 사회적으로 복장 낙인화 현상(복장 형태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두드러졌다.

D. 사상해방이 복장의 다양화를 촉진했다.

2) 20세기 1980년대 초에는 두꺼비 눈알처럼 생긴 선글라스를 끼고 나팔바지를 입는 것이 최첨단 유행패션이었다. 또 ‘브레이크댄스’가 인기를 끌면서 박쥐 스타일 셔츠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이톱운동화, 헤어밴드가 유행했다. 이외에 거리에서 어깨에 뽕(패드)을 넣은 옷, 초미니스커트 차림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청바지도 차츰 유행했다. 홍콩에서 전해진 헐렁한 통바지도 유행했다. 당시 이런 현상이 본질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A. 민주정치가 진일보하게 발전했다.

B.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C. 대륙과 홍콩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다.

D. 생활 관념에 변화가 생겼다.

현재 중국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도 이 문제들을 풀어보라고 했다. 아들은 한참 생각하는 ‘척’하다가 “답이 안 보인다”며 짜증을 내더니 애꿎은 내 얼굴을 한번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왜 이렇게 이상해? 장발하고 나팔바지를 입은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도 못 구해? 맨날 게임만 한다고 미래가 암울한 불량청소년 취급하는 거랑 똑같네! 엄마나 실컷 풀어!”

중국 공안이 거리에서 류망죄 단속에 나서고 있다. 바이두 갈무리

중국 공안이 거리에서 류망죄 단속에 나서고 있다. 바이두 갈무리

불량배들의 전성시대

1978년 12월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기 3중전회)가 열렸다. 그리고 곧이어 ‘역사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선언됐다. 덩샤오핑은 “어떤 민족이나 국가든 모두 다른 민족과 국가의 장점 및 선진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신중국 건국 이래 끊임없이 ‘반동 계급’과 ‘오염된 정신사상’ 등과의 투쟁에 내몰리며 ‘사회주의적 신인류’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중국인에게는 그야말로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언론은 개혁·개방 정책이 곧 구시대 사상에서의 해방이라 떠들어댔다. 그러자 사람들은 가장 먼저 ‘구시대의 패션과 사랑법’부터 벗어던졌다. 공개 연애의 자유조차 누려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곧바로 공원과 거리에서 대놓고 연애하기 시작했고, 똑같이 입어야 했던 회색과 푸른색, 녹색의 펑퍼짐한 군복 차림 ‘인민 유니폼’도 하나둘 벗어던졌다. 사람들은 곧바로 ‘육체와 정신의 해방’ 시대가 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자유로운 세상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대신 ‘류망’(流氓)이라는 불량배(건달, 양아치 등)들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길거리에서 여성을 희롱하거나 행인에게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리는 등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유형의 불량하고 건달스러운 사람이 다 류망에 해당한다. 한 가지 더 보태면 ‘기이하고 괴상한’ 복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도 류망이라 불렀다. 1970년대 이후 류망 하면 보통 앞의 시험문제에도 예시됐듯이, 장발이나 폭탄 맞은 펑크스타일로 엉덩이와 허벅지가 딱 달라붙은 나팔바지를 입은 남녀를 지칭했다. 사실 칙칙한 구시대 복장에서 해방되고 싶은 심리는 문화대혁명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70년대 초중반부터 이미 도시를 중심으로 청년층에서 조짐이 나타났다.

1970년대 후반 나팔바지가 유행하기 전에 좀더 일찍 유행에 눈뜬 ‘불량청년’들은 소관고(小管褲)라는 밑위길이가 짧고 달라붙는, 스키니진보다 조금 더 헐렁한 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타나 ‘계급의 독초’를 제거하기에 바빴던 구세대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특히 베이징 등 보수적인 북쪽 지방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하이나 청두, 광저우 등 남쪽 지방에서 더 유행했다. 상하이와 광저우에서는 이런 ‘반동적’ 복장을 한 불량청년들을 ‘류망 아페이’(流氓阿飞)라고 불렀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연기했던 ‘아비’(중국어 발음 아페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런 유형의 건달 또는 불량배를 지칭하는 사회적 대명사로 통했다. ‘아페이’는 상하이와 광동 지방에서 불량배 또는 건달을 지칭했다.

‘나팔바지의 미담’이 교과서에 나오는 이유

1970년대 초중반 류망 아페이들이 거리에 나타나자 도시와 마을마다 공안국과 시장관리위원회, 주민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순찰조가 완장을 차고 순시하며 복장 단속에 나섰다. 그들은 손에 가위를 들고 류망 아페이가 눈에 띄면 즉시 달려가서 바지를 옆으로 쫙쫙 찢어버렸다. 당시를 회고하는 일반인들에 따르면, 상하이 시내 거리에서 소관고를 입은 젊은 여성이 가위를 든 순찰조에 적발돼 현장에서 바지가 ‘김밥 옆구리 터지듯’ 찢기면서 새하얀 허벅지가 그대로 노출돼 더 구경거리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구경거리’는 전국에서 매일 벌어졌다.

비슷하게 1978년 개혁·개방을 전후해 나팔바지를 입고 두꺼비 눈알처럼 생긴 선글라스를 낀 새로운 불량청년이 등장하자 당황한 보수 구세대는 이들을 ‘류망죄’로 엮어 감옥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교화시설에 집어넣었다. 류망죄는 1979년 반포된 중국 형법 제160조에 새롭게 규정된 범죄행위로, 사회공중도덕을 해치고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집단 패싸움을 일삼는 등 사회공중질서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나팔바지와 펑크머리 등 기이하고 불량스러운 복장과 머리모양도 해석에 따라 사회공중도덕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됐고, 이런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행여나 절도 등 작은 범법행위를 하다가 적발되면 사형까지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83년부터는 사회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이때 시행된 ‘사회치안을 심각하게 해치는 범죄활동 엄벌에 관한 결정’에서 규정한 가장 심각한 범죄행위 중 하나가 바로 류망죄다. 중국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류망죄로 복역하다가 2020년 석방된 뉴바오창이라는 남성도, 1983년 당시 18살 나이에 친구들과 장난 삼아 지나가는 행인의 모자를 빼앗고 싸움을 벌였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복역 중 감형되긴 했지만 그는 사형집형유예 선고를 받았다. 1983년 시안에서 동료 집에서 함께 ‘춤을 추다’ 적발된 노동자들 중 주범으로 찍힌 세 명이 류망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소설가 왕스웨는 당시의 기억을 담은 ‘1983년 나팔바지가 펄렁이던 시절’(喇叭裤飘荡在1983)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제 1978년 장발의 나팔바지를 입은 ‘류망 청년’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한 ‘미담 사례’가 왜 당시에는 그토록 화제가 되고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는지 얼추 짐작될 것이다.

2022년 8월 10일 중국 쑤저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서머터임 렌더링’ 주인공을 코스프레한 여성의 모습. 미국 CNN 방송은 이 여성이 공안에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바이두 갈무리

2022년 8월 10일 중국 쑤저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서머터임 렌더링’ 주인공을 코스프레한 여성의 모습. 미국 CNN 방송은 이 여성이 공안에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바이두 갈무리

‘중화민족의 정신과 감정’은 무엇

2022년 8월10일, 중국 쑤저우의 한 번화가에서 한 여성이 기모노를 입고 일본 만화를 코스프레하던 중 현지 경찰에게 연행됐다. 온라인 동영상에는 경찰이 여성에게 다가와 “중국인인데 기모노를 입었잖아!”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경찰은 항의하는 여성을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연행해 5시간 이상 조사하고 경위서를 작성하게 한 뒤 기모노를 압수하고서야 풀어줬다. 이 영상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인터넷과 언론에서는 공공장소에서 기모노를 입는 행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분출됐다. 이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은 행위는 국민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요지의 논리를 폈다. 여성을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대다수 사람은 “어떤 옷을 입든 그게 왜 범죄행위냐! 그렇다면 양복을 입는 것도 국민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 아니냐?”라며 반박했다.

2023년 8월30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2006년 제정돼 2012년에 한 번 개정된 치안관리처벌법(수정초안) 제1차 심의를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이 수정안은 9월30일까지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최종 반포될 것이라고 한다. 개정안이 발표되자 법조계는 물론 중국 내 여론이 끓어올랐다. 개정안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조항은 제34조 2항과 3항이다. 제34조는 ‘영웅열사 보호’에 관한 법률인데 그중 2항과 3항이 갑자기 ‘급조’됐다. 2항은 ‘공공장소에서 중화민족의 정신을 훼손하고 감정을 해치는 의식과 표식을 착용하거나 강요하는 행위’, 3항은 ‘중화민족의 정신을 훼손하고 감정을 해치는 물품이나 글을 제작, 전파, 유포하는 행위’이다. 사안에 따라 10일 이상 15일 이하의 구류와 최대 5천위안(약 90만원) 이하의 벌금을 매길 수 있다고 규정했다.

여론이 들끓는 이유는 대체 ‘중화민족의 정신과 감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을 누가 어떻게 무슨 근거로 해석할지가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한 누리꾼은 “누가 내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생기는 것과도 같은 황당무계한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20년 뒤 교과서에는 어떤 문제가 출제될까

‘나팔바지가 펄럭이던 시절’, 온 거리에서 ‘류망 아페이’들이 완장을 찬 ‘도덕경찰’에게 쫓기던 ‘구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한국에서 ‘반공투사’들이 부활하듯이 말이다. 20여 년 뒤, 미래의 중국 고등학교 ‘사상도덕’ 과목에는 어떤 문제가 출제될까? 글의 서두 문제의 정답은 1번 C, 2번 D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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