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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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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숙에게까지 손 내민 노련한 공산당원의 좌절

12월당 이동휘, 새로운 쿠시넨 비호 아래 이뤄지는 ‘신당 창당’을 경쟁자와 힘을 합쳐 저지하려 하는데…
등록 2023-03-24 22:30 수정 2023-04-25 08:25
이동휘. 임경석 제공

이동휘. 임경석 제공

이동휘는 발언 차례가 돌아오자 작심하고 입을 뗐다. 1928년 9월20일 국제당 조선위원회가 주최한 조선 문제 청문회 자리였다. 그의 폭탄 발언으로 회의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긴장감이 돌았다.

그는 위원회의 업무 처리 방식을 규탄했다. 너무 무능력했다. 회의 일시 통보가 터무니없이 늦었다. 자신에게 회의 일시가 통지된 것은 그날 오전 10시30분이었다. 회의가 열리기 불과 두세 시간 전이었다. 부랴부랴 서둘렀지만 제시간에 회의장에 도착하는 것마저 힘들었다. 분통을 터뜨릴 일은 또 있었다. 불공정하기까지 했다. 다른 참석자들에게는 하루 전 미리 통지가 도달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조선위원회 실무 행정이 불공정하고 편파적이었다.

회의 멈춰 세운 이동휘에게 ‘본질’ 요구한 쿠시넨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조선공산당 양측’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참석해야 했다. 당시 두 개의 조선공산당이 병존했다. 제3차 당대회가 서울 하늘 아래 두 군데서 서로 경쟁적으로 열린 탓이었다. 1927년 12월20일에 열린 대회와 두 달 뒤인 1928년 2월27일 열린 대회가 그것이다. 전자에서 성립한 공산당을 ‘12월당’이라 하고, 후자를 ‘2월당’이라고 불렀다. 이동휘는 정치비서부의 결정에도 그렇게 명시돼 있음을 환기했다. 조선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양측과 협의하고, 그 정보에 의거해서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동휘는 자당(자신의 당) 대표단 외에 반대파 대표 강진이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진이 2월당 쪽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 밖의 조선인 참석자들이 있었다. 이동휘는 구체적으로 실명을 거론했다. 조훈과 김강이었다. 이 자리는 각 당의 대표자가 참석하는 자리이므로, 개인이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동휘는 개인 자격 참석자 두 사람의 퇴장을 요구했다. 국제당 내에 독자적인 네트워크가 있는 조훈은 신당창당론을 추진하는 김단야와 동일한 입장이었고, 김강은 당내 반대파인 2월당의 간부였다.

이동휘의 문제 제기로 회의 진행은 벽에 부딪혔다. 참석자 적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회의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마침내 위원장 오토 빌레 쿠시넨이 나섰다.

“이동휘 동무에게 요청합니다. 형식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발언해주십시오.”1

쿠시넨은 거절의 뜻을 명백히 했다. 그가 보기에는 참석자 자격을 따지는 것은 형식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본질적인 것이 중요했다. 무엇이 본질적인가. 쿠시넨에 따르면, 조선위원회가 조선 문제에 관한 정보를 다방면으로 충분히 접하는 것이었다. 그는 권한 문제도 꺼냈다. 이 자리에 누구를 초청할지, 누구의 의견을 청취할지에 관한 결정권은 위원회가 갖는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초청한 것은 위원회이며, 위원회는 그럴 권한이 있다고 못박았다.

이동휘는 조선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두 공산당 가운데 ‘12월당’의 대표자였다. 그의 임무는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국제당 제6차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오토 빌레 쿠시넨. 임경석 제공

오토 빌레 쿠시넨. 임경석 제공

국제당 일방주의 저지한 탁월한 성과

대표로 선출된 이는 이동휘(55)와 김규열(35), 두 사람이었다. 그에 더해 박진순(31)이 소련 모스크바 현지에서 통역 자격으로 합류했다. 강팀이었다. 김규열은 조선 내지의 당내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아는 사람이고, 박진순은 이론 수준과 러시아어 구사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재였다. 나이를 놓고 보면 이동휘가 이례적임을 알 수 있다. 동료들과 나이가 20년 이상 차이 나는 연장자였다.

이동휘가 선출된 까닭이 있었다. 국제당 외교 활동에 임해 탁월한 성과를 거둬왔기 때문이다. 1921~1922년 국제당 조선담당관 보이틴스키 그룹이 편파적으로 고려공산당(이시당)을 지원할 때, 그를 저지한 게 이동휘였다. 1923~1924년 보이틴스키 그룹이 일방적으로 연해주 국민의회파를 지지할 때도 그에 맞서 독자적인 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노령 당준비회)를 추진한 것도 이동휘였다. 1924~1926년 보이틴스키 그룹이 조선 내지의 공산당(화요파)과 합작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했을 때는 부득이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이도 이동휘였다.

이와 같이 보이틴스키 그룹의 전횡에 맞서 국제당 일방주의를 저지해온 이동휘였다. 그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근거는 보이틴스키 그룹에 속하지 않는 국제당 내 우호적인 간부들과 합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핀란드공산당의 쿠시넨, 일본공산당의 가타야마 센 등이 그들이다. 국제당 집행부의 요직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그룹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제 새 국면이 열렸다. 1927년 국제당 지노비예프 당의장의 실각과 연동해 조선담당관 내부의 지노비예프 그룹이 몰락했다. 그로 인해 국제당 조선담당관은 재편됐다. 이동휘가 조선공산당(12월당)의 대표자로서 모스크바에 도래한 1928년 현재 쿠시넨(47)이 핵심 지위에 서게 됐다.

쿠시넨은 1928년 9월 국제당의 최고위 집행기관인 정치비서부 11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됐다. 국제당의 최상급 지도자 반열에 드는 직위였다. 그와 동시에 동방비서부 부장으로 선임됐고, 산하기구인 극동부·중동부·근동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치비서부의 위촉으로 조선 문제를 해결할 조선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선임됐다. 요컨대 1928년의 쿠시넨은 국제당 조선담당관들의 핵심 지위를 점했다. 조선 문제는 쿠시넨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표현해도 어울릴 정도였다. 쿠시넨 그룹이라고나 할까, 그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이동휘를 지원하곤 했던 쿠시넨이다. 그러나 1928년의 쿠시넨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 문제에 관해서는 그랬다.

이동휘 등 12월당 대표단은 전방위적인 외교활동에 나섰다. 그를 위해 조선 문제에 관한 방대한 문서 자료를 만들어냈다. 국제당 안팎의 유력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발굴된 자료만으로도 4개월 동안 20건, 133쪽의 문서를 생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방대한 자료로 ‘12월당 우월론’ 설득

문서를 보낸 곳은 다채로웠다. 국제당 집행부, 국제당 정치비서부, 국제당 조선위원회, 쿠시넨, 일본공산당의 국제당 파견 대표단, 국제공청, 농민조합인터내셔널 등이 수신처로 적혀 있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선혁명의 주·객관 정세를 잘 정리한 보고서가 위주였다. 이 문서들은 다채롭지만 근본적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바로 12월당이 반대파 2월당에 비해 조직적 세력이나 정치적 올바름 측면에서, 그리고 대중적 기반에서도 훨씬 우세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즉, 12월당 우월론이었다.

1928년 11월14일 조선위원회 초안이 내부적으로 공표됐다. 이동휘는 크게 낙담했다. ‘당내 결정’ 초안에서 12월당 우월론이 배제됐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어느 공산당도 대표권을 인정받지 못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위기였다. 기존 조선공산당이 해체될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 셈이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조선위원회 ‘당내 결정’ 초안의 진행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획기적 방안이 필요했다. 이동휘는 반대파 대표단과 담판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동휘는 2월당 대표 양명과 한빈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당내 결정’ 초안의 대응책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회견은 성사됐다. 그들도 상황이 엄중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했음이 틀림없다. 만남은 두 차례 계속됐다. 이동휘는 비상한 수단을 제시했다.

“(1) 과거 논쟁 문제를 잊는다. (2) 양측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통합 중앙위원회를 결성한다. (3) 조선공산당의 과제에 관한 국제당 집행부 결정과 결의 초안을 공동으로 입안하고, 국제당 조선위원회에 그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한다.”2

과거 논쟁을 다시 거론하지 말자고 전제했다. 상대방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동휘 제안의 핵심은 통합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데 있었다. 12월당과 2월당 양측 간부들로 이뤄진 통합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현존하는 양당의 연합중앙 설립론이었다.

제3항은 양당 대표단의 통합 제안이었다. 모스크바에 와 있는 두 대표단이 합체해 조선공산당의 단일 대표단을 구성하고, 그 단일 대표단이 조선 문제 초안을 독자적으로 작성하자는 말이었다. 물꼬를 돌려놓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조선위원회 초안을 무효화하고, 그 대신 독자 초안을 작성하자는 제안이었다.

12월당과 2월당의 통합 협상 경위를 보여주는 문서. 말미에 12월당 대표 이동휘와 김규열의 친필 서명이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12월당과 2월당의 통합 협상 경위를 보여주는 문서. 말미에 12월당 대표 이동휘와 김규열의 친필 서명이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자격 박탈을 뻔히 보고도 협상을 거절한 2월당

이동휘는 100% 승리를 꾀하는 외교 목표를 접었다. 그 대신 절반의 승리를 목표로 삼았다. 국제당 조선담당관들의 비호 아래 김단야가 추진하는 신당창당론을 후퇴시키는 것이 더 긴급했다. 위기를 모면하려면 그동안 경쟁해오던 2월당과 손잡는 일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월당 대표자들은 더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뜻을 밝혔다. 왜 거절하는가. 자당 중앙부로부터 그런 협상을 수행할 전권을 부여받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형식논리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교 현안에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현존하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지부 자격 박탈을 뻔히 눈 뜨고 바라보는 길을 선택했다.

이동휘는 국제당의 현실 정치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보여줬다. 정국의 변동을 제때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숙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12월당의 대표자로서 국제당 안팎에서 전방위적 외교활동을 펼쳤다. 위기에 처해서는 그것을 타개하는 묘책을 찾아냈다. 극복 방안을 찾아낼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고자 서슴없이 돌진했다. 이동휘의 사회주의 외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곤 했다. 국제당 내부의 여러 그룹 가운데 다소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을 때다. 그러나 어쩌랴. 고립무원 상태에서는 천하의 이동휘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존하는 조선공산당이 비운에 빠져드는 것을 이동휘는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 문헌

1. Заседание Комис. по Корейск.Вопр. 20/Ⅸ-28г.(조선문제위원회 1928년 9월20일자 회의), с.9, РГАСПИ ф.495 оп.45 д.25 л.2-44.

2. Ли-Донхи и Ким-Гюер(이동휘·김규열), Заявление в Коркомиссию ИККИ(국제당집행부 조선위원회 앞 의견서),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2 л.169, 1928년 11월19일.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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