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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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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자가 보기에 결혼한 여성은 멍청한가요?”

‘베이징대 출신 3인방’의 우에노 지즈코 대담, 예상 못한 ‘여성주의’ 관심 불러일으켜
등록 2023-03-17 16:50 수정 2023-03-24 00:10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 시즌3, 우에노 지즈코가 왔다’ 영상. 누리꾼이 “부끄럽다”고 한 질문 수준의 인터뷰 덕에 우에노 지즈코는 검색 순위 상위에 올랐다.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 시즌3, 우에노 지즈코가 왔다’ 영상. 누리꾼이 “부끄럽다”고 한 질문 수준의 인터뷰 덕에 우에노 지즈코는 검색 순위 상위에 올랐다.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당신은 결혼하지 않았는데, 혹시 그 이유가 남자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원가족에게서 받은 (불행했던) 영향 때문인가요?”

2018년 이후 여성주의 활동 사실상 금지

레드와인 색깔로 물들인 짧은 머리를 한 75살의 ‘할머니’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잠시 당황한 숨을 고르기 위해 차 한 잔을 마신 우에노가 다시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저 결혼에 흥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죠. 결혼에 흥미를 못 느낀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의 결혼생활이 아주 불행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결혼일지라도 여성이 인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 (불평등한) 결혼제도에 빠져 들어가면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안에서 고통받게 됩니다. (…) 물론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경험 역시 인생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저는 비혼이 자신을 더욱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기에 자발적인 비혼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여전히 남자를 좋아한답니다.(웃음)”

“그렇다면 여성주의 내부에서 비혼 여성주의 지위가 더 높은 건가요? 결혼한 여성들은 멍청하다고 생각하나요? 선생님은 혹시 연애에 몰빵해본 적이 있나요?” 이 대목에서 우에노는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당신들이 연애 경험은 더 빠삭할 거 아닙니까. 근데 늙은 나보고 10대 소녀 같은 연애경험담을 말하라고요?”

2023년 2월18일, 중국 젊은 세대에게 인기 있는 동영상 플랫폼 ‘빌리빌리’(bilibili)에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 시즌3, 우에노 지즈코가 왔다!’라는 제목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동영상이 떴다. 이 동영상은 역대 최다 조회수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내 온·오프라인 언론과 여러 소셜미디어에서도 연일 화제가 됐다.

이 동영상이 나간 뒤 중국 내 검색 포털 사이트에서 ‘우에노 지즈코’가 검색 순위 상위를 차지했고, 서점가에서도 그의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순식간에 중국 온·오프라인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결혼과 비혼, 양육 등 여성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가진 주제가 ‘핫하게’ 다뤄졌다. 시진핑 체제 이후 중국에서는 여성주의에 관련한 민감한 논쟁이 금기시됐고, 전세계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진 2018년 이후에는 온·오프라인에서 공개적인 여성주의 활동이 사실상 금지됐다. 그런 중국에서 2023년 초부터 뜬금없이 우에노가 미디어와 대중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주의 학자로서는 드물게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받고 있다.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비혼주의 증가 등의 문제를 먼저 겪은 일본의 경험을 근거로 대부분의 국가가 당면하는 동일한 문제를 날카로운 여성주의 시각과 대중적인 언어로 쉽게 분석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굳이 여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우에노의 책은 발간되는 족족 번역 출판되고, 중국은 2020년 이후 출판계와 서점가에 열풍이라 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중국 내 웬만한 서점에는 우에노의 책이 눈에 띄기 쉬운 위치에 놓여 있다.

‘빌리빌리’ 동영상이 화제가 된 뒤 책은 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보는 내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빌리빌리’ 동영상이 화제가 된 이유는 우에노의 명성 외에 그와 대담을 진행했던 취안시시라는 유명 동영상 블로거의 ‘질문 수준’ 때문이다. 취안시시는 중국에서 유망한 문화콘텐츠 제작 벤처회사의 부사장이자 본인도 많은 팔로어를 가진 인기 동영상 제작 블로거이다. 중국 최고 명문대인 베이징대학 출신인데다 홍콩중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른바 ‘초엘리트’ 여성이라는 이력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그는 자신의 모교 베이징대학에서 같은 기숙사를 썼던 두 친구와 함께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 시리즈를 제작해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다른 동영상에서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등장시켜 자신의 결혼생활에 얽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우에노와의 대담은 ‘빌리빌리’가 우에노와 작가 스즈키 스즈미와의 대담집인 <한계에서 시작하다>(한국어판 제목은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를 중국어판으로 펴낸 출판사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다. 사실상 책 홍보 활동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여기에 최고 학부 출신 엘리트 여성들로 구성된 동영상 블로거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팀이 대담 진행자로 나오자, 우에노의 애독자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동영상이 공개되자마자 난리가 났다. 주요 진행자인 취안시시는 인터넷에서 거의 마녀사냥을 당하다시피 했고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중화권 주요 언론에서도 비판 기사가 잇따랐다. 요지는 세계적인 여성학자 우에노를 어렵게 불러놓고 한다는 질문 내용이 경악스러울 만큼 경박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은 중국에서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과 홍콩 등에 유학까지 다녀온 여성들이었기에 우에노와의 대담은 중국 여성들의 ‘수준’을 보여줄 기회였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는 ‘수치와 부끄러움’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한 누리꾼은 “보는 내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내 얼굴이 다 빨개졌다. 이 동영상을 본 뒤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일본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또 다른 이는 “그동안 내가 명문대학 출신에게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과 환상이 다 깨지는 계기가 됐다. 그들의 수준은 이류, 삼류 대학조차 나오지 못한 일반 사람들보다 더 천박했다”며 대담 내용에 통렬한 비판을 했다.

대담 동영상은 애초에 제목도 ‘만일 75살 할머니가 진심을 말한다면: 연애와 출산은 결국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였다. 우에노 지즈코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고 ‘75살 할머니’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대담 질문과 내용도 우에노가 책에서 주장하던 여성주의적 시각과 하등 관련 없는 신변잡기였다. 비난이 폭주하자 ‘75살 할머니’ 대신 ‘우에노 지즈코’ 이름이 명시된 제목으로 수정됐다. 그리고 갈수록 더 논란이 되자 급기야 동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 시즌3, 우에노 지즈코가 왔다’ 영상.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베이징대 룸메이트 3인방의 수다 시즌3, 우에노 지즈코가 왔다’ 영상.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1997년 이래 처음 여성 없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이 동영상이 세간의 호된 비판을 받은 이유는, 주요 대담 진행자가 보여준 여성주의에 대한 저급한 인식과 수준 때문이다. 대담이 시작되자마자 그가 던진 첫 질문부터 충격적이었다. ‘왜 결혼을 안 했냐’는 우에노의 책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우에노는 그동안 펴낸 많은 책에서 자신은 20대 이후부터 자발적인 비혼주의자였고 그 이유도 명확히 설명해놓았다.

취안시시는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우에노의 시각은커녕 여성주의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부족하다는 점을 내내 드러냈다. 심지어 자신은 남편과 결혼할 때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딩크족’이 되려고 했지만 실제 결혼생활을 해보니 아이가 없으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뿐더러 남편이 바람피울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출산과 양육을 결심했다는 식으로 말해 논란을 증폭했다.

이들이 더 비판받은 점은 ‘중국의 여성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22년 전 중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쇠사슬녀 사건’(한 여성이 농촌에 인신매매돼 여덟 아이를 낳고 축사의 쇠줄에 매여 감금돼 살아간 사건)과 출산율 저하 등 중국 내 수많은 여성 문제에 관해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 시종일관 자신들의 결혼 문제나 고부갈등 같은 시답잖은 질문만 늘어놓았다. 대다수 누리꾼과 미디어는 이들이 우에노를 철저히 상업적 소비 가치로만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이 동영상 덕분에 우에노는 중국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그를 몰랐던 사람들도 일부러 검색해 책을 찾아서 볼 정도로 인지도가 급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서점가에 다시 한번 우에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 출판사가 애초 의도했던 홍보와 판촉활동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 우에노의 책은 1990 년대 초 중국에 처음 소개돼 꾸준히 번역 출판됐지만, 2020 년 이후부터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중국 영화와 드라마 , 도서 등에 대한 평점을 매기는 플랫폼 사이트 더우반의 관련 분석에 따르면 , 지금까지 중국에 소개된 우에노의 책은 총 22 권으로 , 그중 15 권이 2020 년 이후에 출판됐다 . 2023년 들어 벌써 세 권의 책이 나왔을 정도다 . 2 월 18 일 동영상이 화제가 된 뒤 더우반에서 매주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1 위 목록에 한 달 가까이 우에노의 책 <한계에서 시작하다> 가 차지하고 있다 . 출판가에선 우에노의 책 판권을 사는 데 혈안이 됐고 그 덕분에 판권 가격도 폭등해 웬만한 중소 출판사는 엄두조차 못 낼 상황이라고 한다 .

‘우에노 열풍’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지금 중국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다소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체제 이후 중국 여성들의 불평등 지수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2022년 10월 열린 제20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중앙정치국 위원 24명에, 1997년 이후 처음으로 단 한 명의 여성도 없었다. 또한 최고 권력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여성도 없었다.

중국어로 출간된 우에노 지즈코의 책들.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중국어로 출간된 우에노 지즈코의 책들. https://www.hk01.com/ 와이탄 제공 사진 재인용

‘여성주의’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걸까

2022년 세계경제포럼이 발간한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젠더 격차 지수는 전체 146개 나라 중 하위권인 102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한국은 99위, 일본은 116위였다. 공교롭게도 이들 대표적인 동아시아 3개국은 보수적인 유교문화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고 이로 인해 여성의 지위와 평등 정도가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에노는 자신의 여러 책에서 보수적인 가족관을 가진 국가일수록 비혼화 경향과 고령화, 저출산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지적했다. 그런 나라에서 ‘여성 때리기’를 하는 인터넷 우익 남성도 많다고 했다. ‘보수적’ 요인을 두루 갖춘 중국에서 다소 ‘래디컬한’(급진적인) 여성주의자로 유명한 우에노 열풍이 분다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에노에 따르면 “여성주의란 약자가 약자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부는 우에노 열풍이 그런 여성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바람인지, 아니면 체 게바라가 소비의 아이콘이 됐듯이 그 역시 대중문화계 소비 상품으로만 이용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여성주의가 억압받는 국가에서 여성주의 학자가 인기를 끈다는 건 어쨌거나 재미있는 현상이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베이징에 거주하는 박현숙씨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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