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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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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질긴 악연

이번엔 벗어날 수 있을까?
등록 2022-03-07 23:40 수정 2022-03-08 20:58

“자연으로부터 축복받은 땅, 역사로부터 저주받은 땅.” 우크라이나를 한마디로 일컫는 표현이다. ‘유럽의 곡창’으로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 천연가스·석탄·철광·망간·티타늄 등 풍부하고 다양한 광물자원은 천혜의 축복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접경국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나라이자,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요충지다.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 평원지대는 자연국경을 형성하는 높은 산맥이 없다. 강자가 탐내고 지배자가 바뀌는 역사가 숙명처럼 이어진 이유다.

축복받은 자연, 저주받은 역사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또다시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두 나라의 악연은 모질고 질기다. 짧게는 꼭 100년 전인 1922년 러시아가 주도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에 편입되면서, 길게는 1795년 러시아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합스부르크왕가)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 영토의 동부와 서부를 각각 분할 점령하면서부터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문헌 기록은 기원전 8세기까지 올라간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흑해 북쪽 연안의 땅을 ‘키메리아인의 땅’으로 지칭했다.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몰려와 한때 소아시아 지역을 석권했다. 기원전 7세기 들어서는 해양세력인 그리스인들이 흑해 연안과 크림반도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했다.

기원전 5세기에는 흑해 북안 도시들이 보스포루스왕국을 세우고 그리스 본토에서 독립해 번성하다가 기원전 63년 로마(당시는 공화정)에 복속됐다. 로마제국은 4세기 중반 이후 게르만족 대이동과 훈족의 남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395년) 이후 몇백 년 동안, 이 지역은 동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882년 이 지역에 ‘키이우 루시 공국’(키예프 루스 공국)이 세워지면서다.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뿌리 격이다. “흔히 ‘공국’(公國)은 ‘왕국’이 되기엔 부족한 소국을 연상하지만, 키예프 루스 공국은 중세 유럽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대국이었다.”(구로카와 유지,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키이우 루시의 명멸을 다룬 12세기 역사서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키이우 루시를 세운 이들은 바이킹으로 유명한 북게르만족 바랑기아인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그들은 자신을 ‘루시’라고 칭했다. 9세기에 그 수장 류리크가 오늘날 러시아 땅에 ‘노브고로드 루스 공국’을 세웠다. 류리크의 친족 가신들이 동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비잔티움(옛 콘스탄티노플, 현재 이스탄불)으로 진출하던 중 흑해 북쪽에서 발견한 도시국가가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Kyiv)다. 류리크가 숨지자 친족인 올레크가 권력을 장악했다. 올레크는 동로마제국을 공격해 유리한 조약을 맺고 광활한 왕국을 건설한 뒤, 882년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이우로 옮겼다. 키이우 루시 공국이 탄생했다. ‘키예프’(Kiev)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제국에 합병된 이후 통용된 러시아식 표기와 발음이다. 키이우는 키이우 루시의 또 다른 건국 설화에 나오는 사 형제 중 장남인 ‘키이’(Kyi)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기록도 있다.

9세기 건국된 ‘키이우 루시’가 두 나라의 뿌리

14세기 슬라브족의 건국 설화는 또 다른 판본의 이야기를 전한다. 폴란드·체코·러시아는 혈연적으로 한 뿌리라는 것이다. 삼 형제인 레흐, 체흐, 루스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각기 다른 사냥감을 쫓았는데, 레흐는 붉은 석양이 지는 평원에 흰 독수리가 나는 것을 보고 길조로 여겨 그곳에 정착했다. 여기서 폴란드의 2색 국기(빨강·하양)와 문장(빨강 바탕에 흰 독수리)이 유래했다. 체흐는 레흐보다 남쪽으로 가서 터를 잡았으며. 막내 루스는 북동쪽으로 더 멀리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폴란드, 체코 그리고 동슬라브 국가인 키이우 루시까지 세 왕조의 시원을 설명하는 전설로 쓰인다.

키이우 루시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소멸했으며, 해당 영토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16세기)과 코사크족(17세기)이 지배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공국이 ‘루스’ 국가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각각 동부와 서부를 분할 점령했다.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 자신들이 키이우 루시의 적통이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라는 명칭이 정식 국명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이 무너진 직후 이 지역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하면서다. 우크라이나공화국은 불과 5년 뒤인 1922년 러시아가 주도한 소비에트연방(소련)에 편입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 곡물 생산지이자 주요 산업단지였으며, 다량의 핵무기가 배치됐다.

20세기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참혹하다. 1932~1933년 스탈린이 사유지를 몰수하는 강제집단화를 추진하면서 가혹한 곡물 수탈을 저지르고 가축까지 징발했다. 때마침 기근까지 겹치면서 수확량이 급감했다. 사람들은 초근목피도 모자라 쥐를 잡아먹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스탈린의 악의적인 ‘기아 학살’(홀로도모르)로 최소 3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7~1938년에는 스탈린이 권력 집중을 위한 대숙청을 단행하면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원과 지식인, 농민 등 십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벌어지자 우크라이나는 독-소 전쟁의 한복판에 휘말렸다. 많은 우크라이나 젊은이가 소련 군인으로 징병됐다. 극우민족주의자 일부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기대하며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는 어느 쪽의 보호도 받지 못했고, 전사자와 민간인 학살을 포함해 거의 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예일대의 티머시 스나이더 교수(동유럽사)는 이런 우크라이나를 ‘블랙 어스’(비옥한 흑토이자 거대한 무덤의 땅)이자 ‘피에 젖은 땅’이라고 표현하고,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2권의 단행본은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왔다.

소련 시절 학살·전쟁으로 1천만 명 사망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야 다시 독립했고, 어떤 군사동맹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며 ‘중립국’을 선언했다. 1994년 러시아와 미국 등 6개국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서명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영토와 주권을 보장받기로 했다. 1997년에는 러시아와 우호친선협정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약속을 지키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해 서유럽의 문을 기웃거렸고, 러시아는 그런 우크라이나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친러 지도자를 몰아낸 오렌지혁명(2004년)과 존엄혁명(2014년 ‘유로마이단’ 유혈시위)이 잇따르자, 러시아는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더욱 노골화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했고,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 세력의 분리독립 내전을 지원했다. 2019년 우크라이나 국민은 헌법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명시한 개헌을 통과시킨 데 이어, 대선에선 친서방 노선을 분명히 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러시아의 ‘현대판 차르’라고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고, 끝내 일방적인 무력 침공을 감행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이어진 기사 - 미국 중심 흔들려는 푸틴의 도박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16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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