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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공짜 짜장면과 천원짜리 밥

등록 2021-03-06 11:26 수정 2021-03-09 00:3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어릴 적 이사할 때면, 주인집에서 벽지와 장판 정도는 깨끗이 바꿔줬다. 정겹기도 촌스럽기도 한 벽지의 풀 냄새를 맡으면 이사를 실감하게 된다. 장마 기간에는 그 깨끗한 벽지에 곰팡이가 핀다. 가난을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듯, 단칸방 새 벽지에는 언제나 곰팡내가 밴다.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릴 적 내가 자주 보던 벽지를 표지로 만든 책이 나왔다. 서울역 근처 쪽방촌 주민의 가난한 삶을 담은 책 <동자동 사람들>(빨간소금 펴냄)이다. 가난을 드러내는 것인지 감춘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지에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다. ‘냥스타그램’이 유행하는 요즘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어두운 골목길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이는 동네 길고양이들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도둑고양이’로 불린 동물은 가난한 마을의 익숙한 배경이었다.

자신이 사는 집에 감사하다는 고등학생

책 <동자동 사람들>은 쪽방촌 주민들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들려준다. 그리고 민관을 통한 주민 지원이 어떻게 실패하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위태로운 질문을 던진다. ‘타인의 고통과 가난을 쓰는 일은 괴로웠다. 타자의 고통을 지적 유희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 질문은 책 속에서 계속된다.

가난한 주민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자선단체의 줄 세우기는 주민들을 통제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 사진 찍기는 구원자를 사진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주민을 사진 속 배경으로 전락시킨다. 주민은 도움을 주고 싶을 만큼 불쌍하고 가난해야 하지만, 국가지원이나 자선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벗어나는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박탈되거나 구호물품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일부 주민은 공짜 짜장면을 권유하는 자원봉사자의 선량한 제안을 거부하고 굳이 자신들이 만든 식당에서 1천원을 내고 밥을 사먹는다. 이 1천원을 자존심과 피해의식이라 읽는 사람들은, 우리의 복지와 구호활동이 왜 실패해왔는지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타자화와 전시는 교육적 효과도 발휘한다. <동자동 사람들>에는 쪽방촌 봉사활동을 마친 고등학생이 자신이 사는 집에 감사함을 느꼈다는 증언이 나온다. 냄새가 역겹고 벌레가 많이 나오는 동네는 봉사시간이 지나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이자, 삶의 의지를 다지는 징벌 공간이 된다.

몇 년 전, 부산을 여행하다 범일동의 이중섭 문화거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중섭 문화거리 입구에 있는 ‘희망길 100계단’은 내가 어릴 적 골목에서 놀다가 엄마가 부르면 뛰어갔던 계단이다. 계단을 지나면, 가파른 언덕 사이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다.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서로의 가난이 흠이 되지 않는 동네였다. 내가 태어난, 이 가난한 동네는 이중섭을 만나 관광지가 됐다. 나는 이 마을의 구성원일까, 추억을 찾아온 관광객일까.

내 옆 사람이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그동안 나는 <동자동 사람들>의 작가 정택진이 던진 질문을 회피해왔다. 나 자신이 당사자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획득하면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삶을 말과 글로 묘사해왔다. 그동안 타인의 삶을 함부로 이야기한 건 아닌지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내 옆의 사람이 글 속 주인공이 아니라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조력하는 조연. 내가 생각하는 타인과 가난을 쓰는 이,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이른바 활동가들이 가져야 할 책임이다. 서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국가와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책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은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돌봄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동등한 주권자로 대하는 데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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