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6개월 넘도록 덮여 있던 어둠의 장막이 걷히는 듯하다. 코로나19를 뜨겁게 앓고 슬슬 털어나가기 시작한 이탈리아 밀라노, 그 상징인 두오모성당에서 코로나19에 스러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레퀴엠을 올리는 날이다.
베르디 레퀴엠은 스칼라극장 음악가들에겐 가장 자신 있는 레퍼토리다. 이 작품은 우리가 우주 최강이라고 자부하며 거의 매년 연주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임하는 자세가 이전과 다르다. 다들 본인이 앓았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잃는 등 힘든 시간을 버티고 돌아와서 하는 첫 공연이기 때문이다.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도착했다. 이 공연은 전국에 생중계된다.
안 그래도 성당에서 하는 연주는 울림 때문에 극장 공연보다 더욱 집중이 필요한데, 새로운 방역 프로토콜에 따르다보니 모든 연주자의 간격이 멀리 떨어지고, 심지어 합창은 두 그룹으로 나눠 견우와 직녀만큼 뚝 떨어뜨려 놓았다. 교회 기둥에 가려져 지휘자는 보이지 않고 미묘하게 0.2초쯤 지연되는 모니터로 지휘자 사인을 보아야 한다. 공연 중 모니터가 꺼지는 등 기술적으로 난관이 많았지만, 우리를 비롯해 생중계를 시청한 많은 이의 마음에 위로를 안길 수 있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공연예술계, 음악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극장 문은 닫혔고 어렵게 오디션으로 따낸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으며 많은 유학생이 예정에 없던 귀국 짐을 싸게 됐다. 이런 중 스칼라극장 재개장은 의미가 있다.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니 저녁 공연이 일주일 내내 연속으로 잡혀 있어도 오히려 기쁠 지경이었다.
이제 2주에 한 번씩 하는 코로나19 검사도 익숙해져 더는 겁나지 않고, 구내식당 이용 금지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 또한 일상이 되어간다. 다만 이 익숙함에 모두 조금씩 해이해지는 건 느낌 탓일까.
‘한 명 이상 이용 금지’라고 써 붙인 엘리베이터엔 “우리 사이에 왜 이래” 하며 꾸역꾸역 서너 명씩 올라타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이탈리아 엘리베이터는 대체로 한국보다 훨씬 작다.) 커피 없이 못 사는 이탈리아인들은 극장 내 바가 문을 닫은 관계로 자판기 앞에서 삼삼오오 마스크를 내리고 커피 향과 함께 담소를 나눈다.
전설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와 함께하는 말러 교향곡 3번을 준비하며 무대 위에 자리를 잡는다.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입으로 악기를 불어야 하는 사람과 노래하는 사람은 중간에 벗어야 한다. 간격 유지 정책으로 오케스트라도 합창도 모두 무대 위에 함께 자리한다.
내 앞 가까이 하필이면 호른 팀이 열댓 명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에 관악기를 상당히 많이 편성한다.) 중간중간 관악 연주자들은 악기를 재빨리 분해해 안에 고인 침과 물을 수시로 털어내고 닦는다. 내 앞 가까이 있는 저분은 유독 화가 많아 보인다. 악기를 너무 세게 턴다. 내 쪽으로 거의 세례를 내려주는 듯하다.
라면 맛이 왜 이렇게 멀지?새로 들어갈 오페라 총연습을 하는 도중 갑자기 극장에 의사들이 들어왔다. 이번 전체 검사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왔다며 당장 연주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2주간 전 단원 격리 조치가 취해졌다. 많은 동료가 양성 판정을 받아 걱정하면서도 나는 음성 결과를 받고 내심 안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스크를 벗어야만 했던 가수들과 합창, 목관악기·금관악기에서 대규모 확진자가 떴다. 심지어 올해 초 이미 양성 판정 났던 동료는 또 걸렸단다. 뉴스에서 수시로 때리는 우리 극장 소식에 많은 사람이 안부를 묻기에 “걱정하지 말라” 하고 2주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나날을 보낸다.
격리 4일 차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 화학적인 무언가가 썩고, 그것을 태운 냄새 같다. 외계인 시체를 태우면 이런 냄새일까 싶다. 계속되는 기괴한 냄새에 불안해져 이리저리 검색해보지만 한국 기사에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 이탈리아어로 찾아보니 코로나19로 후각을 잃은 사람 중 드문 증상과 비슷하단다. 그래도 “난 검사에서 음성 나왔는데 설마 아니겠지” 하며 라면을 끓였다.
어라. 꿈에서 먹는 라면도 아니고 맛이 왜 이렇게 멀지 싶다. 불안해진 나는 소금과 설탕을 번갈아 찍어 먹어본다. 소금에 얼굴이 확 찌푸려지는 걸 보니 미각은 살아 있다. 향수를 뿌려보았다. 코밑에 뿌렸는데도 저 멀리 아련하다.
이튿날 외계인 시체 냄새는 물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콧구멍은 시원하게 뚫려 있지만, 폐업에 들어갔다. 온라인으로 단원들과 미팅을 해보니 나처럼 음성 판정인데 유증상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검사 뒤 결과 나오는 그 하루 사이에 전체 연습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이탈리아 정부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코로나 앱을 만들어 배포했다. 누군가가 확진을 받으면 그 앱에 입력한다. 그러면 자동으로 접촉했던 사람들에게 검사받으라고 안내하는 형식이다. 나는 내 주위 수십 명이 확진이 났음에도 단 한 개의 알람을 받지 못했다. 그 앱은 지워버렸다.
내 생에 가장 우울한 2주를 보내고 그중 케이크도 미역국도 없는 쓸쓸한 생일을 보냈다. 후각은 입장하는 신부의 발걸음보다도 더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 3주 차에 이틀 연속 검사를 받았고 당당히 두 개의 음성 판정을 받았다.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양성 확진을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노력하지 않는 한 꽃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없다.
12월13일부로 밀라노는 ‘Zona Gialla’(황색 지대)로 하향 조정돼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거리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졌고 복작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직 전체 이탈리아 하루 확진자는 1만9천 명대로 한국에서 보면 기함할 숫자이지만, 3만∼4만 명일 때에 비하면 콧노래 부르며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을 할 만하다.
엊그제 코로나19 항체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는 꽤 높은 수치의 항체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각을 완전히 잃었던 그 격리 동안 코로나는 내 옆에 사신처럼 머물다 떠난 모양이다.
밀라노(이탈리아)=박사라 스칼라극장 성악가
*박사라씨는 통권 제1315·1316호 표지이야기 ‘코로나 뉴노멀’에 이탈리아 현지 소식을 담은 글 ‘우아한 드레스 입고 쓰레기를 버리다’를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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