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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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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밥이 공산주의다

‘식욕의 해방’ 가져온 중국 제1호 개체호 식당 웨빈반점
등록 2020-06-23 11:40 수정 2020-06-25 01:53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이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다. 류상청 <마오 이후의 중국: 1976~1983>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이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다. 류상청 <마오 이후의 중국: 1976~1983>

코로나19가 한창 퍼지고 있을 때, 우한에 사는 중국인 친구가 어느 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악마 같은 바이러스가 나의 도시를 습격하고 수많은 이웃과 동포가 죽거나 쓰러지고 있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오늘도 러간몐(우한에서 아침에 자주 먹는 국수)은 먹지 못하겠구나….”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였다. 우한에 갔을 때, 이른 아침 창장대교 주변 노천 식당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러간몐 한 그릇을 후르륵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러간몐을 파는 식당이 있다면 어디라도 당장 ‘목숨 걸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친구 역시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러간몐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리라. ‘살아 있을 때’ 일상이 주는 소박한, 가장 원초적인 삶의 힘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공자도 말하질 않았나.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란 두 가지 일에서 벗어날 수 없나니, 식욕과 색욕이 바로 그것(食色性也)”이라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제아무리 포악해도 ‘먹고 사랑하는’ 인간 본성까지 앗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핥아

마찬가지로, 아무리 굶주리고 헐벗어도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식욕과 탐식이다. 중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은 ‘먹는 일’(吃事)이라는 자전적 수필에서, 한때 자신이 얼마나 광적으로 ‘먹는 일’에 집착했는지를 고백했다.

“최근엔 배곯을 일도 없고 배 속엔 기름기가 가득하지만, 일단 연회에 가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건 말건, 항상 마음이 다급해져서 배불리 먹지 못하기라도 할까봐, 음식을 미친 듯이 쓸어담는다.” 글의 말미에서 모옌은 “지난 30년간의 ‘먹는 일’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자신은 항상 코를 킁킁거리며 사방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 한 마리 돼지나 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자책했다. 모옌은 왜 그렇게 채신머리없이 식탐을 부렸을까. 그것은 뇌 속에 각인된 굶주림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1955년 태어난 모옌의 성장기는 늘 굶주림과의 투쟁이었다. 그 시기 중국에서 태어난 세대가 다 경험했듯이, 1958년 시작된 ‘대약진 운동’과 곧바로 불어닥친 자연재해는 중국 인민을 아사와 기아로 내몰았다. 마오쩌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인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자며 급속한 공업화 전략인 ‘대약진 운동’을 밀어붙였다. 이름만 거창한 이 운동은 마을마다 할당된 철강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북과 꽹과리를 치며 집 안에 숨겨둔 철로 된 것을 모두 수거해 용광로에 쏟아붓는 것이었다. 음식을 요리하는 솥이나 냄비가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어떻게 밥을 해먹을까?

인민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마을마다 ‘공산주의로 가는 황금다리’라고 부르는 ‘인민공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킨다며 인민공사 안에 공동식당과 탁아소 등을 만들어 여성이 더는 밥하고 아이를 보며 ‘노동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했다.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며 마치 여성해방을 주창한 것처럼 들리는 마오쩌둥의 ‘여성해방론’도 감춰진 절반의 진실은, 여러 치수사업과 철강생산에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의식주로 공산주의를 시작할 수 있다. 공동식당, 무상식량, 그게 바로 공산주의다!” 하지만 모옌이 경험한 공동식당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어느 날 모옌은 공동식당에 줄을 서서 배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집 남자아이와 그 엄마가 앞에서 희멀건 죽 한 사발을 배급받아 오는 길에 그만 아이가 넘어지면서 귀중한 죽이 땅바닥에 쏟아졌다. 당시는 대약진 운동과 가뭄 등 자연재해의 영향으로 전국에 곡식이 씨가 마른 상태라, 공동식당에서 나눠주는 식사는 풀 몇 포기 들어간 죽 한 사발이 고작이었다. 엄마는 아이 등을 때리며 통곡했다. 아이는 잽싸게 바닥에 엎드려 쏟아진 죽을 핥아먹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지금 울 때가 아니야. 빨리 핥아먹어. 조금이라도 핥아먹는 게 남는 거야.” 그러자 엄마도 눈물을 닦고 바닥에 엎드려 어린 아들과 함께 죽을 핥아먹더라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아이가 ‘나중에 크게 될 녀석’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1980년 ‘자영업식당’ 제1호인 웨빈반점이 문을 열었다. 지금도 자금성과 천안문에서 멀지 않은,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 안에서 영업 중이다. 박현숙 제공

1980년 ‘자영업식당’ 제1호인 웨빈반점이 문을 열었다. 지금도 자금성과 천안문에서 멀지 않은,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 안에서 영업 중이다. 박현숙 제공


나팔바지와 공개연애, 코카콜라, 팔로 미

모옌이 겪은 진정한 공산주의는 조금이라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군대에서의 식사였다. 만두를 배 터지게 먹고 정제된 밀가루로만 만든 음식을 먹으며, 옥수수는 남아돌아서 돼지 사료로나 주는 군대의 풍족한 ‘식생활’을 본 동료 군인의 아버지는 감탄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공산주의야!”

중국 인민이 고대하던 진정한 공산주의는 마오쩌둥 사후에야 실현됐다. 중국 인민에게 공산주의는 ‘대약진’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배를 채우는 ‘밥’이었다. 마오가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중국은 개혁·개방이라는 문을 열었다.

1978년 중국 길거리에는 나팔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출몰했다. 그해 상영된 일본 영화 <망향>에서 여자 주인공이 입은 나팔바지가 유행하면서 ‘혁명 시대’의 유산인 군복을 벗어던지고 팔랑거리는 나팔바지와 나일론 셔츠를 입은 젊은 남녀가 그동안 금기시되던 ‘공개연애’를 했다. 이어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음료수’로 상징되던 코카콜라가 중국 심장부 수도 베이징에 상륙했다. 1979년 중국과 미국이 수교한 뒤, 그해 말 홍콩을 거쳐 들어온 코카콜라가 베이징의 외국인 전용 상점 ‘유이’에 진열됐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계급투쟁’과 ‘주자파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방방곡곡 울려퍼지던 베이징에서 나팔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연인과 팔짱을 낀 채 ‘팔로 미’를 외치며 천안문(톈안먼) 광장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젊은이가 시대의 주류가 되었다. 그 틈으로 ‘외식의 자유’도 들어왔다.

1979년 덩샤오핑은 청년실업 해소와 인민에게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으로 자영업 식당과 술집 등을 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 빠르게 움직인 웨빈반점 사장 부부는 1980년 자금성(쯔진청)과 천안문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골목에 중국 제1호 ‘개체호 식당’ 웨빈반점(悦宾饭店)을 차렸다. 개체호의 사전적 뜻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로, 노동자 개인과 그 가족 구성원을 위주로 하고 자신이 가진 생산자료와 자금으로 독립적인 생산과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바로 자영업자다. 1980년 말 정식 ‘영업허가증’을 받은 뒤, 입구에 ‘중국 제1호 개체호 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금까지 40년 이상 같은 자리에서 삼대를 이어 경영하고 있다.

“내가 밥 한 끼 살게”의 시작

웨빈반점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며 외식 문화가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처럼 되자, 전국에 개체호 식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제 인민은 땅바닥에 쏟아진 죽을 핥아먹지 않아도 되고, 자기 돈을 내고 마음껏 더 주문해서 먹는 ‘소비의 자유’를 만끽했다. 웨빈반점이 문을 연 뒤, 베이징을 중심으로 ‘외식하러 간다’ ‘내가 밥 한 끼 살게’라는 말이 유행했다.

“‘소비하자’는 호소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정치 동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정치동원은 과거에 혁명을 호소하던 때처럼, 80년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라고 부추겼다. 과거에는 소비를 억누르고 걸핏하면 ‘정치적 잘못’과 ‘도덕적 타락’으로 연결했지만, 80년대 중·후반부터는 소비 행위에 도덕적인 합리성을 부여해줬다. 소비를 격려하는 것이 바로 인민 생활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 20세기의 80년대에 중국은 혁명 광조증 국가에서 벗어나 상업사회 청춘기로 진입했고, 소비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됐다.”(쑨샤오지, <20세기 중국 소비사>)

나팔바지를 입고 자유연애를 즐기며 ‘자본주의의 톡 쏘는 맛’인 코카콜라까지 맛본 중국 인민은 웨빈반점에서 ‘식욕의 해방’까지 누리자, 그제야 ‘돈이 곧 계급’이고 소비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자 중국인은 너도나도 돈의 바다에 뛰어들었고, 곧이어 배금주의 시대가 왔다.

옛날 공동식당 땅바닥에 쏟아진 죽을 핥아먹어서 주변 어른들에게 ‘나중에 크게 될 녀석’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모옌의 이웃집 남자아이도 훗날 정말 마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부자가 됐다. 모옌에 따르면 그 남자는, 옛날과 달리 먹을 게 풍성해진 현대인들이 건강식품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간파해, 굶주리던 시절 자신이 자주 먹던 산나물과 메뚜기, 여러 식용 벌레를 잡아서 부자나 고급식당 등에 비싼 값으로 팔아 돈을 벌었다.

모옌의 말마따나, 배곯던 시절이나 배에 기름기 잔뜩 낀 시절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풀과 나무, 벌레와 물고기 같은, 지지리 가난했던 시절에 먹은 촌스럽고 토속적인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어도 그 목적은 다르다. 지금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에 낀 두둑한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먹는다. 그사이 중국인은 수많은 웨빈반점에서 너무 많은 기름진 음식을 허겁지겁 쓸어담으며 과식했다. 모옌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기름기를 뺄 때도 되었다. 여전히 양껏 배가 차지 않는 건 오로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돈’뿐일 것이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러간

우한에 사는 친구는 드디어, 매일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러간몐을 먹게 됐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러간몐을 파는 식당에 갈 수 있게 됐다. 막상 매일 먹을 수 있게 되니 더는 ‘목숨 걸고’ 당장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 친구도 아침마다 ‘오늘은 러간몐을 먹을 수 있겠구나’라며 마냥 행복해하고 있을까. 어쨌든 우리에게는 지금,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러간몐을 먹을 수 있는 자유의 문이 열렸다. 그래서 행복한지는 일단 먹고 난 뒤 생각해보겠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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