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이 지난 1월23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미국을 방문해 고위급 회담을 하고 돌아온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보고를 들으며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2차 조-미 수뇌상봉(북-미 정상회담)에 큰 관심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비상한 결단력과 의지를 피력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믿고, 인내심과 선의의 감정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며, 조-미 두 나라가 함께 도달할 목표를 향하여 한발 한발 함께 나갈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월23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2차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이 이튿날 보도했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훌륭한 친서’를 전달했고, 김 위원장은 ‘커다란 만족’을 표시 했단다.
은 6개 국어로 보도된다. 북한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히는 창구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대내적으로 공식 입장을 밝힐 때는 에도 같은 내용이 실린다. 1월24일치 에는 관련 소식이 없었다.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미 성과에 대해 김 위원장이 ‘흡족해했다’는 통신의 보도는 미국을 겨냥한 메시지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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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은 김 위원장이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한 회담 정형(정세와 형편)과 활동 결과에 만족을 표시”한 뒤, “일정에 오른 제2차 조-미 수뇌상봉과 관련한 실무적 준비를 잘해나갈 데 대한 과업과 방향을 제시”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도 1월19일 김영철 부위원장을 만난 뒤 “엄청난 만남이었다. 큰 진전을 이뤘다. 2월 말께 (김 위원장과) 만나기로 합의했다. 개최국은 이미 정했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나중에 발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건설적인 대화가 이뤄졌다. 신뢰 구축과 경제발전, 장기적인 대화 노력 등이 논의됐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해 6월12일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장에서 취재진을 향해 웃었다. 연합뉴스
지난 1월19~21일 스웨덴 스톡홀름 북서쪽 멜라렌 호숫가의 학홀름순드 회의장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 실무회담에 대해 스웨덴 외교부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스웨덴은 스위스와 함께 유엔 쪽을 대표해 한국전쟁 종전 뒤 정전체제 감시·관리 역할을 맡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이른바 ‘공산 진영’에서 파견된 폴란드와 체코는 1990년대 철수)의 일원이다. 또 1973년 4월 북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지금까지 평양에 대사관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유럽 국가다. 스웨덴은 그간 북한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입장을 북쪽에 전달하는 ‘이익대표국’ 노릇도 해왔다. 한반도 상황과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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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담에선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 관련 논의뿐 아니라 다양한 양자 접촉도 이뤄졌다.” 통신은 1월21일 스톡홀름발 기사에서 ‘외교 소식통’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회담에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외에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참가했다. 북-미, 한-미, 남북 사이에 긴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을 수 있음을 뜻한다. 는 “지역안보를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됐으며, 이 문제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고도 덧붙였다.
정리해보자. 스톡홀름 회담에서 남북한과 미국은 신뢰 구축, 경제개발, 지역안보 등 크게 3가지 주제에 대해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신뢰 구축’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언급한 ‘새로운 북-미 관계’로 가는 첫걸음이자, ‘비핵화’를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경제발전’은 이 과정을 통해 북쪽이 이루려는 목표다. ‘지역안보’는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전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버팀목이다. 사실상 향후 북-미 협상에서 다뤄야 할 모든 내용이 담겼다. 이번 회담이 단순히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실무회담 성격을 넘어설 수도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되새겨보자. 북한과 미국은 지난해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항구적이며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적대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고 대화와 협력의 새로운 북-미 관계를 수립하는 게 먼저다. 이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할 명분도, 이유도 사라진다. 세 항목의 배열이 순서대로 이뤄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새로운 관계’ 대신 ‘비핵화’를 앞으로 가져오면서, 지난 7개월여 북-미 협상은 한 치도 전진하지 못했다.
이른바 ‘북핵 문제’와 관련해 지금까지 북-미가 ‘해법’에 가장 근접했던 건 2003년 8월 시작돼 2007년 9월까지 이어졌던 6자(남북·미·중·일·러)회담을 통해서였다. 특히 2005년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4차 6자회담 공동성명(9·19 공동성명)과 2007년 2월 역시 베이징에서 열린 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처(2·13 합의)에 그 뼈대가 담겨 있다. 좀더 자세히 들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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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공동성명 제1조에서 참가국들은 한반도의 평화적 비핵화, 북한의 핵무기·핵계획 포기 및 핵확산금지조약(NPT)·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복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북한의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 권한 존중 등에 합의했다. 또 제3조에선 에너지·교역·투자 등 경제협력 증진, 대북 에너지 지원 등을 약속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참가국은 2·13 합의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 북-미 관계 정상화, 북-일 관계 정상화, 경제·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를 다룰 실무그룹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스웨덴 실무회담에서 집중적으로 다뤘다고 전해진 주제와 정확히 일 치한다.
1월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남북-미 실무회담을 마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일행이 현지 북한 대사관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는 북-미 양자협상으로 풀어야 한다. ‘북-일 관계 정상화’ 역시 양자협상을 벌여야 한다. 반면 ‘경제·에너지 협력’과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는 양자가 아닌 다자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비용(경제·에너지 협력)을 부담할 수도, 안전(동북아 평화·안보 체제)을 보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북-미 협상이 본궤도에 오르면, 다양한 양자회담과 함께 다자회담도 동시다발적으로 열려야 하는 이유다. 스웨덴 실무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눈여겨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 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새로운 북-미 관계’를 출발로 ‘종전선언’을 기대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 신고가 먼저라고 맞받았다. 종전선언 카드를 거둔 북한은 제재 완화·유예를 요구했다. 미국은 비핵화를 앞세우며 독자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북-미 협상은 교착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다자협상 적극 추진’을 입에 올렸다. 예사롭게 넘길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짚었다.
“김 위원장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을 언급한 것은 비핵화 협상과 평화체제 협상을 분리할 수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비핵화 문제는 북-미 협상으로 풀어나가면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선 정전협정 당사자를 중심으로 다자협상을 추진해나가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다자협상 적극 추진’ 구상은 중국과도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 발표 뒤 첫 대외 활동으로 네 번째 방중 정상외교를 선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김 위원장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한 정상회담에서 “국제 및 지역 문제, 특히 조선반도 정세 관리와 비핵화 협상 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해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 1월10일 보도)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시 주석은 “조선 측이 주장하는 원칙적인 문제들은 응당한 요구이며, 조선 측의 합리적인 관심 사항이 마땅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데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조선반도의 정세 안정을 위해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협상 테이블’이 넓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대로 2월 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지난해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원칙에 합의했다면, 이번 회담에선 ‘실행 계획’이 나와야 한다.
정상회담은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협상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최고지도자가 만나 ‘통 큰 결단’을 내리는 자리다. 앞선 실무회담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내용까지 합의할 수 있느냐가 정상회담 성공을 가르는 관건인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1월23일 김영철 부위원장 등 방미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믿고, 인내심과 선의의 감정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 실무 협상에 기대감을 내비친 게다.
북-미 정상회담이 일정한 성과를 낸다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끼칠 다양한 후속 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먼저 김정은 위원장의 예정된 서울 답방이 기다리고 있다. 남북이 다시 한번 한반도 정세를 성큼 앞으로 끌어가는 기회가 될 터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방중 정상외교를 세 차례나 이어갔다. 올해도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4차 방중에 나섰다. 사실상 관례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4차 방중 때도 시진핑 주석에게 평양 방문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시 주석은 “초청을 쾌히 수락하고 그에 대한 계획을 통보”했다고 은 전한 바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로 시 주석의 방북 가능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중국 최고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2005년 10월 후진타오 당시 주석이 마지막이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이뤄낼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했다. 북-미 협상과 합의의 수준도 당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북-미 관계’를 위해선 신뢰를 쌓아야 한다. 대북제재 유예·완화와 북-미 수교로 가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다자협상에 맡길 수 있다. 이를 위해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에서 대북제재 완화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유엔 안보리는 그간 대북제재 결의 때마다 핵·미사일 도발 중단, 6자회담 복귀를 북쪽에 촉구해왔다.
북쪽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조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통해 NPT와 IAEA 안전조치 복귀, 핵시설 목록 신고 등에 합의했다. 이 경우, 국제사회에 참여해 비핵화 과정의 ‘다자화’도 모색해볼 만하다.
‘새로운 북-미 관계, 평화체제, 비핵화’란 세 갈래 길은 한반도 평화란 목적지에서 모인다. 그 길을 내달리기 위해, 바야흐로 ‘자유로운 상상력’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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