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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로힝야 비극’ 속에 산다

한국에 사는 로힝야 출신 난민

모하메드 이삭이 말하는 짓밟힌 로힝야의 인권
등록 2018-08-30 23:54 수정 2020-05-03 04:29
한국에 사는 로힝야 난민 모하메드 이삭.

한국에 사는 로힝야 난민 모하메드 이삭.

“마을이 불타고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눈물이 흐르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힝야 출신 난민 모하메드 이삭(52)은 1년 전을 떠올리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2017년 8월25일, 미얀마(버마) 군대가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 지방에 사는 로힝야 사람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로힝야의 민병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 미얀마 보안군을 공격한 사건이 불씨가 되긴 했지만, 미얀마 군대에 목숨을 잃은 수천 명은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무차별 방화, 집단 성폭행, 아동 살해 등 미얀마 군대의 잔혹한 학살은 로힝야 사람들의 삶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꿨다.

로힝야 사태는 ‘현재진행형’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국가 자문역을 맡은 아웅산 수치는 “군은 안보작전을 수행하면서 행동수칙을 엄격히 지켰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충분한 조처를 했다”며 군을 감쌌다. 로힝야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았다. 학살의 책임을 외면한 수치는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소수 이슬람 민족인 로힝야는 오래전부터 라카인주에 정착해 불교 중심의 미얀마 문명과 공존해왔다. 1948년 미얀마 독립 후에도 로힝야는 다른 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196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이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부정하면서 삶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힝야 사람들은 거주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했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투표도 할 수 없었다. 1982년 제정된 미얀마 시민권법은 로힝야를 국가가 인정하는 135개 소수민족에서 제외했다. 시민권도 박탈했다. 미얀마 정부와 사람들은 이들을 “로힝야”라고 이르는 것도 꺼리며,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벵골인”이라고 한다.​

라카인주 북부 지방 도시 부티다웅이 고향인 이삭은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홀몸이 된 팔순 노모와 형제들, 그리고 25살 장남이 미얀마 군대의 공격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간다”는 짧은 소식만 들은 뒤 가족들과 연락이 끊어졌던 이삭은 한동안 애가 타 밥을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 “가족들이 농사짓던 땅과 기르던 가축들을 다 버려두고 몸만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캠프로 옮겼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고향을 떠난 로힝야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있는 난민캠프로 향했다. 지난해 참사 후 90만 명의 로힝야 난민이 이곳으로 왔다.

이삭은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심장질환과 고혈압 증상까지 생겼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아 일주일에 5일을 일하는 것도 버겁다. 몸이 아픈 날에는 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약을 먹고 집에서 쉬는 그에게 로힝야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난민캠프에 있는 어머니 모시고 오는 꿈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삭은 미얀마 군부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방해했다. 무슬림을 싫어했는데, 민주화운동은 더 싫어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로힝야는 마구잡이로 탄압했다.”

이삭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1988년 경찰에 체포됐다. 한 달 가까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대로 있으면 총살을 당할 것 같다고 느낀 이삭은 위험을 무릅쓰고 탈옥을 감행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방글라데시로 도망쳤지만 2살 터울의 동생은 끝내 미얀마 경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를 떠나던 해에 결혼한 부인 파티마와는 생이별을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이삭은 11년 동안 로힝야 난민들을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999년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사람들을 단속해 감옥에 가두거나 미얀마로 돌려보냈고, 이삭은 인도로 향했다.

미얀마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삭은 여권을 만들거나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2000년 봄 어렵게 모은 미화 3천달러로 부산항에 밀입국했다. 4월이었다.

처음 당도한 한국 땅에서 버스를 타고 무슬림 사람이 많은 서울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불법체류자들과 함께 묵으며 주로 공사장과 공장에서 일을 했다.

한국 정부는 2000년대 초반 불법체류 노동자가 늘어나자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삭은 2003년 용산 나눔의 집에서 만난 한 신부의 도움으로 난민신청서를 냈고, 2006년 초에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난민 인정을 받은 그는 2007년 부티다웅에서 아내 파티마를 한국에 데려왔다. 가구 공장에서 일하며 아이 3명을 낳았다. 재작년에 한국 국적 취득 신청을 했고 이르면 10월쯤 한국인이 된다. 이삭이 한국인이 되면 세 자녀도 모두 한국인으로 인정받는다. 지금은 미얀마 국적이다.

이삭은 용산 전자상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파티마는 어린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부부가 함께 일하지만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이 150만원 남짓이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5평 비좁은 반지하 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도 이삭은 두 달에 한 번씩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있는 어머니에게 30만~40만원씩 보낸다.

이삭은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시고 오는 꿈을 꾼다. “대한민국은 앞서 미얀마 난민을 한국에 데려온 적이 있다. 로힝야 난민들도 조금 관심을 갖고 데려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 사는 로힝야 난민은 두 가족으로, 10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2013년 난민법이 제정된 뒤 재정착 제도를 이용해 타이에 있는 미얀마 난민 79명을 한국에 데려왔다.

세계 곳곳 떠도는 로힝야 난민 100만 명

100만 명 넘는 로힝야 난민이 세계 곳곳을 떠돌지만 그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다. 로힝야 난민들을 돕고 있는 ‘아시아 인권평화 디딤돌’(아디)의 김기남 변호사는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로힝야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구호단체가 나눠주는 식량으로는 그저 생존만 할 수 있다. 로힝야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이 언제 이뤄질지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삭은 짓밟힌 로힝야의 인권을 알리는 데 삶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나는 한국의 로힝야다. 미얀마는 로힝야 사람들에게 학교도 못 가게 하고 이동도 못하게 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미얀마 정부는 현재 로힝야를 없애려고 한다. 이를 알리고 로힝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가진 돈과 내 몸을 다 바칠 수 있다.”

글·사진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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