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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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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빈자리

독재정권 50여 년 저항의 상징…

콩고민주공화국의 에티엔 치세케디
등록 2017-02-15 20:43 수정 2020-05-03 04:28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에티엔 치세케디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연합뉴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에티엔 치세케디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 연합뉴스

암살당한 대통령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돼서 16년간 집권했다. 긴 임기가 끝나기 직전, 아들 대통령은 치안을 이유 삼아 “대선을 2년 미루고 그 사이 과도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법부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시민들은 “불법 정권은 물러나라”며 저항했다.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에게 군대는 총격을 가했다. 40명 이상 죽고 수백 명이 체포됐다. 이 나라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래도 반발이 잦아들지 않자 결국 대통령은 한발 물러서 2017년 안에 정권을 이양하고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는 협의에 임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듯 기시감이 드는 이 이야기는 지난해 12월 콩고민주공화국의 현재다.

“그를 대신할 정치적 후계자가 없다”

조제프 카빌라 전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막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는 야당 정치 지도자 에티엔 치세케디다. 치세케디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독재정권이 50여 년간 이어지는 동안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고문과 가택연금, 국내외 망명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독재정권하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의 첫 야당을 만들어 이끌어왔다.

그의 말은 강력했다. 이번 시위도 치세케디가 ‘정권 연장은 쿠데타’라며 유튜브를 통해 발언한 이후, 카빌라의 임기가 종료된 다음날 지지자를 비롯한 시민 수백만 명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결국 카빌라의 정권 연장은 좌절되는 듯 보였다.

지난 2월8일 치세케디가 폐색전증으로 별세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향년 84. 치세케디는 다음 대선 전까지 과도정부를 이끌며 올해 안에 카빌라 전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고 대선을 치른다는 내용의 협상이 이뤄지는 과정을 감독하고 있었다. 민감한 시기에 콩고민주공화국 야권의 거인인 치세케디가 사망하면서 카빌라 전 대통령이 약속을 깰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 비관적으로는 치세케디의 공백으로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해지면 1996~2003년 500만 명이 사망한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같은 비극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전망도 나온다. 내전 당시 30년 넘게 정권을 잡았던 모부투 대통령이 반군에 암살당하고 주변 국가들까지 콩고민주공화국 정치에 개입하면서 전쟁이 커졌고, 사망자 대부분은 기근과 질병으로 죽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분쟁은 아프리카 대륙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된다.

미국 뉴욕대학 국제협력센터의 콩고민주공화국연구소장 제이슨 스턴스는 영국 일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치세케디의 죽음은 비극이며 콩고민주공화국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치세케디의 당 안에도, 다른 여권에도 그를 대신할 만한 정치적 후계자가 없다. (…) 치세케디가 죽기 전에도 야당 인사들은 (정권 연장을 위한 과도정부를 비판하기보다 그 안에서) 장관이나 내각 한 자리를 얻으려고 겨뤘다. 카빌라 대통령이 그의 반대자들 사이에 불화를 심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던 치세케디는 벨기에에서 2년간 치료받다가 지난해 7월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로 돌아와 머물렀다. 그가 귀국한 날 거리에는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러 수십만 명이 모였다. 브뤼셀에 건강검진차 방문했던 치세케디가 숨졌다는 소식이 킨샤사에 퍼지자 그의 자택 부근에선 지지자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일부가 체포되기도 했다. 치세케디를 애도하는 시민들은 영국 방송 BBC 인터뷰에서 “그는 인생 전부를 희생해서 우리를 눈뜨게 해줬다” “만델라를 잇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치세케디의 장례는 콩고민주공화국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선출된 대통령’이라 불린 낙선자

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치세케디의 이력은 단순하지 않다. 법을 공부한 치세케디는 1960년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직후 정부 사법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1965년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모부투가 30년 넘게 집권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친 입안자 중 한 사람이 치세케디였다. 어느 날은 내무장관이었다가 그 다음날에는 집에 연금되고 군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게 치세케디의 정치 인생이었다. 모부투는 치세케디를 모로코 대사로 임명했다가 이후에는 고문했다.

1982년 치세케디는 콩고민주공화국 역사상 첫 야당 민주사회진보연합(UDPS)을 창당했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고 세계적인 민주화의 흐름과 서방의 압력에 골머리를 앓던 모부투 대통령이 치세케디를 네 번이나 총리로 지명했지만, 매번 둘이 충돌하는 탓에 몇 달 가지 못했다. 는 “치세케디와 모부투는 서로를 경멸했다. 머리가 두 개인 그들의 정부는 지독한 불신 때문에 거의 무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치세케디는 욱하는 성격과 비타협적 태도를 평생 꺾지 않았다. BBC는 “반세기 넘게 콩고민주공화국은 모부투, 카빌라 부자 대통령 같은 독재자들에 맞서 치세케디의 뒤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그러나 때때로 그의 고집스러운 태도가 민주적 진보를 가로막기도 했다”고 밝혔다.

모부투가 로랑 카빌라 전 대통령의 손에 1997년 축출된 뒤에도 치세케디는 야권에 남았다. 결국 고향 마을로 추방당해 정치적 유배기를 겪어야 했다. 카빌라가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가 집권하기 직전인 2000년에는 해외로 망명을 떠났고, 2003년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에 돌아왔지만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는 어디로

2011년 치세케디는 조제프 카빌라에 맞서 대선에 출마해 패했지만 “선출된 대통령”으로 불렸다. 카빌라 정권하에서 치러진 선거에는 부정이 횡행했다는 게 국내외 목격자들의 논평이었다. 당시 치세케디와 지지자들은 카빌라 대통령의 취임식을 저지하고 자체 취임식을 강행해 경찰에 7명이 사살되고 542명이 체포됐다.

1960년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 60년 가까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민주적으로 정권 교체가 된 적이 없다. 쿠데타, 암살, 부정선거 의혹, 불법적 집권 연장 시도의 연속이었다. 2006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처음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가 시행됐지만 매번 현직 대통령 카빌라가 당선돼 16년을 집권했다. 이를 견제해온 치세케디가 죽고 그를 대체할 만한 야권 지도자가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는 불안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미국의 변화 또한 상황을 악화했다.

는 논평에서 “지난해 버락 오바마 정부는 카빌라 정부가 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존중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 어떤 면에서 보나 지금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민주주의의 진전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 지금으로서 카빌라는 기꺼이 콩고민주공화국의 미래를 갖고 놀 것처럼 보인다. 무엇도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밝혔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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