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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불빛 밝힌 슬픔에 잠긴 도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역대 시장들의 친구이자 중국인 공동체 대변자였던 로즈 팩
등록 2016-09-28 17:53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2012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역사상 첫 중국계 선출직 시장이 탄생했다. 중국계 이민자 2세로, 아시아계로는 처음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 당선된 에드윈 리가 그 주인공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중국계 유권자가 인구의 16%에 달하는 곳이다. 리 시장은 당시 개빈 뉴섬 전 시장이 캘리포니아주 부지사에 당선되면서 임시시장으로 지명돼 1년가량 시장 대행직을 맡고 있었다.

“우리 도시 전체의 상실”

에드윈 리의 당선 배후에는 한 여성이 있다고들 했다. “영리하고, 지치지 않으며, 적들에 따르면 파렴치한”() 여성,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중국인 공동체의 대변자이자 막후 정치 실력자였던 로즈 팩(Rose Pak)이다.

로즈 팩은 그 스스로는 한 번도 정계에 진출하거나 선출된 공직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는 주미 중국 상공회의소의 오랜 고문이었으며, 지지 정치인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거나 차이나타운 거주자들의 이익을 위한 각종 프로젝트의 지원을 돕는 등 장막 뒤 인물로 유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정치운동가 로즈 팩이 2016년 9월18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 팩은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중국에서 몇 개월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지난 5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고 이 가족과 친구들의 말을 옮겼다.

에드윈 리 시장은 팩의 사망 이후 성명을 발표하고 “그는 강하고 두려움이 없었다”며 “그의 죽음은 우리 도시 전체에, 특히 로즈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헌신하고, 지지하고, 종종 맹렬히 싸워 지키려 했던 중국인 공동체에 큰 상실”이라고 말했다. (리 시장은 2015년 재선했다.) 조기가 게양됐고 시청은 팩을 기리는 흰 불빛을 밝혔다.

팩은 1980년대부터 주미 중국 상공회의소 고문이었지만, 직함만으로 그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40년간 지역 정치에 깊이 관여해왔다. 2012년 은 팩에 대해 “역대 샌프란시스코 시장들의 친구이자, 누군가를 고용하거나 해고하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인파이터이며, 지역 정치인들의 당선을 도와온 차이나타운 배경의 조직 리더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크게 늘어나던 아시아계 미국인 인구를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1980년대 처음 운동가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지역 정부에서 아시아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미국 내 어떤 도시보다 아시아계 인구가 높은 곳이었는데도 그랬다.

팩은 2012년 에드윈 리의 시장 당선을 위해 수많은 중국인들의 투표와 정치자금 기부를 이끌어냈다. 리의 시장 당선이 확실시된 뒤 인터뷰에서 그는 “황홀하다”고 말했다. “수십 년의 투쟁 끝에, 우리는 결국 중국계 미국인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정작 팩은 정계 ‘막후 인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ap>에 따르면 그는 “내가 백인이었다면 그들은 나를 시민 지도자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00년 뒤를 생각한 정책
로즈 란 팩(중국 이름 바이란(白蘭))은 1948년 중국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1951년 중국 내전 당시 부유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딸을 홍콩으로 피란시켰다. 이후 아버지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196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샌프란시스코여자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뉴욕 컬럼비아저널리즘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기자로 일했다. 의 첫 아시아계 여성 기자였다. 그곳의 유일한 중국어 능통자로서 팩은 이후 8년 동안 차이나타운을 담당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이 시절 차이나타운은 가난했고 주정부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지역이었다. 팩은 2014년 인터뷰에서 “(당시) 차이나타운에서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나는 복어처럼 퉁퉁 불어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만연한 불공평함, 이 커뮤니티 전체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짜증이 나 있었다. 그들은 차이나타운의 도로가 파손됐다는 기사가 나와도 수리공을 보내지 않았다. 그냥 우리의 요구를 간단히 무시했다.”
1979년 어느 날 팩은 중국 상공회의소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차이나타운 내 병원(‘차이니스 호스피털’)을 5일 내에 폐업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병원은 1925년 설립된 이후 광둥어를 쓰는 가난한 중국인들이 주로 이용해온 지역 병원이었다. 병원은 자금 부족으로 폐업 위기에 처했고, 건물 역시 자금을 들여 새로 짓지 않으면 철거될 상황이었다. 팩은 즉시 행동에 돌입했다. 정치 관련자에게 연락해 폐업 시기를 미루고 병원 살리기 운동과 모금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오랫동안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팩은 이 사건 이후 기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정치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적극적 활동과 발언은 차이나타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팩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중국 춘절 퍼레이드에 매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퍼레이드 중에 마이크를 들고 사회적 이슈나 정치인에 대해 직설적 발언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전통이 되어버렸다. 여론을 살피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 퍼레이드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 샌프란시스코 시장인 아트 아그노스는 에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발언은 차이나타운의 어떤 여론조사보다 나았다”고 말했다.
2013년 팩은 두 가지 큰 프로젝트의 결실을 보았다. 그는 앞서 언급한 차이나타운 내 병원을 다시 짓기 위한 돈을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2013년 1억6천만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해 오래된 지역 병원을 현대 시설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병원 옆 골목에는 ‘로즈팩스웨이’(白蘭之道)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공사 중이던 시영철도의 노선을 차이나타운까지 확장할 수 있도록 연방정부의 예산을 얻어내, 차이나타운이 남쪽 샌프란시스코만 지역까지 연결되는 길을 열었다.
팩은 죽기 얼마 전까지도 차이나타운 내 스톡턴 거리를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만드는 계획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 거리에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게 되면, 거주자들의 생업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차이나타운 내 낙후한 공공주거 단지 재건축에도 힘을 쏟았다.
팩은 2014년 인터뷰에서 “나는 계획을 세울 때 최소 100년 뒤를 생각한다”며 “이 변화는 장기적으로 차이나타운을 좀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적극적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에게는 그런 긴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이나타운이 나의 모든 자산”
팩의 집요하고 직설적이며 고집불통의 태도는 지지자뿐 아니라 적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영향력을 가진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5월 팩이 신장이식 수술을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오던 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는 현 캘리포니아 부지사이자 전 샌프란시스코 시장인 뉴섬을 비롯해 에드윈 리 현 시장 등 30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그는 거기 모인 이들에게 주치의가 자신에게 40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팩은 평생 싱글로 살았다. 그는 명성이나 부는 환상일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어떤 야망도 없어요. 차이나타운이 나의 모든 자산을 상징합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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