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맨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압둘 사타르 에디(Abdul Sattar Edhi)는 1928년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주에서 태어났다. 무슬림 인구가 많은 그곳의 상인 공동체(메몬) 집안이었다. 11살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몸과 마음이 온전치 않은 어머니를 간병한 것은 에디였다. 학교엔 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가 19살 나던 해 세상을 등졌다.
1947년 세상이 둘로 쪼개졌다. 대영제국에서 독립한 인도는 힌두의 나라와 무슬림의 나라로 갈렸다. 인도 땅에 살던 무슬림과 파키스탄 땅에 살던 힌두가 제 땅을 찾아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증오와 폭력이 그 여정에서 수백만을 집어삼켰다. 참담한 나날이었다.
가까스로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에디의 가족은 항구도시 카라치에 자리를 잡았다. 행상을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류도매 시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한꺼번에 몰렸다. 도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산 사람도 살기 어려운 시절, 죽은 이들의 몸뚱이는 아라비아해에 버려졌다.
에디는 2015년 4월2일 인도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사회복지에 대해 뭘 알았겠나? 그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카라치 항구 앞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주검을 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 자선사업 대상은 주검스무 살 무렵 에디는 메몬 공동체가 운영하는 구호단체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구심이 생겨났다. 구호 대상을 메몬 출신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에디는 인터뷰에서 “구호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혼자 설 때가 다가온 게다.
1951년 카라치에 독감이 창궐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길가에 쓰러져 죽어갔다. 에디는 팔을 걷어붙였다. 천막으로 간이 진료소를 세웠다. 의대생들한테 의료봉사를 청했다. 약값은 구걸해서 채웠다. 젊은 에디는 진료소 앞 시멘트 벤치에서 잠을 청했다. 늦게라도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누구든 차별 없이 진료받고 약을 얻었다. 메몬 쪽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공동체의 미움을 사면, 소리 없이 죽임을 당하던 시절이다. 위험도 피할 겸, 경험도 쌓을 겸, 에디는 길을 떠났다.
도보여행의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경비는 구걸로 해결했다. 에디는 2008년 4월10일 영국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이렇게 전했다. “이탈리아 로마의 기차역에서 노숙하고 일어난 날이다. 밤새 누군가 신발을 벗겨갔다. 그냥 맨발로 다녔는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고무장화를 한 켤레 갖다줬다. 내 발보다 두 치수는 큰 것 같았는데, 여행을 마칠 때까지 아주 잘 신었다.”
영국 런던에선 복지국가의 현실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그를 좋게 본 누군가 일자리까지 제안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고국에 돌아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1950년대의 파키스탄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 그걸 하기로 했다.
에디는 1957년 카라치 빈민가에 자그마한 사무실 겸 진료소를 열었다. 에디센터의 출발이다. 1996년 출간된 자서전 을 보면, 에디의 첫 자선사업 대상은 주검이었다. 모든 죽음은 존엄하기 때문이다.
“강에서, 우물 안에서, 도로 한쪽에서, 사건·사고 현장과 병원에서 주검을 수습했다. 유가족이 주검을 찾지 않으면, 당국이 주검을 그냥 내다버리던 시절이다. 주검을 수습해 염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이슬람식으로 정성껏 매장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지만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어른뿐이 아니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주검도 드물지 않게 그를 찾아왔다. 혼전 출산을 한 여성들이 두려움 속에 아기를 죽도록 방치한 게다. 에디는 아기용 침대를 마련해 에디센터 앞에 뒀다. 침대 곁에는 이런 문구를 내걸었다. “두 번 죄를 짓지 마세요. 아기는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현재 파키스탄 전역 330여 곳에 들어선 에디센터 앞에는 아기용 침대가 비치돼 있다. 지금까지 적어도 3만5천여 명의 신생아가 그곳을 거쳐갔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입양돼 새 가족을 얻었다.
제법 큰 아이들도 삶이 팍팍한 부모 손에서 떨어져나와 거리를 헤맸다. 에디는 고아원으로 자선 영역을 넓혔다. 매 맞고 쫓겨난 여성과 버려진 노인을 위한 쉼터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약물중독자와 노숙인, 정신질환 탓에 가족이 방치한 이들을 위한 거처도 필요했다. 무상급식소와 가족계획센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에디센터는 파키스탄을 대표하는 사회복지단체로 자리를 잡아갔다.
에디센터의 ‘상징’ 격인 구급차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1965년이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불을 뿜은 그해 카라치도 폭격을 당했다. 도처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에디는 모금을 통해 낡은 밴 1대를 구해 개조한 뒤 응급 현장을 누볐다. 에디는 자서전에서 “우리 구급차가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자를 병원에 데려갈 때마다, 또 한 사람을 도왔다는 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곤 했다”고 말했다. 현재 파키스탄 전역을 누비는 에디센터의 구급차는 1500대까지 늘어났다.
그 무렵 에디센터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빌키스를 만났다. 에디센터 창설 초기 7명의 여성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뒤 포기했던 결혼이다. 부부는 두 딸과 두 아들을 낳아 키웠다. 집은 카라치 빈민가에 자리한 에디센터 본부에 딸린 방 2칸짜리다. 빌키스 에디는 지난해 <afp>과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과 가정을 꾸리기 위한 집을 따로 가져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 뒤 지금껏 에디센터의 여성과 어린이 분야 업무를 총괄해왔다.
지난 60년 세월, 에디는 단 한 푼도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았다. 센터에 돈이 필요할 때면, 거리로 나서는 것으로 족했다. 그저 묵묵히 서 있으면, 사람들이 한푼두푼 손에 쥐어주고 가고는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은 애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에디센터를 돕는 대신 정부가 직접 나서기를 바란 게다.
“파키스탄 국민은 이미 충분히 오랫동안 방치돼왔다.” 1982년 군사독재자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가 국정자문기구 ‘슈라’를 구성하고, 이슬람 원칙에 따른 통치를 주창하고 나섰을 때다. 에디는 라왈핀디의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언젠가는 그들이 들고일어나, 자기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선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내 말 명심하시라. 지금은 (당신들이) 맹수로 살지만, 언젠가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에디는 민간인을 공격하는 극단주의 무장세력과 불법·탈세로 재산을 쌓아올린 부자, 그리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해선 가차 없이 비판해왔다. 그런 그를 두고 교조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이교도’요,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란 저주도 퍼부었다. 정작 에디는 “그들이 가는 천국이라면 필요 없다.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의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자비의 천사’.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에디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2013년 봄, 에디의 양쪽 콩팥이 차례로 기능을 멈췄다. 투석으로 버티며 그가 거리로 나서면, 사람들은 노인의 손에 지폐를 쥐어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6월 알리 자르다리 전 대통령이 에디에게 외국으로 가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비용 지원도 약속했다. 에디는 파키스탄 국내에서, 정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고집했다.
28년 만에 선포된 국장
압둘 사타르 에디는 7월8일 카라치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1988년 8월 독재자 지아가 사망한 뒤 28년 만에 국장이 선포됐다. 7월9일 카라치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수만 명의 추모객이 몰렸다. 는 ‘바스마’란 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을 따 이렇게 보도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펐던 건, 에디의 관과 추모객 사이에 경찰이 둘러친 장애물이었다. 에디와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일을 정부는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에디는 생전에 장기 기증을 원했지만, 고령에 건강까지 나빠 이식할 수 있는 건 각막뿐이었다. 유해는 카라치 외곽 ‘에디 빌리지’에 안장됐다. 정신질환자와 어린이·여성·노인 쉼터가 들어선 그곳에, 에디는 몇 년 전 자기 묏자리를 직접 파놓았다. 유가족은 “죽어서도 쓸모가 있어야 한다. 힘든 이들의 지킴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에디가 장지를 미리 정해뒀다고 전했다. 향년 88.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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