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종(Keystone Species)은 개체 수에 관계없이 일정 영역의 생태계에서 생태 군집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종을 말한다. 늑대 같은 먹이사슬 최상위의 포식동물이 대표적 예다. 늑대가 없어지면 사슴의 개체 수가 증가하고, 사슴이 먹는 많은 식물종이 사라지게 된다. 이 밖에 해달, 수달, 반달곰, 사자 등이 대표적 핵심종으로 꼽힌다. 핵심종은 비교적 적은 개체 수로도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종이 먹이망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쳐, 일정 지역의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다는 개념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1960년대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이 처음 이 개념을 들고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페인은 ‘핵심종’과 ‘영양종속’(Trophic Cascade·먹이망을 통해 서로 연관된 종들이 연쇄적으로 흥망성쇠하는 현상) 개념으로 생태학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이 6월13일 미국 시애틀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 페인은 워싱턴대학에서 1962년부터 교수로 재직해왔으며 1998년 공식 퇴임했다.
페인은 핵심종 개념의 발견으로 생태학을 이해하는 현대적인 틀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연구방법적 측면에서도 생태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생태학자이자 페인의 친구인 프린스턴대학 사이먼 레빈 교수는 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찰스 다윈의 전통 안에 있는” 박물학자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페인이 핵심종 개념을 도출하게 되는 1960년대 워싱턴 해안가에서의 현장 연구는 생태학에서 가장 유명한 실험 축에 든다.
‘핵심종’과 ‘영양종속’
워싱턴대학
1963년 페인은 워싱턴 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마카흐베이 해안가에서 하나의 실험을 시작했다. 바위가 많은 이 지역은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기고 간조 때는 공기에 드러나 생물에게 다소 혹독한 환경이지만, 덕분에 홍합·따개비·아네모네·해조류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페인은 해안가를 따라 8m 정도의 범위를 정해놓은 뒤, 1년에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해 바위에 붙은 ‘오커 불가사리’를 하나하나 떼어내 바다로 던졌다.
불가사리가 사라지자 이 구역의 생태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불가사리의 주요 먹이였던 홍합의 개체 수가 급증해, 점차 해조류와 따개비 등 다른 종들을 몰아내며 바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불과 1년 만에 이 구역에 사는 종의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과학저널 의 2013년 기사에 따르면 “다채로운 생물들이 서식하던 ‘원더랜드’는 홍합들만의 검은 ‘단일 사회’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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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험은 학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자연계의 모든 종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 면에서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 불가사리 같은 몇몇 종이 개체 수에 관계없이 생태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숨겨진 핵심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었다. 페인은 연구 결과를 ‘영양종속’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과학저널 에 지금은 고전이 된 논문 ‘먹이망의 복잡성과 종다양성’(1966)을 발표했다. 3년 뒤 그는 ‘핵심종’이라는 생태학 용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핵심종은 아치가 무너지지 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꼭대기의 중심돌(keystone·이맛돌)에서 따온 말이다. 핵심종은 주로 핵심 포식자에 해당하는 다양한 종에 적용됐고, 나중에는 꼭 포식자가 아니더라도 개체 수에 관계없이 환경에 불균형적 영향을 주는 모든 종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변화했다.
이뿐만 아니라 페인은 자연에 인위적으로 조작을 가한 ‘실험’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생태학을 엄연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태학은 단순히 자연을 관찰하고 측량하는 ‘자연사’로서의 학문에 가까웠으나, 페인 이후 연구소에서 실험이 가능한 ‘현대과학’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로버트 트리트 페인은 1933년 4월1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개미와 새 관찰을 즐겼고, 관찰한 모든 것을 기록하곤 했다. 1954년 하버드대학 졸업 뒤, 미시간대학에서 화석을 연구하며 학업을 이어갔지만, 담수성 무척추동물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살아 있는 동물 연구에 빠지기 시작했다. 1959년 석사학위를, 1961년 동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워싱턴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마카흐베이에서의 연구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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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67년 연어 낚시 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타투시’라는 이름의 무인도를 발견했다. 미국 본토의 북서쪽 끝 지점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섬이었다. 이곳은 마카흐 인디언 부족이 사는 곳으로 다양한 해조류와 독수리, 바다오리, 바다사자 등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는, 다윈의 ‘갈라파고스섬’ 같은 장소였다. 사람들이 오가는 마카흐베이에서 연구하며 ‘고립’을 열망하던 그는 즉시 이 무인도를 연구 장소로 삼았다. 그는 이곳에서 좀더 큰 규모로 불가사리 제거 실험을 하며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생태학 현장 연구의 선구자수도도 전기도 없는 고립된 섬에서 연구는 고됐지만, 수많은 열정적인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제자 중 대표적 저명인사인 오리건주립대학의 생태학자 브루스 멘지는 와의 인터뷰에서 “현장 연구에 있어 선구적인 시기였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실험을 한 최초의 연구자들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페인은 다른 연구책임자들과 달리 학생들의 독립성과 자유를 존중했다. 직접 나서야 하는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그들의 연구에 간섭하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이 크지 않은 이상,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도 거부했다.
이들은 버려진 옛 해안경비대 기지에서 캠핑하며, 낮 동안 각자 섬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연구활동을 했다. 저녁이 되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앉아 그날의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우리가 낮 동안 해안가에서 연구하고 터덜터덜 캠프로 돌아오면 그는 예외 없이 이렇게 물었다. 오늘 뭘 배웠습니까?” 1980년대 페인과 함께 연구했던 시카고대학의 팀 우턴이 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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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은 50여 년간 제자 40여 명을 길러냈고, 제자의 제자들까지 생각해보면 그의 ‘학문적 가족’은 수백 명에 이른다. 그중 많은 이들이 현재 생태학계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페인의 태도를 이어받아 자연에 헌신하는 독립적인 연구 방식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에 따르면, 페인의 연구를 전세계 해안가로 확장시킨 브루스 멘지와 미국해양대기관리처(NOAA) 처장을 지낸 제인 루브첸코, 유전학을 이용해 고래와 돌고래 고기의 불법 판로를 추적한 스탠퍼드대학의 스티브 팔럼비 등이 그들이다.
페인은 70대에도 타투시섬 방문을 계속했다. 시력이 약화되고 거동이 불편함에도 딸과 함께 매년 이곳을 찾았다. 페인은 1995년 25년간 지속해온 ‘불가사리 제거’ 실험을 그만두었다. 해변은 페인이 손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지금도 타투시섬에서의 연구는 제자인 시카고대학 팀 우턴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궁극적인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말년에 지구 환경의 전례없는 변화가 계속되자, 페인은 인류가 가장 중요한 핵심종이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밖에 없음을 주지시키면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지난 3월 과학저널 와의 인터뷰에서 “인류는 확실히 과잉지배적인 핵심종이며, 그 규칙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궁극적인 패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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