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노동자 총리’

하역노동자에서 사민당 출신 총리로… 촘촘한 사회안전망 마련한 안케르 헨리크 예르겐센
등록 2016-03-31 16:51 수정 2020-05-03 04:28
AFP 연합뉴스

AFP 연합뉴스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선거 때마다 떠오른다. ‘부자 되세요’를 인사말로 외치던 시절, 2002년 대통령선거 때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사람 좋게 웃으며 묻고 또 묻던 말이다. 제20대 총선이 코앞이다. 새삼, ‘행복’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마부, 어머니는 청소부

지난 3월16일 유엔이 을 내놨다. 내전의 땅, 아프리카 중부 부룬디가 꼴찌를 기록했다. 1위는 유럽 중북부의 덴마크였다. 2012년 보고서가 처음 나온 이후, 벌써 3번째 맨 위다. 덴마크는 ‘행복의 땅’이다. 그 ‘행복’을 지탱해주는 힘은 무언가? 체계적이면서, 또 촘촘한 사회보장제도다. 덴마크는 이미 1870년대에 복지국가 건설을 시작했다.

광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엔 각종 복지 혜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일반노령연금법’에 따라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전 국민에게 평등하게 노령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 게 1956년의 일이다. 노동시간 단축, 유급휴가 확대, 무상보육·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4년 제1차 오일쇼크가 경제위기를 몰고 왔을 때, 덴마크는 이미 사회보장제도를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 체계성에 ‘촘촘함’을 더한 인물이 있다. ‘악마’처럼, 행복도 ‘디테일’에서 나온다.

안케르 헨리크 예르겐센은 1922년 7월13일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중교통용 마차를 몰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버스 기사다. 어머니는 청소노동자였다. 그가 5살 나던 해 덴마크에 폐결핵이 돌았다. 부모를 모두 잃은 예르겐센은 친척집에 맡겨졌다. 왕립고아학교 7학년(중1)을 중퇴한 그는 창고 화물노동자로 잔뼈가 굵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예르겐센은 21살이던 1943년 징집됐다. 그해 8월23일 독일군이 작전명 ‘사파리’를 단행했다. 코펜하겐 항구에 정박 중이던 덴마크 함대를 겨냥한 기습 공세였다. 예르겐센의 소속부대도 독일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예르겐센은 병역을 마친 뒤에도 코펜하겐 일대에서 반나치 저항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전쟁은 끝났다. 창고와 항구를 오가는 화물·하역 노동자로 일하던 청년 예르겐센은 1948년 동갑내기인 잉리드 페데르센과 결혼했다. 코펜하겐 남쪽 항구 부근의 노동자 집단거주 지역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한 것도 그 무렵이다.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던 그는 자연스레 정치에 눈을 떴다. 노조 지도자로 성장해가던 그는 1964년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다. 덴마크 의회는 그 시절에도 농민과 노동자 의원이 상당수였다.

광고

의회 진출 뒤에도 노동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예르겐센은 1968~72년 덴마크 노동자연맹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 단체는 이른바 ‘비숙련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었다. 숙련 노동자들은 덴마크 노동조합총연맹(LO)으로 따로 뭉쳐 있었다. 두 단체 사이엔 갈등이 잦았다. 토마스 닐센 당시 LO 위원장은 예르겐센을 ‘지독한 멍청이’라 부르곤 했단다.

의무휴일 늘리고 자영업자에게 실업급여도

의회에서, 예르겐센은 노동문제에 천착했다. 그는 사민당의 왼쪽에 서서, 비숙련 노동자와 실업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필요할 땐, 당 지도부와도 날을 세웠다. 1972년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주류 노동계의 광범위한 반대 여론에도 그는 찬성운동에 적극 나섰다. 덴마크의 EEC 가입이 결정된 다음날, 옌츠 오토 카우 총리가 돌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예르겐센을 후임자로 지목했다. 그때까지 예르겐센은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전무했다.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나를 총리 후임으로 지명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내게 맡겨진 일을 그저 해나가기로 결정했다.”

총리로 선출됐지만, 그는 총리공관에 입주하지 않았다. 부인과 네 자녀와 함께 살아온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했다. 친구도, 이웃도, 그런 그를 반겼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눈부신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도 아니었다. 검소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총리였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예르겐센 총리’ 대신 ‘안케르’라고 불렀다.

14개월여 총리로 일한 그는 경제위기 속에 치러진 1974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패하면서 실각했다. 1년 남짓 야권에 머물렀던 사민당은 1975년 소수파 연정을 통해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예르겐센은 두 번째로 총리에 올랐다. 경제위기가 심화하던 1978년 그는 보수 자유당까지 포괄한 거국 내각을 구성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경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다. 예르겐센은 1982년 증세와 긴축재정을 뼈대로 한 정국 타개책을 내놨다. 여론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는 미련 없이 총리직을 던졌다.

광고

그가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덴마크 경제는 EEC로 빠르게 통합돼갔다. 1978년 두 달 남짓 외교장관을 겸임할 정도로, 예르겐센은 대외관계에도 눈이 밝았다. 냉전이 불을 뿜던 시절임에도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최대 동맹국인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앞장서 반대했다. 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적극 찬성하기도 했다. 1978년 9월엔 국민투표를 거쳐, 투표권을 20살에서 18살 이상으로 낮췄다.

무엇보다, 예르겐센은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의 그물코를 더욱 촘촘하게 벼렸다. 그의 셈법은,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다. ‘경기가 위축됐다. 실업률이 높아졌다. 노동시장으로 유입되는 노동자가 지나치게 많아졌다. 실업률이 줄지 않는 이유다. 어떻게 할까? 노동력 공급을 줄여야 한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노동자에게 유급휴직을 확대하자. 재교육을 원하는 중견 노동자가 일정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 조기 퇴직을 원하는 노동자에겐 퇴직급여를 임금 대비 70%까지 지급해주자.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 휴일을 확대해 삶의 질을 높이자.’

“사민당 지도부의 마지막 진짜 노동자”

두 번째 집권기인 1975년 3월 주택관리법을 바꿔 세입자의 권리를 확대·보장했다. 같은 해 사회보장법을 개정해, 복지 혜택의 종류와 급여 수준을 한층 높였다. 또 수혜 대상자 선정 기준을 낮추고, 급여 지급 시기도 앞당겼다. 1976년엔 실업급여법에 손을 댔다. 만성적인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던 자영업자에게도 실업급여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됐다. 1978년엔 산업재해보상법을 바꿔, 산재로 인한 유가족 급여를 부인뿐 아니라 남편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퇴직급여법을 확대 도입해, 자발적으로 조기 퇴직을 한 이들에게 58~66살 실업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1979년엔 국가공휴일법을 개정해 의무휴일 수를 30일까지 늘렸다. 또 1980년엔 고용촉진제를 도입해, 장기간 실업 상태에 있더라도, 신규 채용되기 전에는 실업급여 지급을 중단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예르겐센은 사민당을 이끌고 정치 전면에서 활약했다. 그는 절정을 향해 치닫던 냉전의 광기 속에서 덴마크가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토군 전함이 덴마크 영해에 들어올 때는 핵무기 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는 안팎의 비난에도 동독과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했다. 1988년 사민당 주도로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석패한 뒤 그는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예르겐센은 1994년까지 의원으로 활동했다.

48년간 해로했던 부인 잉리드 페데르센은 1997년 세상을 떠났다. 예르겐센은 거동이 불편해 요양원으로 옮겨간 2008년까지 코펜하겐 남쪽 항구 한쪽의 오랜 집을 지켰다. 덴마크 사민당은 3월20일 성명을 내어 예르겐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사민당 쪽은 그의 사망 원인과 정확한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 현지 영자 일간 은 3월21일치에서 “덴마크의 진짜 노동자가 숨을 거뒀다. 예르겐센은 사민당 지도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진짜 노동자였다”고 애도했다. 향년 93.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