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보위(1947~2016)는 반세기 동안 이미 수많은 죽음과 부활을 겪었다. 그는 암흑 속을 떠도는 우주비행사 ‘메이저 톰’이었고, 가공의 록스타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였으며, 흑인음악을 연주하는 ‘말라깽이 백인 공작’이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 발매된 앨범 에 수록된 곡 (Lazarus·즉, 라자로)가 싱글 발매됐을 때, 많은 이들이 “대중음악의 궁극의 라자로”(미국 음악웹진 )로서의 그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수의 부름을 받고 나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한 라자로 말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8개월 암 투병한 대중음악의 ‘라자로’ </font></font>
그리고 채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각자의 방에서 를 들으며, 그가 말년에 다시 실험적인 사운드와 함께 새로운 미지의 구역으로 돌아왔음을 반기고 있던 그의 팬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여길 올려다봐. 나는 천국에 있어. 나에겐 보이지 않는 흉터가 있지. …파랑새처럼. 오,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그게 나답지 않아?”()
불과 몇 시간 만에 는 유언으로 바뀌어버렸다. 이제 이 앨범을 불길한 죽음의 전조로 듣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보위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는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이 앨범이 의도적으로 팬들을 위한 ‘작별 선물’로 제작됐다고 밝혔다. 보위가 18개월 동안 암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보위는 자신의 연극의 마지막 장을 ‘라자로’로 분한 채 끝내면서, 지구 행성의 수많은 부적응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죽음은 연극적이었던 그의 삶만큼이나 ‘그다웠다’.
미답의 장소로 지구인을 이끌던 음악·예술·패션의 선구자, 혁신을 거듭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였던 아티스트 데이비드 보위가 지난 1월1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69번째 생일 이틀 뒤였다.
보위는 1970년대, ‘지기 스타더스트’ 등 수많은 페르소나를 통해 새로운 사운드와 패션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그는 외계인, 퀴어, 부적응자, 우주비행사 등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노래를 만들었고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팬들을 데려갔다. 주류 문화는 그에 의해 여러 차례 개조됐다. 1972년 히트곡 은 단지 우주적인 자이브곡이 아니라, “모든 이상하고 멋진 일들은 ‘다른 쪽에서’ 일어난다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로드맵이었다”.()
보위의 본명은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다. 그는 1947년 1월8일 영국 런던 남부의 브릭스턴에서 태어났으며, 브롬리 기술고등학교에서 미술과 음악을 공부했다. 보위의 첫 악기는 색소폰이었다. 1961년 어머니가 색소폰을 사주었고, 후일 색소폰 사운드는 그의 음악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된다. 그는 어린 시절 이복형 테리 번스를 동경했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번스는 보위에게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등 재즈 뮤지션을 소개해주었다. 번스는 오랜 세월 편집증과 정신분열로 고통을 겪었고 이것은 보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번스는 정신병원에 수용됐고 1985년 결국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음악·예술·패션의 전위적 선구자</font></font>
보위는 1962년 친구인 조지 언더우드와 싸우다가, 눈동자에 손톱 조각이 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결과 그의 왼쪽 동공은 영구 확장됐다. 이 사고는 뜻밖에 보위에게 이 행성의 것 같지 않은 외모를 선사했다(그는 양쪽 눈동자의 색깔이 다르다).
15살 때 보위는 첫 번째 밴드 ‘콘-래즈’를 결성했다. 초기 로큰롤 악단 형태였으며 언더우드를 비롯해 멤버는 여러 번 바뀌었다. 이후 그는 여러 밴드와 솔로를 오가며 블루스 기반의 음악 활동을 했다. 이 시기 그는 록밴드 몽키스의 데이비 존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보위’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재능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던 보위는 솔로로 나섰고, 1967년 첫 솔로앨범 를 발매했다. 1960년대 후반, 그는 댄서이자 마임배우인 린제이 켐프와 연극·마임을 공부했고, 이후 보위는 ‘움직임’과 연극적인 인위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9년 전년도에 공개된 영화 를 모티브로 한 앨범 를 발매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맞춰 발매된 싱글 는 영국 차트 5위, 전미 차트 15위까지 올라 그에게 초기의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이듬해 3월, 보위는 미술학도였던 앤절라 바넷과 결혼했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얻은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깊어지고 있었다. 1970년 가 발매됐고, 가사에 철학적·미학적 요소가 담기기 시작했다. 1972년 앨범 에서 이런 노선은 더 깊어졌고, 이어 발매한 콘셉트 앨범 의 발매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를 가공의 록스타 ‘지기 스타더스트’로 지칭하고 그의 백 밴드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를 이끌고 전세계를 도는 긴 투어를 시작했다. 이때의 공연은 전세계의 열렬한 팬들을 끌어모아 ‘비틀매니아’ 이래 10여 년간 없던 팬덤을 일으켰다. 투어 중 녹음된 앨범 은 가공의 록스타인 ‘지기 스타더스트’ 자체의 앨범이 되었다.
보위는 글램록의 선구자가 되었으나, 또 다른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었다. 1973년 7월 그는 영국 투어 마지막 공연에서 관중에게 급작스럽게 ‘지기 스타더스트’의 은퇴를 발표해 충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1974년 조지 오웰의 소설 를 모티브로 만든 앨범 , 존 레넌과 공동 작업해 전미 차트 1위를 기록한 유명곡 을 포함한 앨범 등을 발매해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1975년 그는 첫 주연 영화 의 촬영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약물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보위는 어릴 때부터 영향받은 흑인음악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를 발매하면서 이 음악 장르에 ‘플라스틱 소울(Soul)’(인조 소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1976)은 그 연장선에서 새 페르소나, ‘말라깽이 백인 공작’을 선보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기 스타더스트’와 ‘말라깽이 백인 공작’ </font></font>
약물 문제는 그를 점점 불안정하게 했다. 그는 이즈음 파시즘 옹호 발언으로 비난을 받는다. 에 따르면 그는 한 스웨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국이 파시스트 지도자에게서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파시스트 말이다. 진정한 국가주의로서의 파시즘은 공산주의의 순수한 형태다.”
그는 분위기 쇄신차 1976년 말 독일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베를린에서 그는 ‘베를린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최상의 앨범들, , (1977), (1979)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과거의 록과 미래의 일렉트로닉 음악 사이를 잇는 신경조직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1980년대 들어 그는 점점 다른 매체들 사이를 오가는 활동을 많이 했다. 1980년 그는 연극 의 신경섬유종 환자 주인공을 맡아 브로드웨이 등에서 공연했다. <bbc>에서 방송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 (1982), 카트린 드뇌브와 함께 출연한 영화 (1983)를 비롯해 일본 감독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1983)에 류이치 사카모토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주류 팝뮤지션으로서도 정점에 올라 1983년 앨범 가 상업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89년 솔로가 아닌 록밴드 ‘틴 머신’의 멤버로서 앨범을 발표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앨범 판매는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990년대를 통과하면서 그의 음악은 스웨이드, 나인 인치 네일스, 벡, 너바나 등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스며들었다. 1992년 보위는 소말리아 출신의 모델 이만과 결혼해 뉴욕에서 살았으며,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01년 9·11 테러 뒤 뉴욕시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4년 앨범 발매 뒤 독일에서의 마지막 투어 도중 그는 가슴 통증을 호소했고, 응급 혈관확장술을 받았다. 당분간 녹음과 투어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해 죽음의 그늘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행성에서의 마지막 몇 해를 보내는 동안 보위는 지금껏 그가 살아온 창조적 방식으로 ‘작별 선물’을 준비했다. 모두 그가 우아하게 은퇴를 했다고 여기고 있을 때였다. 오랜 공백을 깬 그의 마지막 두 앨범, (2013)와 (2016)는 1970년대 신기원을 열었던 ‘이세계’(異世界) 아티스트의 귀환을 알렸다. 2013년 로 그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톱10 히트에 올랐고, 2014년 브릿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는 시상식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수상자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삶처럼 작별도 창조적으로 </font></font>
죽음과 삶에 대한 갈망이 교차하는 는 그의 다른 어떤 앨범도 보여주지 못했던, 가장 두렵고 알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어떤 록 아티스트도 마지막 유언을 이런 식으로 남기지는 않았다.
이로사 객원기자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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