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때 서로 헤어진 쌍둥이 형제가 있다. 한 명은 유대인으로, 다른 한 명은 나치로 자라났다.’
‘바뀐 운명’에 대한 비극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란성쌍둥이 형제 잭 유피와 오스카 스토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운명의 장난 같은 이 냉혹한 ‘차이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비슷했던 이들의 ‘공통점’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1954년 어느 날, 유대인 청년 잭 유피는 서독 에센의 한 기차역에 내렸다.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다가왔다. 이상하게 친숙한 얼굴이었다. “뻔뻔스럽게도, 누군가 내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낸시 시걸, 2005) 후일 잭은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얼굴을 한 낯선 독일인, 오스카 스토는 그의 쌍둥이 형제였다. 오스카는 1933년 잭과 함께 베네수엘라 카리브해 앞바다의 섬나라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와 함께 독일로 떠났다.
이후 완전히 떨어져서 자란 형제는 극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다. 잭은 어린 시절을 트리니다드토바고와 베네수엘라에서 보냈고, 이스라엘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20대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디에이고로 이주했다.
반면 오스카는 어머니·외할머니와 함께 독일인 밀집 지역인 체코 수데텐 지방에서 자랐다. 그는 가톨릭교 세례를 받았고, 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조직에 가입했다. 전후엔 루르 지방에서 광부와 용접공으로 일했으며, 그곳에서 결혼해 자녀 2명을 두었다.
이들 형제는 1979년 잘 알려진 ‘미네소타 쌍생아 연구’의 피험자 중 하나가 되었다. ‘미네소타 쌍생아 연구’는 태어나자마자 분리돼 서로 다른 가정에서 양육된 쌍둥이들을 연구해, 인간 발달에 미치는 유전과 환경적 영향을 알아보는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연구 프로젝트였다.
종교, 언어, 가정 등이 판이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이들은 사소한 기질부터 성격적 특성까지 놀랄 정도로 유사점이 많았다. 둘 다 머리를 긁을 때 넷째 손가락을 사용한다거나, 공공장소에서 요란하게 재채기를 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걸 재미있어한다는 사실은, ‘유전’적 영향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형제는 곧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유명해졌다. 이들의 이야기는 1995년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쌍둥이 형제 중 홀로 남아 있던 잭 유피가 지난 11월9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위암으로 숨졌다. 향년 82. (오스카는 1997년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잭 유피는 1933년 1월16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는 1929년 이곳으로 이주한 유대계 루마니아인이었다. 이주 항해 중, 요제프는 같은 승객이던 독일 여성 엘리자베트 스토와 사랑에 빠졌다. 쌍둥이 형제가 세상에 나오고 6개월 뒤, 엘리자베트는 요제프의 계집질과 음주에 질려, 쌍둥이 둘 중 좀더 예민했던 오스카를 안고 독일로 돌아갔다.
오스카를 주로 키운 외할머니는 엄격한 가톨릭교도이자 규율주의자였다. 외할머니는 오스카의 성을 엄마 쪽 성인 ‘스토’로 바꾸게 했고, 그에게 가톨릭 세례를 받게 했다. 오스카가 ‘유대인’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절대 그 단어를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독일의 많은 아이들처럼 나치당이 만든 청소년 조직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했다.
그러는 동안,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잭은 나름대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흑인 인디언이 대부분인 곳에서 눈에 띄는 유대계 백인으로 지내면서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변기 물 내리는 방식도 같았던 두 사람 </font></font>7살 때 잭은 독일에 자신의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잭은 오스카에게 총검으로 찔려 죽는 악몽을 꾸곤 했다고 후일 고백했는데, 오스카 역시 공중전에서 잭을 격추시키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잭은 이처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15살 때 베네수엘라의 고모에게 보내지기 전까지는 그 정체성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고모는 악명 높은 다하우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고, 아버지 쪽 유럽계 가족 중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잭은 16살 때 고모의 권유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곳의 집단농장 키부츠에서 일했고, 이스라엘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미국인인 오너 허시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1954년 21살 때, 잭은 아버지가 정착해 있던 미국으로 향하기 전, 독일에 들러 쌍둥이 형제를 찾았다. 그러나 이들의 첫 상봉은 어색하기만 했다. 우선 언어의 벽이 높았다. 오스카는 당시 영어를 거의 못했고, 잭은 이디시어에 의존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가 신나치주의자였기 때문에, 오스카는 잭에게 그의 가방에 달린 이스라엘발 수하물 짐표를 떼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숨기라고 말했다. 일주일 뒤 그들은 싱겁게 헤어졌고, 이후 25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1979년 미국에 살고 있던 잭의 당시 아내는 주간지 에 실린 미네소타 쌍생아 연구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연구에 참여하라고 권했다. 당시 두 가족은 명절에 엽서를 보내는 정도의 연락만 하며 지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쌍둥이 형제에 대해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던 잭은 흥미를 느꼈다. “나는 우리가 중립지대에서 만나, 이 모든 숨겨진 감정들에 대한 결론을 내는 것이 어쩌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1979년 ) 그렇게 이들은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7번째 쌍둥이 피험자가 되었다.
1979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공항. 46살 잭이 오스카를 만났을 때, 그는 또다시 거울을 보는 듯한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두 남자는 똑같은 모양의 단정한 콧수염에, 각을 둥글린 직사각형의 금속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둘 다 견장 장식이 있고 군복풍 주머니가 달린 푸른 셔츠를 입었고, 벗어진 이마의 머리 선 모양도 똑같았다.
“우리는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는 독일에서 산 것이었다. 정확히 같은, 옅은 색깔의 투 버튼 재킷이었다.” 잭은 1999년 영국 <bbc>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나 똑같아 보인다는 사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옷차림만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책임자 토머스 부샤르 교수는 처음 이들을 보았을 때 형제가 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의자에 앉는 방식도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한 이들은 똑같이 성질이 급하고 경쟁심이 강했다. 이후 수년에 걸쳐 두 가족은 형제의 수많은 ‘사소하고 별난’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둘 다 버터와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화장실 변기를 이용하기 전에 먼저 물을 내렸다. 책을 읽을 때 결말부터 보았다. 펜을 손에 쥐는 느낌을 좋게 하기 위해 펜대에 테이프를 감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함에도 정확히 같은 빠르기로 말했다. 잭은 말했다. “나는 늘 초조해하는 내 버릇, 예컨대 고무줄이나 클립을 만지작대는 버릇이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오스카)도 똑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반발과 매혹 동시에 느끼며 경쟁하기도</font></font>
오스카가 죽기 전까지 이후 20년간, 형제는 가끔씩 서로를 방문하거나 함께 휴가를 보내며 지냈다. 조금씩 형제애 비슷한 것을 맺어갔으나 이들의 관계는 결코 편안해지지 않았다.
잭과 오스카는 공통적으로 경쟁적인 본성을 갖고 있었다. 가족들은 둘 사이의 경쟁이 멈추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두 남자는 더러운 자동차 유리를 닦는 데 누가 더 좋은 테크닉을 가졌는지 겨루거나, 휴가 때 누가 가장 좋은 호텔을 찾는지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다.
2005년 이들에 대한 책을 쓴 낸시 시걸 캘리포니아주립대 풀러턴 캠퍼스 교수는 “그들은 서로에 대해 반발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으며, 쌍둥이 관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la>)고 말했다.
잭은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화물차를 끌고 다니며 농부들에게 청바지와 부츠를 판매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궜다. 후일 자신의 상점을 열게 되었고, 80살까지 매일 일터에 나갔다. 오랜 세월 광산에서 일한 오스카는 1997년 폐암으로 숨졌다. 잭은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잭은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양육 환경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만약 우리가 서로 바뀌었다면, 물론 내가 오스카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라며 “그러나 나는 내가 다른 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기쁘다”(<la>)고 말했다.
이로사 객원기자·현대도시생활자
</la></la></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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