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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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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관통해 세상을 움직인 여인

1940년대 임차인 권리찾기 운동·차별 철폐 운동에 이어 1970년대 흑인 민권운동, 1990년대 '다음세대 운동'까지 끝없이 진화…100살 생일 지낸 뒤 평온하게 떠나
등록 2015-10-16 09:35 수정 2020-05-02 19: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하나의 일이 원인이 돼 다른 일이 생긴다. 그 일 때문에 또 다른 일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숱한 일이 얽히고설켜 삶을 이뤄낸다. 삶이 하나둘 모여 시대를 이루고, 그 시대를 역사가 기록한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의 와중에 태어나 세기를 바꿔 100년을 산 사람의 삶이라면, 그대로 역사라 부를 만하다.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1915년 6월27일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주 주도인 프로비던스의 중국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첫 울음을 터뜨린 곳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식당 2층의 살림집이었다. 중국 광둥성 출신인 보그스의 아버지 친 리는 19세기 말 미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편전쟁(1839~42년)에서 패한 청나라 정부는 영국에 배상금을 내기 위해 세금을 천정부지로 올렸다. 살인적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중국인 상당수가 나라 밖으로 이주했다. 친 리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마르크스에 심취한 중국계 이민자 2세

보그스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은 뉴욕으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보그스의 아버지는 맨해튼 중심가인 브로드웨이의 타임스스퀘어 근처에 새로 중식당을 크게 열었다. 뉴욕시 외곽 퀸스의 잭슨하이츠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보그스는 일찌감치 학업에서 성가를 올렸다. 불과 16살에 명문 버나드여대 철학과에 장학생으로 진학한 그는 스무 살 되던 해인 1935년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이어 펜실베이니아주의 브린마워여대로 학교를 옮긴 그는 1940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때의 일이다.

아시아계 이주민은 식당 종업원 자리조차 얻기 힘든 시절이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여성 박사다. 교수 자리가 쉽게 나기 어려운 요소를 두루 갖춘 셈이다. 진로를 찾지 못하던 그는 결국 교수직을 포기하고 시카고대학교 부설 철학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얼었다. 주급은 10달러, 시카고 시내에서 그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아파트 지하 셋방뿐이었다.

아파트 지하는 쥐로 들끓었다.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임차인 권리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같은 처지의 주민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계였다. 지역 흑인 공동체의 어려운 현실과 함께하던 보그스는 차별 철폐 운동에도 가담하게 됐다. 1941년 초 노동운동가 필립 랜돌프가 주도한 차별 철폐를 위한 워싱턴 행진의 대열에서 보그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난 외침이 거대한 울림으로 이어지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해 6월 ‘대통령령 제8802호’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국 내 모든 군수공장에서 인종에 따른 노동자 차별이 법으로 금지됐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1998년 펴낸 자서전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시민을 조직해 행동에 나서면,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처음 몸으로 느꼈다.”

학창 시절, 보그스는 칸트와 헤겔 철학에 심취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간 것은 자연스런 지적 여정이었다. 시카고에서 풀뿌리 운동을 체험하던 보그스는 현지를 방문한 사회주의 이론가 시릴 라이오넬 로버트 제임스를 만났다. 이후 그는 뉴욕으로 복귀해 제임스와 함께 인종과 빈곤 문제에 집중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외곽 조직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가 등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 상당수를 영어로 번역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50년대 초, 보그스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향했다. 사회주의 계열 신문에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전세계 자동차산업의 심장부였다. 제조업 노동자가 대거 몰려 있었으니, 젊은 사회주의자에겐 맞춤한 장소였을 터다. 그곳에서, 그가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 크라이슬러자동차 노동자이자, 사회주의 활동가인 제임스 보그스다. 남부 앨라배마주 출신인 제임스 보그스는 아프리카계였다.

맬컴 엑스의 ‘운동권 선배’

인종 간 결혼을 법으로 금지한 주가 여럿이던 시절이다. 디트로이트 시의원을 지낸 보그스의 오랜 친구 셰일라 코크렐은 10월5일 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엔 인종 간 결혼을 한 부부는 상시적인 폭력의 위협에 시달려야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1953년 결혼했다. 미 대법원이 ‘러빙 대 버지니아주 사건’을 통해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주법을 위헌이라고 판시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뒤인 1968년의 일이다.

격동의 1960년대가 다가왔다. 보그스 부부는 디트로이트를 무대로 흑인 민권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29년 태어난 마틴 루서 킹 목사는 1968년 서른아홉 나이에 암살됐다. 킹 목사와 함께 미국 민권운동계의 양대 산맥으로 통하는 맬컴 엑스는 1925년 태어났다. 그 역시 마흔 살 생일을 맞지 못하고 1965년 암살됐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디트로이트에서 거리행진을 계획했을 때, 그 배후에서 집회를 조직한 것도 보그스 부부였다. 맬컴 엑스는 디트로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보그스의 집에서 묵곤 했다. 부부는 두 사람의 ‘운동권 선배’였던 셈이다.

그 시절 미 연방수사국(FBI)은 내놓고 ‘운동권’ 인사들을 사찰했다. 정보를 캐내려는 목적이 전부가 아니었다. 감시를 통한 위협, 이른바 ‘얼음 효과’를 노린 게다. 보그스 부부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보그스는 1998년 펴낸 자서전에서 “그 시절 남편은 우리를 감시하는 정보요원들을 ‘덜떨어진 아이’ 취급했다”고 전했다.

“정보요원은 무시로 우리 집을 찾았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 ‘쿠클럭스클랜’(KKK)의 폭력에 맞서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무장 저항을 주도했던 맥스 스탠퍼드나 로버트 윌리엄스 같은 흑인 활동가들의 행방을 묻고는 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난 경찰의 정보원이 아니다’는 말로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러곤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불법적인 지시를 무조건 따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엄히 꾸짖었다. 그런 다음엔, ‘다음번에 집회에 나와 내 연설을 들으면, 후버의 압제에 맞서기 위한 투쟁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곤 했다.”

부부는 1970년대 초반 란 책을 함께 펴내기도 했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벌어진 온갖 다른 형태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과 함께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운동 방식을 역사적으로 추적한 내용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보그스 부부는 ‘환경정의를 위한 디트로이트 시민 모임’을 꾸리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0대년 중반엔 만연한 길거리 폭력과 총기 사건을 막기 위한 시민사회 연대체 ‘우리 아들딸 구하기 연합’의 결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 미국 자동차산업의 부침과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든 디트로이트의 현실을 짚는 수많은 글을 써냈다.

70대를 넘긴 보그스 부부가 특히 힘을 쏟은 건 ‘다음 세대 운동가’ 교육이었다. 1992년 시작된 청년 프로그램 ‘디트로이트 서머’는 이런 노력의 총화다. 올해로 14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행사에는 미 전역에서 젊은이들이 몰린다. 행사 참가자들은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집을 고치고, 벽화를 그리고, 빈 땅을 공동체 텃발으로 일구고, 축제를 벌인다. 제임스 보그스는 1993년 숨졌다.

만년의 보그스는 헤겔의 저작과 3D 프린팅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또 ‘새로운 경제’ 개념에 골몰했다. 그는 2014년 7월15일 대안매체 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지역 공동체에서 일하고, 지역 공동체를 더 나은 방식으로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새로운 경제”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한국계 영화감독 그레이스 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에서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낡은 이상에 얽매이지 마세요.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현실에 맞게 여러분의 이상도 바꿔야 합니다.”

“낡은 이상에 얽매이지 마세요”

지난 6월27일, 디트로이트의 ‘찰스 라이트 기념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에서 보그스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거동이 불편해진 보그스는 참석하지 못했다. 10월5일, 그는 여느 날처럼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인권변호사 앨리스 제닝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이상한 낌새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보그스는 아침 식사를 하기 전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그리고 잠이 든 채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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