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2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27일이었다. 그날 해 질 녘 영국 런던 중심가에 자리한 <bbc> 공개홀은 방청객으로 가득 찼다. 그 무렵 영국인들의 무료한 주말 저녁을 책임지던 (That’s Life) 녹화가 한창이었다. 방청석 맨 앞줄에 두툼한 돋보기를 쓴 정장 차림의 노인이 눈에 띈다. 진행자인 에스터 렌첸이 말을 이어간다.
“관련된 편지가 전부 다 여기 있고요. 이 끝 부분을 보시면, 해당 어린이 명단 전체가 있습니다. ‘베라 디어먼트’도 있네요. 지금은 베라 기싱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저희가 베라를 찾아냈습니다.” 렌첸의 말에 방청석 앞줄, 검은색 드레스에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목에 두른 여성이 안절부절못한다. 곁에 앉은 노인은 두 손을 모아 깎지 낀 채로 턱을 받치고 있다. “안녕하세요, 베라. 이제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지금 당신 곁에 앉아 있는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낮에는 주식 중개인, 밤에는 어린이 수송작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긴장해 있던 베라가 노인의 손을 부여잡았다. 당황한 노인은 말을 잇지 못한다. 베라가 그를 끌어안았다. 노인이 눈가의 물기를 닦아낸다. 잔잔한 박수 소리가 공개홀에 메아리친다. 1928년 4월7일 체코슬로바키아(이하 체코)에서 태어나 환갑의 나이가 된 베라 기싱이 이날 만난 노인은 니컬러스 윈턴(당시 79살·사진)이다.
윈턴은 1909년 5월19일 영국 런던 햄프스테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태 전 독일에서 이주해온 유대계인 그의 부모는 영국 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베어타이머’란 독일식 성씨를 ‘윈턴’으로 바꾼 것은 1938년의 일이다. 은행 간부이던 부친을 따라 일찌감치 은행 일을 배운 윈턴은 고교 졸업도 하기 전 본격적으로 금융계에 뛰어들었다.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1931년 귀국해 런던 증시에서 주식 중개인 생활을 시작했다.
20대의 윈턴은 심장이 뜨거웠다. 젊은 사회주의자가 참견할 일이 많은 시대였다. 1935년 9월15일 열린 나치 당대회에서 이른바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됐다. 유대계 주민의 시민권과 재산권 등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윈턴 집안엔 독일에서 피란 온 친척과 친지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운명의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1938년 3월13일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군중의 환호 속에 빈에 입성했다. 같은 해 9월 뮌헨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사겠다”고 강조했다. 독일계 주민이 몰려 사는 체코 서부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겨주는 내용을 뼈대로 한 ‘뮌헨협정’이 체결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약 1만7천여 명의 ‘무국적 유대인’이 독일에서 폴란드로 추방됐다.
같은 해 11월7일 폴란드계 유대인 청년이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인 외교관을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크리스탈나흐트’, 깨진 유리 조각의 밤이 닥쳐왔다.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사주를 받은 ‘돌격대’가 유대인을 겨냥한 무한폭력을 휘둘렀다. 국경을 넘는 유대계 난민 행렬이 봇물을 이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휴가철을 맞아 스위스로 스키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던 윈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체코에서 유대계 난민 지원활동을 하는 친구 마틴 블레이크였다. “니키(윈턴의 애칭), 여기 정말 재밌는 일이 있는데, 자네가 와서 날 좀 도와줘야겠어. 참, 스키 장비는 갖고 올 필요 없고.”
5개월 동안 7차례 669명의 어린이 구출
29살 윈턴이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1938년 12월31일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수데텐란트에서 피란 온 유대계 난민은 줄잡아 25만 명을 넘어섰다. 대부분은 출국길이 막힌 채, 한겨울의 추위를 천막에서 받아내고 있었다. 블레이크의 안내로 난민캠프를 둘러보던 윈턴의 눈에 아이들이 박혔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진 게다.
윈턴은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머물던 호텔 방에 간이 사무실을 차리고, 어린이들의 신상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주 뒤 그는 귀국길에 올랐다. 블레이크가 소속된 ‘체코 난민 지원을 위한 영국위원회’의 ‘어린이 지부’ 사무실이 그의 집에 차려졌다. 윈턴의 모친과 비서, 몇몇 자원활동가가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한다. 이른바 ‘킨더 트랜스포트’(어린이 수송) 작전이다.
히틀러의 군홧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윈턴은 낮엔 증시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밤늦도록 서류작업에 몰두했다. 영국 내무부는 아이들을 입국시키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입양할 가정과 귀국예치금 50파운드(현재 환율로 약 300만원)다. 신문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유대계 가정은 물론 개신교와 퀘이커 교도 등이 앞다퉈 입양 의사를 밝혀왔다. 당시 영국 유대교 최고위 랍비이던 조지프 허츠가 “유대인 어린이를 이교도 집안에 맡길 수 없다”고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윈턴은 허츠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하던 일 계속 하세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죽은 유대인 아이보다 산 개신교 아이가 나아요.”
1939년 3월14일 항공기를 이용한 첫 번째 구출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해 8월23일까지 5개월 동안 7차례에 걸쳐 모두 669명의 어린이가 기차와 선박편으로 프라하에서 런던으로 건너왔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재촉하는 윈턴에게 영국 내무부는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어깃장을 놨다.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데려와야 했다. 그해 9월3일, 최대 규모의 수송작전이 준비됐다. 그날 새벽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국경은 봉쇄됐다. 모두 250명의 아이들이 프라하에서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출발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아이들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체코에 남아 있던 유대계 어린이 1만5천여 명 대부분은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희생됐다.
같은 날, 인류 역사상 두 번째 세계전쟁도 시작됐다. 개전 초기 ‘양심’에 따라 총 들기를 거부한 윈턴은 적십자 소속으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구급차를 몰기도 했다. 그는 전쟁이 길어지자, 마음을 바꿔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은 만 6년과 하루가 지난 뒤인 1945년 9월2일 끝났다. 종전 뒤 윈턴은 국제난민기구(IRO·유엔난민기구 전신)를 거쳐, 1948년부터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덴마크 여성 그레테 기예스트로프를 만났다. 곧 결혼한 두 사람은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서부의 소도시 메이든헤드에 정착했다.
유럽 전역을 떠돌던 윈턴의 삶도 평온해졌다. 1954년 메이든헤드 시장 선거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지만, 지역 노인요양원 지원 등 주로 자선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운증후군을 앓던 막내아들 로빈이 6살 무렵 뇌막염으로 숨지는 아픔을 겪은 뒤에는 지적장애 어린이 지원사업에도 열심이었다.
1987년 말 어느 날, 다락방을 정리하던 그레테는 먼지가 쌓인 낡은 스크랩북을 발견했다. 모두 669명의 어린이 신상정보와 사진이 빼곡했다. 윈턴은 반세기 전에 있었던 일을 부인에게 털어놨다. ‘영국판 쉰들러’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11월21일 <b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후엔 노인·어린이 지원사업 열심
“난 영웅이 아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그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 아이들을 구했냐고? ‘윤리의식’ 때문이지. 선량함, 자비로움, 주변 사람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삶의 기준이었다. …내가 구한 아이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축은 나중에 내 브리지(카드게임의 일종) 파트너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다 다 세상을 떠났다. 죽는 게 두렵냐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은 뒤에도 뭔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난 이미 오래전에 종교를 떠났고,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니컬러스 윈턴은 지난 7월1일 호흡기 감염 등으로 치료 중이던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딸 바버라와 손자 2명이 임종을 지켰다. 은 그가 구해낸 669명의 자손은 줄잡아 6천여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향년 106.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bbc></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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