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향수의 나라’ 사로잡는 향기

⑩ 안정 대신 도전을 택한 윤용섭씨가 브라질에서
향수 사업으로 일구는 향긋한 꿈과 삶
등록 2014-12-24 17:42 수정 2020-05-03 04:27

향수는 욕망을 품은 한 줄기 바람이다. 향수는 바람처럼 흩어지는 찰나의 추억이다. 후각을 스치는 한순간을 잡아 붙들고 그 안에 영원을 가두려는 염원이기도 하다. 영어로 향수를 뜻하는 ‘perfume’은 ‘연기(fume)로 통한다(per)’는 뜻이다. 고대인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향나무를 태운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세계에서 향수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브라질은 2010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향수 시장으로 부상했다. 영국 런던에 소재한 국제적 시장조사기관 ‘민텔’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브라질 향수 시장은 2009년 이후 5년간 연평균 13.6%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민텔의 보고서에 따르면 브라질 소비자의 90%가 향수를 소유하고 있으며 84%가 수시로 뿌리고 있다고 답변했다.

윤용섭 사장은 세계 최대의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 ‘향기 마케팅’ 사업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실내 향기 관리 업체인 ‘비오미스트’와 향수 제조 업체인 ‘솔리스’를 운영하면서 각각 연간 110만달러와 9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윤 사장이 상파울루 남쪽 25km 지점의 지아데마에 있는 솔리스 공장에서 샘플 검사를 하는 직원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박상주

윤용섭 사장은 세계 최대의 향수 시장인 브라질에 ‘향기 마케팅’ 사업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실내 향기 관리 업체인 ‘비오미스트’와 향수 제조 업체인 ‘솔리스’를 운영하면서 각각 연간 110만달러와 9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윤 사장이 상파울루 남쪽 25km 지점의 지아데마에 있는 솔리스 공장에서 샘플 검사를 하는 직원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박상주

윤용섭(53) 사장은 ‘향수의 나라’ 브라질에서 향수 사업을 하는 인물이다. 윤 사장은 사무실과 매장에 주기적으로 향기를 뿜어주는 향 분사 비즈니스와 업체 고유의 향기를 개발하고 관리해주는 ‘향기 마케팅’ 사업을 브라질에 처음 도입했다. 실내 향기 관리 업체인 ‘비오미스트’와 향수 제조 업체인 ‘솔리스’를 운영하면서 각각 연간 110만달러와 9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00년 8월 문을 연 비오미스트는 호텔과 의류매장, 쇼핑센터, 헬스클럽, 보석점, 미용실 등 브라질 전역 1500여 개 업소의 실내 향기를 관리하고 있다. 비오미스트에서 취급하는 제품을 직접 만들기 위해 2010년 3월 세운 솔리스는 향수 4종과 홈스프레이 등 총 125개 품목을 생산하고 있다.

세계 최대 향수 시장으로 부상

윤 사장을 만난 곳은 상파울루의 알부자들이 사는 이지에노폴리스의 고급 쇼핑몰 ‘이지에노폴리스 파티오’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 명동 입구 롯데백화점이나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쯤에 해당하는 곳이다. 윤 사장은 182cm의 훤칠한 키에 중후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으며 그가 안내한 곳은 나이키 매장이었다. 매장 입구에서부터 싱그러운 풀잎 향기가 확 풍겨왔다. 윤 사장은 나이키 매장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매장 벽에 부착된 향 분사기들을 점검했다. 일정한 시간마다 향을 뿜어주는 자동분사기였다. 분사기 뚜껑을 열고 길쭉한 병 모양의 컨테이너를 꺼내 남은 향의 양을 확인하면서 윤 사장이 입을 열었다.

“브라질 전역에 있는 33개 나이키 매장의 향기 관리를 우리 회사가 하고 있습니다. 나이키의 브랜드 향은 푸른 초원을 연상시키는 그린 노트(Green Note)와 파도치는 푸른 바다 분위기의 아쿠아(Aqua) 계열을 배합한 것입니다. 2006년 비오미스트에서 나이키의 향기 마케팅을 위해 개발한 향이지요. 스포츠용품 전문 브랜드인 나이키의 역동적 이미지에 어울리는 향입니다. 브라질 전역의 나이키 매장에서 똑같은 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고객들은 나이키 하면 무의식중에 저희 비오미스트에서 서비스하는 냄새를 연상하게 되는 거지요.”

현대 마케팅은 소비자의 오감을 유혹하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지름신’은 이성보다는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 등 오감을 통해 강림한다. 미국 시카고의 ‘후각미각치료연구재단’ 설립자인 앨런 허시 박사는 향기와 특정 제품의 선호도를 연구했다. 허시 박사는 똑같은 나이키 운동화를 동일한 크기의 방에 준비한 뒤 그중 한 방에만 은은한 꽃향기를 주입했다. 실험 참가자들 중 84%가 꽃향기 나는 방에서 살펴본 나이키 운동화를 더 선호했다. 허시 박사는 또한 라스베이거스 한 카지노의 슬롯머신 주변에 기분 좋은 향수를 뿌렸더니 베팅 액수가 그 전보다 45% 늘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주변에 향수를 뿌린 슬롯머신과 그렇지 않은 슬롯머신을 비교해보니 향수를 뿌린 쪽의 고객이 30% 정도 더 오래 머물렀다.

맨 마지막으로 걸치는 패션

“2000년에 브라질 최초로 향기 마케팅 사업을 시작했어요. 업체 사장들을 찾아다니며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향기를 매장에 뿌리면 매출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브라질 사람들은 향기 마케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죠. 처음 6~7년간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큰 기업들이 입질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나이키 매장 이외에 여성 구두와 속옷 가게 등 자신의 다른 고객 매장 4~5곳을 둘러본 뒤에야 윤 사장은 이지에노폴리스 파티오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쇼핑몰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신사복 매장이었다. 브라질 중산층 남성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복 브랜드 ‘빌라 호마나’(Vila Romana) 매장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분 좋은 머스크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매장의 한가운데 위치한 탁자 위에는 남성 화장품으로 보이는 작은 박스들이 진열돼 있었다. 윤 사장이 그중 하나를 집어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빌라 호마나의 브랜드 향수인 ‘빌라53’입니다. 오리엔탈 계열의 머스크 향을 이용해 남성의 중후함과 세련미를 살린 향수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만들어 빌라 호마나에 납품하고 있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제품입니다. 빌라53은 저희가 만든 최초의 향수예요.”

윤 사장이 향수 제조업에 진출하게 된 계기는 바로 빌라 호마나 때문이다. 2009년 7월쯤이었을까. 향기 관리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던 빌라 호마나의 펠리피 사장이 윤 사장을 보자고 했다. 펠리피 사장은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했다. 빌라 호마나에서 향수 제품을 론칭하려고 하니 OEM으로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욕심이 생겼다. “브라질의 향수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큽니다. 향수 제조업은 지속가능성이 있는 분야인 만큼 한번 뛰어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향수 회사를 찾아다니며 외주로 제작할 여건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직접 향수 공장을 차리기로 결정한 거지요.”

향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다. 향수는 맨 마지막으로 걸치는 패션이다. 세계적인 향수들이 하나같이 세계적인 패션기업에서 나오는 이유다. 영국의 버버리나 프랑스의 샤넬과 디올, 이탈리아의 아르마니와 구치, 미국의 캘빈클라인과 랠프로런 등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들은 명품 향수를 함께 생산한다. OEM 방식으로 ‘빌라53’ 출시에 성공한 윤 사장은 브라질의 패션 브랜드들 역시 자체 브랜드의 향수를 하나쯤 출시하고 싶을 거라고 판단했다. 윤 사장은 빌라 호마나의 성공 사례를 앞세워 다른 남성복 브랜드를 공략했다. 자신의 브랜드 특성에 맞는 향기를 개발하면 브랜드의 이미지도 높아지고 고객의 충성도도 높아지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설득했다. 2012년 한 해 동안 ‘헤모 페누치’와 ‘피스코치’ ‘비글’ 등 3개 남성복 브랜드 회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 중 비글은 그해 2천 병을 납품하고는 추가 주문이 없었지만, 헤모 페누치와 피스코치는 해마다 4천 병씩 주문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철밥통을 깨고 나와

아름다운 향수를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Das Parfum)는 최고의 향수를 얻기 위해 연쇄살인마저 불사하는 인간의 악마적 탐미를 그리고 있다. 윤 사장은 브라질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향수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상파울루의 한인타운인 봉헤치로에 사는 윤 사장의 아침 출근길에 동행했다. 윤 사장의 향기 마케팅 회사인 비오미스트와 향수 공장인 솔리스는 상파울루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지아데마의 동 페드로 프리메로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동 페드로 프리메로는 중소 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한적한 거리였다. 윤 사장의 차가 작은 삼거리 코너를 끼고 들어서 있는 반듯한 2층 건물 앞에 멈춰섰다. 윤 사장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꽃밭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 좋은 향기가 밀려왔다.

“모닝 오브 스프링이란 이름의 향입니다. 이른 아침 숲 속의 옹달샘가에서 맑은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봄꽃을 연상시키는 향기입니다. 새롭게 도약하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해요.”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 있던 아리따운 아가씨가 활짝 웃는 얼굴로 ‘봉지아’(‘좋은 아침’이란 뜻의 포르투갈어 아침 인사)라고 인사를 한다. 윤 사장의 안내로 솔리스의 향수 생산 공정을 둘러보기로 했다. 공장 입구에서 머리와 발에 방진 덮개를 착용한 뒤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수십 종의 향수 원액을 담은 유리 용기가 테이블과 벽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윤 사장은 무슨 사연으로 먼 브라질까지 와서 살게 됐을까. 하고많은 사업 중에 향기 비즈니스에 손대게 된 계기는 뭘까. 공장 견학을 마친 뒤 2층에 있는 윤 사장의 방에서 그 사연을 들었다. 방 한가운데 큼지막한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는 솔리스에서 생산하는 각종 향수와 홈스프레이 제품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방을 꾸미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채로운 디자인의 향수병들이 훌륭한 장식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윤 사장이 향긋한 국화차를 내온다.

윤 사장은 한국외대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했다. 1987년 2월 졸업과 함께 들어간 첫 직장은 현재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해외무대를 경험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도 윤 사장은 2년 남짓한 재직 기간에 직장 동료였던 지금의 아내 이재송 여사를 만났다. 1989년 4월 윤 사장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로 이직한다. 그가 원했던 대로 KOTRA는 전세계를 누비며 일하는 곳이었다. 1991년 7월 포르투갈 리스본대학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1994년 4월 칠레 산티아고로 발령받아 첫 해외근무를 시작했다. 윤 사장은 산티아고 3년 임기를 마치기 전인 1995년 7월 마침내 브라질 땅을 밟게 된다.

“해외무역관에서 제 임무는 그 나라의 시장 동향과 수출입 규제, 관세 변화 등을 살펴 리포트를 작성하고, 브라질과 교역하려는 한국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수출길을 열어주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산티아고·상파울루 등 해외 근무지를 돌며 일하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막상 해외근무를 하다보니 갈수록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라는 무력감이 들었다. 특히 브라질 시장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이 중소기업에 제공하는 정보가 전문적 지식이 결여된 수박 겉 핥기 식일 뿐이라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생을 이대로 철밥통 직장에 감사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인가. 고민 끝에 윤 사장은 1997년 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다. 당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하에서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였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

“브라질은 원초적 에너지가 꿈틀대는 땅입니다. 국토와 인구가 모두 세계 5위에 올라 있는 대국이지요. 남한 면적의 86배에 해당하는 851만여㎢의 광대한 영토에는 금·철광석·석유 등 광물자원이 무진장 묻혀 있어요. 아마존강 유역은 ‘세계의 허파’라고 불리는 광대한 삼림자원입니다. 무엇보다 저의 관심을 끈 건 2억여 인구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시장이었어요. 브라질 땅에는 맨주먹으로 시작하더라도 뭔가 일궈낼 것 같은 풍요로움이 있어요.”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들은 독특한 문화와 함께 고유의 향기를 품고 있다. 런던에서 부는 바람엔 버버리나 비비안 웨스트우드 향수의 냄새가 섞여 있다. 파리의 바람엔 샤넬과 디오르의 향기가 담겨 있고, 밀라노나 피렌체엔 아르마니와 구치, 프라다의 바람이 분다. 윤 사장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향수로 상파울루 거리를 향기롭게 만드는 날을 꿈꾼다. 향기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박상주 자유기고가

*‘박상주의 남미 만인보’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