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끊임없이 신천지를 찾아헤맨다. 아메리카 대륙은 태곳적부터 숱한 사람들에게 엘도라도의 땅이었다. 빙하기 시절 아시아 대륙에서 살던 몽골족들은 꽁꽁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황금빛 태양이 빛나는 땅을 찾아 수만km를 걸어 중남미까지 왔다. 그로부터 1만5천여 년이 흐른 15세기 말엽부터는 서양 사람들이 배를 타고 황금을 찾아 신대륙으로 몰려들었다. 1492년 10월12일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가 핀타호와 니냐호, 산타마리아호 등 범선 세 척을 이끌고 카리브해의 그림 같은 섬들에 도착했다. 바하마제도의 구아나하니섬을 시작으로 지금의 도미니카와 아이티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에스파뇰라섬, 현재의 쿠바인 산토도밍고후아나를 차례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온 정복자‘카리브해의 전력왕’으로 자리매김한 최상민(37) ESD 사장은 달랐다. 비행기를 타고 왔다. 1993년 5월 17살이던 최 사장은 부모님과 15살 동생과 함께 도미니카 산토도밍고 라스 아메리카스 공항에 발을 디뎠다. 까마득한 빙하시대에 이곳까지 걸어서 온 선조들이나 배를 타고 온 스페인 정복자들처럼 최 사장네 가족도 자신들의 ‘엘도라도’를 찾아 도미니카까지 찾아온 것이다.
올해로 도미니카 이민 21년째에 접어든 최 사장은 실제 에스파뇰라섬에 멋진 엘도라도를 건설하고 있었다. 최 사장의 ESD는 도미니카와 아이티를 무대로 발전소 건설과 운영, 전력 판매, 발전설비 부품 판매, 배전망, 태양광발전 사업 등을 벌이며 연간 35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현재 아이티에 4곳, 도미니카에 1곳씩 발전소를 관리·운영하고 있다. 산토도밍고에 있는 본사 직원 200여 명과 아이티 현장 직원 150여 명 등 모두 3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탄탄한 중견기업이다. 최 사장은 의료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건강검진센터 건립을 위해 산토도밍고 시내 한복판인 27번가에 3400㎡의 부지를 확보하고, 한국에서 의료장비를 들여오고 있다. 전력사업으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공익 차원의 사업이기도 하다.
산토도밍고 제2의 국제공항인 이사벨라 공항의 드넓은 주기장에 앙증맞은 6인승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쯤 최 사장이 이사벨라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웃 아이티공화국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로 급히 출장을 떠나는 길이다. 1시간여 만에 도착한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공항에는 ESD 직원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10여 분쯤 달렸을까.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쳐진 건물이 나타났다. 아이티 총리 공관이었다. 삼엄한 몸수색을 거친 뒤 공관 안으로 들어섰다. 일국의 총리 비서실장 방치고는 작고 소박했다. 방 한가운데 그리 크지 않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 5~6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작은 원탁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시원하게 배코를 친 머리를 한 인텔리풍의 물라토(흑백혼혈)와 순박한 시골 아저씨처럼 생긴 흑인 1명이 방으로 들어서는 최 사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로랑 라모트 아이티 총리의 비서실장인 살림 수칼과 전력청 부청장인 라파엘 두켄스였다. 최 사장이 원탁 테이블에 합류하자 수칼 실장이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수칼 실장, “오늘 이 자리는 ESD와 아이티 전력청 간 전력 공급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ESD는 아이티 남부에 있는 제레미와 서부의 라고나브섬에 전기를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이달 초 계약서에 서명했어야 하는데 부활절 휴가 기간이 끼어 있어 늦어졌습니다”.
두켄스 부청장, “이 자리에는 진 모로스 전력청장이 나오셔야 하는데 해외 출장 중이어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제레미와 라고나브 지역 주민들은 현재 하루 4시간밖에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운데 냉장고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ESD 덕분에 제레미 주민 10만 명과 라고나브섬 주민 4만 명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두 지역에서 ESD가 배전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이티 전체 전력 사용량의 35% 생산최 사장, “주민들 불편을 덜어드리도록 최대한 빨리 공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전력청이 지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과 두켄스 부청장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2004년 11월 발전기 및 발전기 부품 판매 사업으로 출발한 ESD가 전기를 생산하고 판매까지 하는 전력회사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한국전력처럼 발전과 배전을 담당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불과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만들어낸 쾌거였다.
총리 공관을 빠져나온 최 사장이 다시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차가 멈춰선 곳 역시 총리 공관처럼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총을 든 경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담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편으로 높은 송전탑과 대형 컨테이너가 줄지어 서 있었고, 가운데 쪽으로 둥그런 유류저장탱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으로 조금 들어서자 ‘웅웅’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ESD가 운영 및 관리를 맡고 있는 포르토프랭스 카프2 발전소였다.
그런데 발전소라고 하기엔 구석구석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널찍한 정원은 곱게 손질된 파란 잔디로 덮여 있었다. 20개의 컨테이너는 밝은 녹색으로 통일돼 있었고, 유류저장탱크에는 분홍색·하얀색·검은색 등 저마다 다른 페인트칠이 돼 있었다. 발전소라기보다 알록달록 예쁜 조형예술물을 보는 듯했다. 발전소 오른편으로 아담한 단층짜리 사무동 건물이 있었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직원들이 오랜 친구를 반기듯 스스럼없이 최 사장을 맞이한다. 잠깐 사무실에 앉아 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최 사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회사는 지금 아이티의 발전소 4곳을 운영·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어요. 포르토프랭스의 카프2 발전소와 중부 고나이브 발전소, 북부 캡헤이션 발전소 3곳은 베네수엘라 석유공사와 아이티 정부기관인 모네티사시옹(Monetisation)의 합작회사 소유로 돼 있어요. 나머지 1곳은 미국 국무부 원조로 지은 아이티 북부 카라콜 섬유공단 발전소입니다. 이들 발전소에서 아이티공화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35%를 생산하고 있어요. 카프2 발전소는 그중 가장 많은 34MW의 전력을 생산하고 고나이브 발전소와 캡헤이션 발전소에서는 각각 13.6MW씩 전력을 생산하고 있어요. ESD는 3곳의 발전소 운영을 통해서만 연간 1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제까지 발전소의 운영·관리만 했습니다. 전력 생산과 공급의 주체는 아이티 전력청이었지요. 하지만 조금 전 총리 공관에서 제레미와 라고나브 지역 전력 공급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ESD는 전력 생산에서 배전, 전기요금 수납까지 일괄적으로 운영하는 전력회사로 도약하게 된 거지요.”
일주일 만에 죽어 있던 발전소 엔진 살려내그런데 최 사장은 무슨 연으로 카리브 해안의 섬나라인 아이티의 발전소를 관리·운영하게 됐을까. 무슨 재주로 아이티 정부로부터 전력 공급 사업까지 떠맡는 위치에 올랐을까.
“저기 창문 밖을 보세요. 아이티와 베네수엘라, 쿠바 국기가 게양대에서 나란히 펄럭이고 있지요. 저희가 운영하는 3개의 발전소는 세 나라가 협력해 건설한 겁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원조해준 석유를 팔아 발전소 건설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쿠바에서는 발전소 건설과 운영을 맡았고요. 그때 쿠바 전력청이 발전소 엔진으로 채택한 제품이 바로 H중공업의 ‘힘센 엔진’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터졌습니다. 2009년 8월 북부 캡헤이션 발전소의 엔진 8대가 모두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아이티 북부지방에 전기 공급이 전면 중단되는 대형 사고였어요. 발전소 가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을 때였지요. 5일 동안 전기가 끊기자 주민들이 들고일어났어요. 화들짝 놀란 르네 프레발 당시 아이티 대통령이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지요. 그 자리에 H중공업 관계자 두 분도 호출을 당했습니다. 저는 H중공업 관계자들의 통역으로 참석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ESD는 H중공업 발전기 부품을 파는 회사였거든요.”
아이티 대통령궁 각료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30여 명이 쫙 앉아 있더라고 했다. 회의를 주재한 프레발 대통령과 총리, 건설장관, 재무장관, 전력청장 등 아이티 각료들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대사와 쿠바 대사, 쿠바 전력청장 등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하나같이 거물급이었다. 대책 없는 갑론을박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쿠바 쪽 사람들은 H중공업의 발전기 탓을 했단다. 엔진 불량으로 가동이 중단됐다는 얘기다. 최 사장은 이때 오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쿠바 사람들이 발전소 유지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폭탄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해결해보겠다, 8일만 기한을 달라, 복구해보겠다, 그랬더니 라파엘 전력청장이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믿고 맡겨달라고 했지요.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당돌한 제안이었어요.” H중공업 사람들은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몰랐단다. 나중에 회의장에서 나와 이야기를 했더니 펄쩍 뛴 건 당연한 결과다.
최 사장의 회사 기술진이 들어가서 일주일 만에 죽어 있던 엔진 8대를 모두 살려냈다. 예상한 대로 엔진에 큰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해줘야 하는 부품을 교체해주지 않았거나 볼트나 너트 등을 조이지 않아서 발생한 고장이었을 뿐이다.
때론 계약서 위에 찍는 도장보다 눈도장이 더 확실한 보증 역할을 해준다. 종이에 찍는 도장은 종종 부도를 내지만 눈도장은 약발이 오래 지속되는 신용장 역할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아이티와 쿠바, 베네수엘라 세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끙끙거리던 고민거리를 한 방에 해결한 최 사장은 아이티 정부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게 된다. 아이티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나라는 베네수엘라다. 현찰로 원조하는 게 아니라 석유를 현물로 준다.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에서 원조해주는 석유를 팔아서 현찰로 만들고, 그 돈을 어디에 쓸지 기획하고 배분하는 기구를 두고 있는데, 아이티 해외원조금 기획 배분처라고 할 수 있는 모네티사시옹이 그 주인공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금맥보다 더 귀한 인맥"저희가 캡헤이션 발전소 복구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며칠이 지났을 때였어요. 베네수엘라 석유공사 관계자가 저를 조용히 보자고 하더라고요. 쿠바 전력청이 운영하는 3개 발전소를 저희가 맡아서 운영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9월15일부터 발전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돈 받을 기약도 없이 일부터 시작한 거지요. 다행히 두 달 반 만인 11월30일 아이티 모네티사시옹에서 정식 계약을 하자며 연락을 해왔습니다. ESD가 수도인 이곳 포르토프랭스 발전소와 중부 고나이브 발전소, 북부 캡헤이션 발전소 등 3개 발전소의 운영과 유지, 보수를 맡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 거지요. 그 전까지는 발전기 부속품을 팔기만 하던 입장에서 발전소를 관리·운영하는 기업으로 한 단계 도약했지요.”
산토도밍고 다운타운 서쪽에 위치한 엘미종 지역은 아파트와 주택, 오피스 빌딩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그 한가운데 지은 지 얼마 돼 보이지 않는 5층짜리 말끔한 빌딩 하나가 넉넉한 마당을 안고 들어서 있었다. 대지 1천㎡에 건평 375㎡인 이 건물은 최 사장이 중남미 최고 기업의 꿈을 키우고 있는 ESD 사옥이었다. 최 사장의 방은 3층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느 사장실처럼 큼지막한 책상 하나와 회의용 테이블, 책장이 놓여 있었다. 창틀에 진열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최 사장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최 사장이 무슨 연유로 클린턴 부부와 사진을 찍었을까. 최 사장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2013년 7월 아이티 북부 카라콜 섬유공단 내 발전소 준공식 때 찍은 사진입니다. 클린턴 부부와 미국 대사, 미 국무부 산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 관계자, 도미니카와 아이티 전력청장 등이 함께했어요. 카라콜 섬유공단은 2010년 1월 대지진 이후 아이티 재건을 위해 USAID 자금으로 조성된 공단입니다. 우리나라 의류제조 회사도 여럿 입주해 있지요. 카라콜 공단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 공사를 ESD가 맡아 했습니다. 카라콜 공단 발전소 건설 입찰 당시 우리나라 대기업을 포함해 미국과 스페인 등 6개 업체가 경쟁을 벌였어요. 굴지의 국제적 기업들을 제치고 ESD가 공사를 수주했습니다. 공단 개소 예정일이 2013년 10월이었어요. 발전소는 기업들이 입주하기 두 달 전에는 완공돼야 했어요. 저희는 석 달 전인 7월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발전소 준공식 때 클린턴 부부가 와서 보고는 ‘뷰티풀’을 연발하더군요. 특히 힐러리 장관은 자기가 다녀본 발전소 중 가장 아름답다며 감탄했답니다.”
최 사장은 창틀과 벽에 진열해놓은 다른 사진 속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아이티의 르네 프레발 전 대통령과 로랑 라모트 총리, 진 모로스 전력청장, 르네 잔지므 에너지 장관, 마이클 레콥 모네티사시옹 사장, 살림 수칼 총리 비서실장, 페드로 카니노 주아이티 베네수엘라 대사, 안토니 카바로 USAID 에너지 정책담당관, 셀소 마란시니 도미니카 전력청장 등 아이티와 도미니카, 미국, 베네수엘라 등의 쟁쟁한 실력자들과 최 사장이 함께한 사진들이었다. ESD를 키워주고 있는 비옥한 인적 토양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금맥보다 더 귀중한 인맥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 하얀 백사장, 짙푸른 야자수최 사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도미니카가 자랑하는 세계적 휴양지인 푼타카나를 들렀다. 마이클 잭슨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자,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 정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는 휴양지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모시처럼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 해안에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짙푸른 야자수 등이 강렬한 색깔의 대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불던 바람이 이렇게 달콤하지 않았을까. 이곳이 정말로 엘도라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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