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나무들로 들어찬 완만한 구릉이 물결치듯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림 같은 집들이 숲 속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한눈에 중산층 이상의 부자들이 사는 아름다운 전원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브라질 수도 상파울루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인구 50만여 명의 빙예도라는 곳이다. 시내 한가운데 쇼핑센터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브라질 전역에 96개 체인점이 있는 대형마트 후시(Russi)였다. 차를 대기 위해 노상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반갑게도 귀에 익은 한국말 노래가 큰 소리로 울려퍼졌다. 우리나라 인기 걸그룹인 2NE1의 라는 노래였다.
새우깡·초코파이·봉봉주스…
주차장 입구엔 브라질어로 ‘사볼 다 코레아’(진정한 한국의 맛)라고 쓰인 큼지막한 휘장이 걸려 있고, 그 옆엔 태극기가 나란히 붙어 있다. 야외 조리대에서는 하얀 가운을 입은 한국인 요리사 2명이 불고기와 닭강정, 채소튀김을 만들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라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뒤 작은 컵에 담아 나눠주는 이도 있었다. 또 한 사람은 파랑·빨강·노랑 등 알록달록한 색깔의 음료를 고객들에게 따라주고 있었다. 우리나라 소주에 포도와 딸기, 오렌지 주스 등을 섞은 소주 칵테일이었다.
음식 이외에도 손님들의 눈을 끄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한쪽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프린터를 갖춰놓고 손님들의 이름을 한글로 타이핑해 프린트해주고 있었다. 손님의 이름을 한글 궁서체로 큼지막하게 타이핑하고 그 밑에 작은 활자로 알파벳 이름을 병기한 뒤 A4용지로 프린트해 나줘주고 있었다. 귀로 케이팝(K-Pop)을 들으며 행사장에 들어선 손님들에게 눈으로 한국 요리를 하는 과정을 보고 코로 맛있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 직접 맛을 보게 하고, 아름다운 한글까지 소개하는 공감각적인 이벤트였다.
5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시식행사장을 돌며 고객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고객들의 손이 어느 음식으로 더 가는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상파울루 인근의 대형마트를 돌며 ‘진정한 한국의 맛’ 행사를 벌이고 있는 하윤상(54) OG컴퍼니 사장이었다. 1994년 봉헤치로의 ‘오뚜기슈퍼’라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출발한 하 사장과 그의 부인 강승은(51)씨는 지난 20여 년 동안 우직하게 한국 식품을 브라질에 전하는 ‘케이푸드(K-Food)의 전도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OG컴퍼니는 라면과 소주, 고추장, 된장, 새우깡, 초코파이, 봉봉주스 등 1500여 종의 한국 제품을 브라질로 들여와 판매하는 식품 도·소매 기업으로 연간 800여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한 해 한국에서 브라질로 들여오는 한국 식품이 무려 200~250개 컨테이너 분량이다. 하 사장은 특히 포도와 오렌지, 커피의 나라인 브라질에 한국산 포도와 오렌지 주스, 커피믹스를 팔고 있는 수완가이기도 하다. 2011년 3월11일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엔 일본인 마켓을 한국 식품으로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동안 한국 음식 시식행사를 지켜보다가 하 사장과 함께 슈퍼마켓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토요일 오후 장을 보러온 쇼핑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사람들 눈에 가장 잘 띄는 입구 쪽에 한국산 과자와 음료수, 식품들이 빽빽하게 진열돼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파울루 외곽의 한적한 전원도시에서 번듯한 규모로 우리나라 식료품을 팔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조차 했다.
한국전쟁 반공포로와 농업이민단
“시식행사에서 고추장으로 버무린 닭강정을 먹어본 브라질 사람들이 고추장을 찾기 시작했어요. 맵고 단 것을 좋아하는 브라질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맛을 발견한 거지요. 시식행사를 통해 고추장 맛을 선보인 이후 500mg짜리 고추장의 매상이 부쩍 늘었습니다. 미역은 일본 사람들이 가끔 찾더라고요.”
한국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브라질의 외딴 도시에서 고추장을 판다는 건 아프리카에서 밍크코트를 팔고 에스키모 사람들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런데 후시처럼 브라질 전역에 매장을 갖춘 대형 슈퍼마켓을 어떻게 뚫었을까.
“매년 5월이면 ‘브라질슈퍼마켓박람회’(APAS)가 열립니다. 1985년에 시작한 행사인데 브라질의 대형 슈퍼마켓 550여 개 회사가 참가합니다. 저희 OG컴퍼니는 2000년부터 참가했어요. OG컴퍼니 부스를 만들어 고추장과 된장, 라면, 주스, 사탕, 과자 등을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잖아요. 브라질 사람들이 한국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음식이 뭡니까. 바로 고추장이죠.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에 열린 APAS 때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시식행사를 했습니다.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APAS에 참가했습니다.”
처음 브라질 땅을 밟은 한국 동포는 한국전쟁 반공포로다. 최인훈의 소설 의 주인공인 이명준처럼 남북한행 모두를 거절한 반공포로 중 일부가 유엔의 주선으로 당시 중립국이던 브라질로 온 것이다. 1956년 2월4일 인도항공 특별기편으로 뉴델리를 출발한 반공포로 55명이 이틀 뒤인 6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반공포로에 이어 브라질행을 택한 한국인은 농업이민단이었다. 1962년 12월18일 1차 농업이민자 107명이 부산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일본과 싱가포르, 인도양, 케이프타운, 대서양을 돌아 56일 만인 이듬해 2월12일 브라질 산투스항에 도착한다. 그러나 1차 브라질 이민자들 대부분이 농민이 아니었던데다 준비 부족과 현지 부적응 등으로 영농이민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1966년까지 농업이민자 1300여 명이 브라질로 들어오지만 이들 대부분은 상파울루 인근에 자리를 잡고 봉제업과 의류 도·소매 분야에 종사하게 된다. 이민 51주년이 되는 2014년 현재 브라질에 있는 한인 수는 6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이젠 의류업계뿐 아니라 기업인과 의사, 법조인,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된장 담그다 경찰 조사까지 받고
만일 의 주인공 이명준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상파울루 어디쯤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소설 속이 아닌 실제 반공포로 중 브라질을 택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걷는 사이 길을 잃었다. 상파울루에 사는 한인 동포 중 오뚜기슈퍼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하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지나가는 젊은 한인 한 명을 붙잡고 오뚜기슈퍼 가는 길을 물었다. 봉헤치로 한인들에게 OG컴퍼니는 여전히 오뚜기슈퍼로 통한다.
오뚜기슈퍼는 패션거리와 바로 어깨를 맞댄 조아낑물찡요 거리에 있었다. 작은 주차장이 딸린 건평 300㎡ 크기의 아담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연건평으로 따지면 1천㎡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주차장 건물과 또 다른 3층짜리 상가건물까지 모두 하 사장이 사들였다. 3개 동을 모두 합치면 건평만 1300㎡ 규모가 된다. 슈퍼마켓은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진열대는 한국 슈퍼마켓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국산 제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냉장고엔 매일매일 담가서 내놓는다는 김치들이 가지런히 채워져 있었다. 슈퍼마켓 카운터에서는 아내 강승은씨가 다른 직원 3명과 함께 밀려드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2007년부터 남편이 벌인 한국 식품 도매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슈퍼마켓 일은 강 여사가 전담하고 있었다. 카운터에 쌓이는 물건들의 바코드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찍으며 강 여사가 말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1년 365일을 하루같이 주말도 없이 이 자리를 지켜왔어요. 일주일 내내 아침 8시에서 밤 10시까지 꼬박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상파울루뿐 아니라 브라질 지방도시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한국 음식을 사러 왔다가 발걸음을 돌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말을 이용해 상파울루에 들른 김에 장을 봐서 내려가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지금은 늦게까지 하는 조그만 가게가 몇 군데 생겼어요. 그런 영세한 가게를 배려해 지금은 저녁 8시까지만 영업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고유 음식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잠시 외국 여행을 가더라도 김치와 고추장, 된장 등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간다. 굳이 한국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문제는 우리 먹거리가 그리 간단치 않은 발효음식이라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우리 음식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유통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오뚜기슈퍼는 브라질 한인 동포들에게 귀한 우리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창구였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음식에서 된장이 빠질 수 없잖아요. 초창기에 저희 가게에서 하씨 할머니라는 분이 직접 담근 된장을 납품해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된장이란 게 유효기간이 없지 않습니까. 어느 날 시청 위생국에서 조사를 나왔는데 된장 뚜껑을 열어보고는 코를 싸매더라고요. 이런 고약한 냄새가 나는 썩은 음식을 왜 파느냐며 난리법석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경찰까지 동원해서 이 음식을 만든 곳이 어딘지 대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하씨 할머니 집까지 조사를 받게 됐습니다. 할머니 집에 들이닥친 조사단이 마당 장독의 뚜껑이 열려 있는 걸 보게 된 겁니다. 그 장면이 대대적으로 브라질 신문에 보도됐답니다.”
된장뿐 아니라 오이지랑 새우젓 때문에 수난을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한번은 보건소 직원이 가게 뒤편에 있는 식품창고에 보관 중이던 커다란 오이지 통을 열어봤단다. 오이지가 발효되면서 허연 부유물이 뜨는 걸 본 보건소 직원은 다짜고짜 거기에 표백제를 들이부었다. 폐기 처분하라는 뜻이었다.
상파울루 시청 위생국과 보건소, 경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오뚜기슈퍼를 드나들었다. 식품으로 트집 잡을 게 없으면 불쑥 카운터로 들어와 모든 장부를 싹 쓸어가버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외상 거래가 일상화돼 있었다. 장부가 없어 외상값 받을 길이 막막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 사장은 브라질 공무원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발효식품인 한국 음식의 특성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을 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한국 음식을 브라질에서 팔려면 브라질 식품위생 법규를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차근차근 브라질 규격에 맞추기 시작했지요. 영양사를 고용해서 성분검사표와 유효기간 등을 식품마다 기재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만들어 내놓는 김치나 잡채, 양념불고기 등도 성분과 함량, 첨가물, 유효기간 등을 표기한 라벨을 부착하고 있어요. 브라질 사람들도 이젠 우리나라 음식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하윤상·강승은 부부는 브라질에서 한국 식품의 판로를 개척하는 새로운 길을 뚫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단순히 한국 동포나 중국·일본 등 동양계 사람들을 상대로 한국 음식을 파는 게 아니라 브라질 사람들에게 고추장과 김치, 소주, 라면 등 한국 음식의 맛을 알리는 전인미답의 길을 내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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