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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70살 황혼기 아니라 황금기!

한국 봉제 역사의 산증인 김영호씨가 공장 하나 없는 시골인 니카라과 마사테페에 일군 ‘봉제 나라’
등록 2014-08-09 17:57 수정 2020-05-03 04:27
니카라과 마사테페에 자리잡은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의 김영호 사장은 만 40년 동안 한국과 코스타리카,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다섯 나라를 무대로 봉제 외길을 걸어온 우리나라 봉제 역사의 산증인이다. 박상주 제공

니카라과 마사테페에 자리잡은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의 김영호 사장은 만 40년 동안 한국과 코스타리카,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다섯 나라를 무대로 봉제 외길을 걸어온 우리나라 봉제 역사의 산증인이다. 박상주 제공

잔잔한 호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고이 내려앉아 있었다.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남쪽으로 50여km 떨어진 곳에서 만난 아포요 산정호수의 모습이다. 니카라과는 호수의 나라다. 남한의 1.3배 정도인 13만여km²의 그리 넓지 않은 땅 곳곳에 크고 작은 호수가 널려 있다.

<font size="3">응접세트 하나 없는 소박한 사장실</font>

아포요 산정호수를 뒤로한 채 다시 남쪽으로 10여km 달렸을까. 아담한 단층집들이 늘어선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커피와 바나나, 코코넛 농사 등을 짓는 농촌 지역의 한가운데 들어선 인구 5만 명의 소읍인 마사테페였다. 마사테페를 관통하는 도로가에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Grace Fashion Industry)라고 쓰인 커다란 철문이 눈에 들어온다. 경비원이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축구장 하나는 족히 들어설 만한 널찍한 잔디마당이 나타났다.

첫 번째 건물 2층에 사무실 공간이 들어서 있었다. 기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놓인 회의실에서 나이 지긋한 한 한국 남자가 현지 직원 4명과 머리를 맞댄 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봉제 역사의 산증인인 김영호(70)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 사장이다. 만 40년 동안 한국과 코스타리카, 미국,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다섯 나라를 무대로 봉제 외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지금은 마사테페에서 언더아머, 아에로포스탈, 콜스, 에드바워 등 미국과 캐나다의 대중적 브랜드 의류를 생산하면서 연간 1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04년 2월 공장 하나 없는 시골인 마사테페로 혈혈단신 들어와 10년 만에 직원 600명을 고용한 봉제공장을 일궈낸 것이다.

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회의실 바로 옆에 있는 사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직원을 600명이나 둔 회사의 사장실에 응접세트 하나 없었다. 나이 70줄에 들어선 한국 사람이 무슨 사연으로 니카라과의 작은 도시에까지 와서 큰 봉제공장을 하고 있을까.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오랜 세월 봉제만을 하다보니 저만의 봉제 노하우가 쌓이기 시작했어요. 어딘가에 가서 그걸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기존 봉제기술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사람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곳 마사테페라는 촌구석까지 들어온 이유입니다.”

<font size="3">코스타리카에서 맛본 실패</font>

김영호 사장이 자신만의 봉제 시스템을 가슴속에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을 현장에서 구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실사구시의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낸 2년은 김 사장에게 자신만의 봉제공장을 구상하게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제가 중남미에 처음 들어온 건 1985년 11월이었어요. 봉제회사인 (주)금경의 코스타리카 법인 사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지분의 40% 정도를 투자한 회사였어요. 당시 코스타리카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의 근접성과 저렴한 인건비,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이 있어 봉제공장처럼 노동집약적인 공장을 운영하기에 최적의 여건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처음 4~5년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좋다는 소문이 나니까 한국의 큰 회사들이 20여 개나 쏟아져 들어왔어요. 결국 제가 투자했던 15만달러만 날린 채 보따리를 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사장은 1997년 10월 단돈 5천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잘 곳이 없어서 아들이 다니던 UC어바인대학 기숙사의 좁은 방에서 아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할 일 없이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적거리는 게 그의 소일거리였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자꾸 봉제 관련 전문서적과 산업공학 서적에 눈이 갔다. 거기서 테일러와 포드 시스템 등 기존 생산방식 이외에 블록 유닛 시스템, 번들 시스템 등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1999년 8월 과테말라의 한 봉제공장에서 저에게 와달라고 하더라고요. 직원 1천 명 이상 되는 큰 한국 회사의 부사장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예전 생산방식대로 작업하는 현장에서 일하다보니 답답하더라고요. 그곳에서 번들 시스템을 적용해보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곳 사장님과 자꾸 부딪치게 되더라고요. 일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기도 하고 그래서 4년 만에 사직을 했습니다.”

북미 끝단의 도시는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다. 그 반대쪽 남미 끝단의 도시는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인 푸에고섬이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양 끝단인 페어뱅크스와 푸에고섬까지는 잘 닦인 하이웨이로 연결돼 있다. 캐나다~미국~멕시코~중미를 거쳐 남미 여러 나라를 관통하는 총연장 7만8800km의 길이다. 과테말라 봉제공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김 사장을 니카라과로 안내한 것은 바로 ‘팬아메리칸 하이웨이’였다.

“모처럼 아내랑 중미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팬아메리칸 하이웨이를 달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과테말라~엘살바도르~온두라스를 거쳐 니카라과까지 여행을 왔습니다. 제가 워낙 오랫동안 봉제일을 했기 때문에 이쪽 업계 사람들은 대부분 잘 압니다. 지금은 우리 공장 옆으로 이사를 온 한세실업 봉제공장이 당시엔 마나과에 있었어요. 인사도 하고 니카라과 사정도 알아볼 겸 한세실업 현지 법인장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제 사업계획서를 본 한세실업 쪽에서는 선뜻 25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하더군요.”

<font size="3">재봉틀 전원 켜고 끄는 법부터 가르쳐서</font>

2004년 7월12일 지금 이 자리에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 회사 문을 열었다. 먼저 직원 모집 광고를 했다. 신문이나 방송 광고를 한 게 아니라 픽업트럭에다 마이크를 달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는 방식이었다. 구름처럼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김영호사장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왼쪽).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는 한 직원이 여러 공정의 일을 담당할 뿐 아니라 6개월마다 공정을 바꾸는 순환근무제를 실시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박상주 제공

김영호사장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왼쪽). 그레이스 패션 인더스트리는 한 직원이 여러 공정의 일을 담당할 뿐 아니라 6개월마다 공정을 바꾸는 순환근무제를 실시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박상주 제공

“150명 모집에 3천 명이 지원했습니다. 그 친구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적성검사를 했어요. 생산직 직원을 선발할 때 사용하는 핀꽂기(Pegboard)라는 방식입니다.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팔과 손가락의 민첩성과 섬세함을 평가할 수 있는 검사였어요. 구멍이 뚫려 있는 판에 작은 막대기들을 꽂아놓고, 정해진 시간 동안 그 막대기들을 상하 혹은 좌우로 얼마나 많이 옮기느냐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에 결석과 지각을 하는 친구들까지 걸러내다보니 최종적으로 150명 정도를 추릴 수 있었어요.”

최종 선발자들을 대상으로 재봉틀 실무 교육을 시작했다. 그런데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김 사장 혼자 150명이나 되는 신입직원들에게 재봉틀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재봉틀 교육은 그야말로 맨투맨 개인지도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장 재봉틀 전원을 켜고 끄는 법조차 모르는 완전 초짜들을 놓고 막막한 상황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궁하면 통하게 마련이더라고요. 정신교육 과정에서 가장 성적이 우수하고 똘똘했던 오스카라는 친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어요. 첫날은 앉는 자세와 전원을 켜고 끄는 방법만 가르쳤습니다. 내가 오스카를 가르치면 그 친구가 다른 아이들을 몇 명 가르치고, 그 아이들은 또 다른 친구들을 가르치는 연쇄적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한 단계가 숙지되면 단계적으로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방법, 천을 넣는 방법, 재봉틀의 속도 조절 방법 등을 전수했습니다.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재봉틀을 익히는 연습만 했어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이 친구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익히더라고요.”

김 사장이 현장을 둘러보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부분 20~30대로 보이는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외한의 눈으로도 금방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라인이 일목요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큰 가위를 든 직원들이 원단을 활짝 펼쳐놓은 채 일정한 길이로 자르고, 다른 쪽에서는 줄줄이 열지어 앉은 재봉사들이 박음질을 했다.

<font size="3">전체 공정에 익숙해지도록 순환근무</font>

“옷 하나를 만드는 공정은 티셔츠나 아이들 바지처럼 단순한 제품일 경우 10여 개, 남녀 정장처럼 복잡한 경우에는 130여 개로 다양합니다. 우리나라 봉제공장들은 대개 이런 공정이 완전 분업 형태로 짜여 있습니다. 한 직원이 한 가지 일만 계속 하는 시스템이지요. 그러나 우리 공장에서 채택한 번들 시스템은 한 직원이 여러 공정의 일을 합니다. 한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그걸 몇 공정으로 나눠 분담하는 거지요. 게다가 6개월마다 공정을 바꾸는 순환근무를 하고 있어요. 생산라인의 직원들 하나하나가 전체 공정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겁니다. 이런 번들 시스템은 여러 가지 강점이 있어요. 무엇보다 현장 직원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높아집니다. 직원 개개인의 자질이 높아지면 회사 전체의 수준이 한 단계씩 올라가게 됩니다.”

갑자기 직원들이 일손을 멈추더니 일제히 작업장 밖으로 몰려나갔다. 그들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점심시간이 돼서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널찍한 공장 마당의 나무 그늘 밑에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펼쳐놓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학생들처럼 보였다.

김 사장이 점심을 먹자며 안내한 곳은 공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자기 집이었다. 앞뜰에 잔디가 곱게 깔린 아담한 단층집이었다. 김 사장의 부인인 장영순씨가 갈비찜과 생선구이 등의 음식을 맛깔스럽게 차려 내왔다.

장영순씨: “지금이 내 인생의 최고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아이들 키우는 부담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으니까요. 4년 전부터는 공장에 나가 남편 일을 돕고 있어요. 놀더라도 사람들 많은 공장에 나가서 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김 사장: “처음엔 제가 반대를 많이 했어요. 지금은 아내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경리와 자재, 창고 물건 입출고를 담당하는 일을 척척 해내고 있어요. 우리 직원들 엄마 노릇도 하고요. 30% 정도는 집안이 가난해서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어요. 이 사람이 그 친구들 밥을 챙겨줬지요. 저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도 집사람에게는 털어놓는 직원이 많습니다.”

장영순씨: “이 나이에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됐다는 게 참 기뻐요. 제가 올해 예순다섯이에요. 한국에서 이 나이에 일하는 여자가 몇 명이나 있겠어요.”

김 사장: “건강이 허락할 때까진 일을 해야지요. 우리 공장 식구 600명에 그들 가족까지 따지면 적어도 4천~5천 명의 생계가 저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좁게는 우리 공장 가족들을 먹고살게 해주고, 넓게는 니카라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세상 어디서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font size="3">일하는 아내 “내 인생 최고 황금기”</font>

한국이라면 일찌감치 뒷방으로 밀려났을 노년의 부부였다. 그러나 김 사장 부부는 지금 니카라과의 지방도시에서 인생의 ‘황혼기’가 아닌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일하는 게 훨씬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박상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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