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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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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라는 스펙으로 일군 ‘콜롬비아 드림’

① 중졸의 빵 기술자였던 ‘조호 콜롬비아’ 노철수 사장
스페인어 사전 한권 들고 간 낯선 땅에서 오토바이 부품 시장의 선두주자로 올라서기까지
등록 2014-06-06 14:25 수정 2020-05-03 04:27
콜롬비아 보고타의 센트로 거리엔 오토바이 전문 점포 300여 개가 들어서 있어 항상 오토바이로 붐빈다. 노철수 조호 콜롬비아 사장은 이곳을 무대로 연간 3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상주

콜롬비아 보고타의 센트로 거리엔 오토바이 전문 점포 300여 개가 들어서 있어 항상 오토바이로 붐빈다. 노철수 조호 콜롬비아 사장은 이곳을 무대로 연간 3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상주

그는 중졸의 빵 기술자였다. 스물여덟 살 되던 1987년 5월16일,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콜롬비아라는 나라에 홀로 발을 내디뎠다. 스페인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그의 손엔 달랑 사전 한 권만 들려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안내한다던 브로커는 그를 허름한 골방에 던져놓고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오갈 데도 없는 깜깜한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 홀로 팽개쳐진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만원을 해외이민 사기꾼에게 털린 채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에 버려졌다.

돈 한 푼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그로부터 27년의 세월이 흐른 2014년 5월, 그가 보고타 다운타운 15번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회색 양복에 밝은 아이보리색 넥타이로 멋을 낸 말끔한 차림이었다. 주인공은 콜롬비아와 페루를 무대로 오토바이 부품 판매 사업을 하는 노철수(55) ‘조호 콜롬비아’(Choho Colombia) 사장이다. 무일푼으로 콜롬비아 땅을 밟았던 그는 이제 연간 300만달러를 웃도는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노 사장은 조호 콜롬비아 외에도 가정용 및 산업용 정수기를 판매하는 ‘코웨이 콜롬비아’를 운영하면서 연간 30여만달러의 매출을 추가로 올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오토바이뿐이었다. 알록달록 치장한 오토바이들이 보고타 거리를 빽빽하게 메운 채 달리고 있었다. 길 양편으로 들어선 가게들은 모두 오토바이 판매점과 부품점, 수리점들이었다. 길가엔 어깨를 맞대고 세워진 오토바이들이 까마득하게 긴 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고타의 다운타운 15번가에서 18번가에 이르는 센트로 지역은 300여 개 오토바이 점포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오토바이 세상이다.

노 사장은 인근의 점포들을 죽 들러 인사를 하며 자기 회사 제품의 판매 상황을 일일이 확인했다. 대부분 점포에서 조호 콜롬비아의 주력 제품인 체인과 스프라켓(톱니바퀴)은 70% 안팎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엘 만사노 데 라스 모토스’(El Manzano de Las Motos)라는 점포 주인은 자기 가게에서 팔리는 체인과 스프라켓의 90%가 조호 콜롬비아 제품이라고 말했다. 노 사장은 들르는 가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체인과 스프라켓 이외에 타이어 등 다른 제품도 많이 팔아달라며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영업사원을 13명이나 두고 있었지만 자신도 직접 발품을 팔며 거래처를 돌아다닌다.

센트로 거리의 오토바이 가게들을 둘러본 뒤, 노 사장과 함께 조호 콜롬비아 본사로 향했다. 조호 콜롬비아는 보고타 다운타운에서 2km 정도 떨어진 푸엔테 아란다 공단 안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 신촌쯤 되는 곳에 널찍한 공단이 있는 셈이었다. 우중충한 공장 건물들 사이에 유독 깔끔한 하얀색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오토바이 부품이 산더미처럼 쌓인 창고 안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물건을 나르고 있었다.

“세상과 연결해준 유일한 끈은 사전”

“저와 우리 직원 40여 명이 일하고 있는 조호 콜롬비아입니다. 대지 1700m²에 건평 300m²예요. 보고타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경쟁사들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부품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물류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는 장점도 있고요.”

건물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자 깔끔한 사무실 공간이 나타났다. 노 사장의 방은 책상 하나와 회의용 원탁 테이블, 작은 소파 하나, 그리고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으로 이루어진 아주 간소한 공간이었다. 노 사장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들어 보여주었다. 뜻밖에도 세월의 두께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낡은 스페인어 사전이었다. 건네받아 들춰보니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손때가 묻어 있었다. 웬만한 단어엔 모두 밑줄이 쳐져 있었다.

“저와 세상을 연결해준 유일한 끈이 바로 이 사전입니다. 서울을 떠나올 때 종로서적에서 7천원 주고 샀어요. 다른 회화책이나 문법책 등을 살 경황도 없었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요. 저를 데려온 한국 브로커는 아예 연락을 끊어버렸어요. 한국 동포와 연락해서 도움을 청할 방법도 없었어요. 죽으나 사나 콜롬비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현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는 스페인어 사전 한 권뿐이었던 거지요. 스페인어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사전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 사전은 앞쪽은 서-한 사전이고, 뒤쪽은 한-서 사전으로 돼 있다.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면 한-서 사전에서 그 단어를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고, 반대로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콜롬비아 사람에게는 사전을 건네주었단다. 거기서 단어를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도록 하기 위해서다. “스페인어는 성과 수 변화가 복잡한 언어예요. 처음 시작할 때 성·수 변화나 현재와 과거, 미래 등 시제를 구분하는 건 엄두도 못 냈지요. 그저 동사 원형으로만 표현했어요.”

콜롬비아 거리에는 300개 브랜드의 오토바이들이 돌아다닌다. 조호 콜롬비아는 그중 100여 개 브랜드의 부품을 취급하고 있다. 전체 오토바이 부품시장 점유율은 20~25%로, 창업 10년 만에 콜롬비아 오토바이 부품시장의 선두 자리를 꿰찼다. 스페인어 한마디 못하던 외톨이 이방인이 어떻게 콜롬비아 오토바이 부품시장의 선두주자로 올라섰을까.

조호 오토바이와의 운명적 만남

“한마디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어요. 세상이 깨지나 내가 깨지나 어디 한번 해보자 하고는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습니다. 오토바이 부품 사업을 하기 전에는 빵가게에서 시작해 원단장사, 옷장사, 모자장사, 게임기 판매 등을 하며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처음엔 정말 콜롬비아 한가운데 버려진 상황이었어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인근 빵집을 찾아가 공짜로 일을 거들어주면서 빵을 얻어먹었지요. 제 주변엔 콜롬비아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제가 빵집을 내고 원단 사업을 하고 오토바이 부속품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하나같이 콜롬비아 사람들의 도움 덕이었습니다.”

한 인디오 여인이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비둘기 모이로 쓸 옥수수를 팔고 있다. 박상주

한 인디오 여인이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비둘기 모이로 쓸 옥수수를 팔고 있다. 박상주

노 사장이 처음 오토바이 부품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의 아내 넬리의 인척인 힐베르토 피녜로스가 권유했기 때문이다. 힐베르토는 그가 콜롬비아에 온 이후 가장 도움을 많이 준, 그에겐 친형님 같은 분이다. 노 사장의 아들 한국이의 대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구로 공구상가 같은 곳에서 기계 부속품 사업을 대규모로 하는 사람으로, 모터와 베어링, 공업용 벨트, 체인 등을 도매하고 있다.

“오토바이 부속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옷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격인 마두르곤과 산아드레시토 시장, 그리고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프리메로 마요 시장에서 모두 7개의 점포를 운영했죠. 그런데 옷장사를 하면서 자꾸 회의가 들더라고요. 옷장사로는 돈은 벌지만 성취감이나 보람 같은 건 크게 느낄 수 없었거든요. 시장통을 벗어나 뭔가 제대로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힐베르토의 사무실에 들르고는 했지요. 저희 옷가게가 있는 프리메로 마요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거든요. 힐베르토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세상을 내다보는 눈이 있는 분이거든요. 그에게 옷장사 말고 뭔가 새로운 아이템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어느 날 불쑥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 오토바이 시장이 커질 거야’ 그러더라고요. 그때가 2004년 봄이었어요. 콜롬비아에 오토바이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 말이 쿵 하고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바로 이거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어요.”

노 사장은 곧바로 중국으로 날아갔다. 무슨 일이든 직감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주저 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무조건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러고는 기사에게 오토바이 부품 전문상가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택시기사가 저를 내려준 곳이 조호 오토바이 부품 전문 매장이었습니다. 조호 오토바이와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거지요. 그때 제 눈에 가장 먼저 오토바이 체인이 들어왔습니다. 만져보니까 느낌이 딱 오더군요. 그래서 샘플로 하나 사들고 콜롬비아로 돌아왔어요. 그것을 힐베르토에게 보여주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즉시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체인 전문가를 부르더군요. 체인 전문가가 꼼꼼히 뜯어보더니 놀라면서 품질이 아주 우수하다고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성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너무 서두른 탓이다. 처음엔 1천 개 혹은 2천 개 정도 수입해서 시장의 반응을 본 뒤 본격적으로 큰 투자를 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그는 첫 주문 때 한 컨테이너분의 물량을 들여왔다. 무려 1만8천 개를 왕창 들여온 것이다. 물건을 쌓아놓을 창고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힐베르토가 자기 창고 한쪽을 공짜로 내줬다. 널찍한 사무실 공간까지 내주고 전기와 물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그렇게 해서 2004년 6월 ‘문도 코멕스’(Mundo Comex·‘세계무역’이라는 뜻)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콜롬비아 현지 직원도 2명 뽑았다. 오늘날 그를 있게 한 오토바이 부품 사업이 탄생한 순간이다.

“그런데 웬걸, 첫 한 달 동안 매출이 겨우 1500달러였어요. 당시 옷가게 7개를 통해 한 달 40만~50만달러의 매출을 올릴 때였거든요. 이거 잘못 짚은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서너 달쯤 지났을 때, 힐베르토가 체인이 좀 팔리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헛짚은 거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남은 물량을 자기한테 넘기라고 하더군요. 순간적으로 넘길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판매가 늘긴 하는 거예요. 만일 처음에 체인을 1천~2천 개 찔끔찔끔 들여왔더라면 아마 제가 오토바이 부품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두 달 반응만 보고 접었을 테니까요. 컨테이너 물량으로 왕창 들여왔기 때문에 여러 달에 걸친 시장의 반응을 볼 수 있었고, 거기서 오토바이 부품 사업에 대한 전망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죠.”

찔끔 들여왔다면 계속 못했을 것

6개월 뒤 다시 중국을 찾았다. 이번엔 체인과 스프라켓, 오토바이 액세서리를 잔뜩 사가지고 왔다. 헬멧과 거울, 손잡이 등 수백 가지를 들여왔다. 다행히 시장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월 6만달러씩 6개월 만에 팔아치웠다. “그제야 비로소 제가 잭팟을 터트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콜롬비아뿐 아니라 남미의 중간소득 계층 이하의 사람들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토바이를 찾는 시점이 도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순간 노다지를 찾은 기분이었어요.” 오토바이 부품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안정 궤도에 들어섰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쪽에서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고 옷가게 7개 중 4개를 정리했다. 산안드레시토의 가게 3개는 아내를 위해 남겨뒀다.

오토바이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그는 과감히 도전을 택했다. “빵장사 하고 옷장사만 하던 사람이 처음 쇠를 만지는 거잖아요. 오토바이 부속품을 새로 사고 싶어도 뭘 알아야 사지요. 그렇지만 세상사라는 게 궁하면 통하는 길이 있게 마련이더라고요. 왔다갔다 하다보니 꾀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오토바이 부속품 가게에 가면 커다란 고무통이 죽 진열돼 있습니다. 그 안에 부품이 가득 담겨 있지요. 손님이 오면 그 고무통 위에 올라가 밟고 다니면서 부품을 구경합니다. 저도 어느 날 부품 통을 밟고 다니며 구경하다가 부품 하나를 골랐어요. 그러고는 가게 직원에게 다가가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물었습니다. 아예 가게에 진열돼 있는 오토바이 곁으로 직원을 끌고 갔어요. 이게 어디에 붙어 있는 물건이고, 이름이 무엇이고, 무슨 역할을 하는지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주더라고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요.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웃나라 페루 시장에도 진출

그렇게 오토바이 공부를 하면서 취급 품목을 하나둘 늘려갔다. 2007년엔 회사 이름을 ‘조호 콜롬비아’로 바꿨다. 거래처 사람들마다 그를 만나면 ‘조호 사장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 이름인 ‘문도 코멕스’보다 ‘조호’라는 제품 이름이 시장에서 훨씬 많이 알려진 탓이다. 노 사장은 10년 만에 콜롬비아 오토바이 부품 시장을 장악했다. 2011년엔 이웃나라 페루 시장에도 진출했다. 수도인 리마와 이키토스에 지사를 설립한 이후엔 6개월 동안 매달 보름 정도는 페루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밀림 지역을 헤집고 돌아다녔단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했던가. 세상 어떤 일이든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얘기다. 가진 거라곤 중학교 졸업장밖에 없고 내세울 인맥도 하나 없는 그였지만, 지금도 콜롬비아와 페루, 한국, 중국 등을 안방과 건넌방 오가듯 돌아다니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세상 어디를 가든 ‘열정’이라는 스펙 하나만 있으면 모두 통한다는 게 노 사장의 지론이다.

박상주 자유기고가*‘월드컵의 대륙’ 남미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박상주의 남미 만인보’는 지구 반대편 남미 대륙 여러 나라에 뿌리내린 한인들의 도전기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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