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다시 찾은 페루 쿠스코 공항에서 옛 친구를 반갑게 맞아준 건 낡은 티코 택시였다. 쿠스코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주름잡고 다니는 명물이다. 티코 택시를 잡아타고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대성당 옆구리를 돌아 광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잉카제국의 심장부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마스 광장은 쿠스코 시내 구석구석으로 향하는 크고 작은 도로와 골목들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중 북서쪽 방향으로 난 프로쿠라도레스라는 이름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 카페 등이 이어진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20여m쯤 걸었을까. 왼편으로 ‘사랑채’라는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쿠스코에서 김치, 된장찌개와 삼겹살, 곰탕 등을 즐길 수 있는 한국음식점이다. 안마당을 거쳐 사랑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font size="3">7년 만의 재회 </font>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녀가 벌떡 일어나 달려나온다. 사랑채 주인인 길동수(52)·박은미(41) 사장 부부다. 7년 만의 재회였다. 길 사장은 앞머리가 조금 더 벗겨졌고, 은미씨는 조금 야윈 것을 빼고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2007년 8월 쿠스코에서 길 사장 부부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원이었다.
지난 7년 사이 두 사람은 삶의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동료 봉사단원이던 둘은 결혼한 뒤 쿠스코에 눌러앉았다. 그러고는 한국음식점 ‘사랑채’와 민박집 ‘사랑채’, 남미 전문 여행사 ‘길투어’, 페루에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페루한국문화원’ 등 4개 사업체를 일구었다. 음식점 사랑채는 쿠스코의 노른자위인 아르마스 광장에 자리한 덕에 한국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민박집 사랑채 역시 아르마스 광장까지 차로 5분 거리인 라플로리다 거리에 있다. 숙박비마저 유스호스텔 수준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길 사장 부부는 요즘 ‘안데스산맥에서 키우는 내 커피나무 한 그루’라는 새로운 사업을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마추픽추 인근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커피나무를 한국의 커피 애호가들에게 분양하는 사업이다. 안데스 산중에서 커피 농사를 짓는 인디오와 한국의 소비자를 직접 연결시키는 프로젝트다. 커피 생산의 최적지인 해발 2천m 안팎의 안데스 산지에서 생산되는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공정한 값에 팔아주고, 고국의 커피 소비자는 1년 내내 싱싱한 원두를 착한 가격에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은미씨가 시원한 맥주를 내온다. 7년 전 아르마스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카페에서 마셨던 쿠스케냐 맥주다. 쿠스코 여인을 뜻하는 쿠스케냐라는 이름의 이 맥주는 세계맥주대회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그 맛을 인정받고 있다. 길 사장이 지난 사연을 들려준다. “은미씨랑 3년 이상을 함께 KOICA 봉사단원으로 활동했어요. 가까이 지내다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2008년 11월1일 결혼을 했어요. 당시 은미씨는 봉사활동 기간이 만료된 상황이었고, 저는 1년 정도 더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한국으로 들어가서 결혼을 하고 왔더니 KOICA 활동을 그만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봉사단원이 결혼하면 자격을 상실하는 규약이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오려 하는데 코라오 도자기학교 학생들이 붙잡고 늘어지더라고요.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었어요.”
먼저 하늘의 의로움을 찾다보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저절로 곁들여 받게 된다는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길 사장이나 은미씨처럼 잘나가던 자신의 밥벌이조차 때려치우고 봉사의 대열에 합류하는 이도 적지 않다. 길 사장 부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봉사가 자신들을 스토킹하는 거 같다”고 말한다. 굳이 봉사를 하면서 살겠다는 투철한 신념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그게 또 다른 봉사를 낳았다는 것이다.
<font size="3">운명의 신은 그들에게…</font>길 사장은 서울 휘문중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그려 팔아 용돈을 벌 정도로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서울 양정고 1학년 때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미술반 활동을 시작했다. 보헤미안 기질을 타고난 그는 대학 입시에 낙방한 뒤 6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자유롭게 살았다. 뒤늦게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면서 1987년 서울산업대 도예과에 입학한다. 1991년 봄, 대학을 졸업한 길 사장은 서울 명일동과 경기도 장호원 두 곳에 공방을 차린 뒤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가을 KOICA 봉사단원으로 페루에 오기 전까지 14년 동안 10여 차례 전시회를 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강남에서 잘나가는 도예가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에게 더 특별한 삶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2004년 5월 말쯤 대학로에서 술을 마셨어요. 차를 끌고 갔다가 그냥 세워놓고 왔지요.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차를 가지러 가면서 무가지를 집어들었는데 1면에 KOICA 봉사단원 모집 광고가 났더라고요. 모집 분야를 보니 제 전공인 도자기 분야도 있었어요.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는지 제가 차를 세워놓은 곳이 KOICA 본부 빌딩 근처였습니다. 운명의 손길이 저를 KOICA로 이끌었던 거 같아요. 충동적으로 그 자리에서 지원서를 작성했는데 얼마 뒤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해 10월 말 저희 동기 12명이 리마로 와서 6주 동안 교육을 받았어요. 그때 그곳에서 처음 아내를 만났지요.”
1992년 경기도 수원 영복여고를 졸업한 은미씨는 장안전문대 회계과에 입학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3년 동안 경기도 군포에 있는 한 무역회사를 다녔다. 착실하게 회사생활을 하던 은미씨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1999년 봄 서울여대 미대 99학번으로 늦깎이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입학할 때는 취업이 잘돼 인기가 높은 산업디자인과로 들어갔지만 2학년 때 도예과로 전과했다. 대학 시절 도예와 함께 은미씨 마음속에 새로운 열망이 또 하나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로 봉사에 대한 욕구였다.
“서울여대 2학년 때 몽골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제 작은언니랑 고등학교 단짝이던 분의 남편이 몽골에서 KOICA 협력의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언니 친구도 의사였는데 남편을 따라 울란바토르에 함께 가 있었습니다. 의사 부부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부터 KOICA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당초 1년 예정으로 왔는데 벌써 10년이 됐습니다.” 은미씨가 들려준 얘기다.
<font size="3">복을 물어오는 흥부의 제비처럼 </font>
길 사장 부부에게 봉사는 복을 물어오는 흥부의 제비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 남을 돕기 위한 봉사로 시작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사업으로 연결됐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민박집과 한국음식점, 여행사, 문화원 등을 줄줄이 차리게 된 것은 원주민과 한국 관광객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font color="#008ABD">은미씨</font>: “여기 남아서 코라오 마을 청년들을 돕자면 뭔가 호구지책 정도는 마련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게 민박집입니다. 마침 아르마스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민박을 할 만한 좋은 집이 나왔더라고요. 참 신기하게도 민박집을 연 지 한 달 만에 손님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집을 이용해보고는 값도 싸고 교통도 편하니까 인터넷에 좋은 글을 올려준 덕이었습니다.”
<font color="#008ABD">길 사장</font>: “여행사도 처음엔 저희 민박집에서 묵고 계신 손님들을 돕다가 시작된 일입니다. 한국 관광객이 이곳 사정을 잘 모르니까 이런저런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마추픽추를 가는 열차표를 끊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잉카 트레킹을 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 처음엔 우리 두 사람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열심히 도와드렸어요. 그러다보니 이럴 바에야 아예 여행사를 차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제 성이 길씨잖아요. 그래서 여행사 이름을 ‘길투어’로 지었어요. 여행할 때 걷는 길이란 의미도 함께 실었지요.”
<font color="#008ABD">은미씨</font>: “아르마스 광장 바로 인근에 음식점 을 열 수 있게 된 끈도 역시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코라오 마을의 이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더라고요. 저희가 코라오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주 가깝게 된 인물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이 아르마스 광장 쪽에 좋은 가게 자리가 하나 나왔는데 뭐라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사랑채 식당을 하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 피자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아르마스 광장 쪽은 가게 자리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나오더라도 원주민들끼리 알음알음으로 거래됩니다. 그런데 이장님이 그 정보를 저희에게 알려주신 거예요. 너무 탐이 나서 2~3일 뒤 바로 계약했습니다. 부랴부랴 그릇 사고, 영업허가 내고, 개업 준비를 서둘렀어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비빔밥, 불고기, 제육볶음, 김치전, 파전, 라면으로 우선 시작했어요. 나중에 부대찌개, 곰탕, 오징어덮밥 등 한두 개씩 메뉴를 늘려나갔지요. 페루에서 유난히 뜨겁게 달아오르던 한류 덕도 많이 봤습니다. 페루 현지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는 우리 식당으로 와서 드라마 속에 나오는 삼겹살이나 소주, 불고기 등을 주문해서 먹더라고요.”
<font color="#008ABD">길 사장</font>: “페루한국문화원이야말로 한류 바람 덕에 만들어진 겁니다. 케이팝(K-POP)과 한국 영화, 드라마에 빠진 페루 친구들에게 봉사로 한국말을 가르쳤는데 그 일이 커져버린 거지요. 아마 2009년 4월쯤이었을 겁니다. 이곳 대학생 10여 명이 식당으로 와서는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데 스페인어 번역이 제대로 안 돼 있는 게 많다는 거예요. 이곳 식당은 오후 3시30분부터 6시까지는 문을 닫습니다. 그 시간에 학생들을 식당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무려 40~50명이 몰려왔더라고요. 두 반으로 나눠서 1시간씩 저랑 은미씨가 나눠서 가르쳤지요.”
<font color="#008ABD">은미씨</font>: “그런데 영업하는 식당에서 수업을 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더라고요. 손님도 왔다갔다 하고, 종업원도 손님 받을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학생들이 미안해하고 불편해하더라고요.”
<font color="#008ABD">길 사장</font>: “6개월 정도 식당에서 수업하다가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로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만한 장소를 찾아보라고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하루 만에 장소를 물색해왔더라고요. 산안토니오 아바드 데 쿠스코 국립대학 바로 맞은편인 아베니다 쿨투라 거리에 있는 40평 정도의 사무실이었습니다. 곧바로 계약했지요. 비영리 사단법인 ‘페루한국문화원’이란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1만달러 정도의 사비를 털어 책걸상과 전화, 컴퓨터, 50인치 텔레비전, 음향기기, 조명기기, 프로젝터 등을 갖춰놓았어요.”
학생 모집 광고도 내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문화원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달 50솔(약 19달러)의 수강료를 받기로 했다. 한국어 교재는 길 사장이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사무기기와 교육 기자재를 갖춰놓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당장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부족했어요. 하루는 하도 답답해서 우리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한 젊은 관광객을 붙들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고려대 신방과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김희원이라는 분이었어요. 그랬더니 자기가 몇 달간 자원봉사를 하겠다더라고요. 처음엔 둘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인터넷을 통해 또 다른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했지요. 이후 지금까지 재능기부를 하는 한국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font size="3">어디 있어도, 무얼 하고 있어도</font>아르마스 광장에서 문화원까지는 차로 5분 거리였다. 아베니다 쿨투라 대로변의 아담한 4층짜리 건물에 ‘페루한국문화원’라는 한글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문화원은 맨 꼭대기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편으로 사무실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서울·부산·대구·광주 등의 이름이 붙은 작은 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 방마다 한국인 강사가 5~6명의 젊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 방에서인지 케이팝이 흘러나왔다. 케이윌의 이라는 곡이었다. “그대 어디 있어도, 무얼 하고 있어도, 그저 이 내 가슴은, 그댈 느낄 수 있죠….” 노랫말처럼 길 사장은 어디 있어도, 무얼 하고 있어도, 우리 문화를 지구 반대편 남미에 전파하는 ‘한류 전도사’임을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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