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지구 중심에서 이룬 ‘코페르니 쿠스적 인생 전환’

⑤ 학벌 신분제 사회 벗어나 ‘기회의 땅’ 에콰도르로 간 전미숙씨 꿈과 희망의 결실
등록 2014-08-22 17:00 수정 2020-05-03 04:27

위도 0° 0′ 0″(0도 0분 0초), 서경 78˚ 27′ 8″(78도 27분 8초). 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적도선 위에 30m 높이의 적도탑(La Mitad del Mundo)이 세워져 있었다. 적도탑 꼭대기에는 지름 4.5m의 지구본이 올려져 있었다. 적도선은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은 물론 전세계 15개국을 지난다. 그러나 적도선에서 가장 높은 곳은 바로 안데스 산중의 해발 2800m에 위치한 에콰도르 적도탑 자리다. 에콰도르 사람들이 지구의 중심이라며 적도탑을 세운 이유다.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으면, 국가 이름을 ‘적도’라는 뜻인 에콰도르로 정했을까.

‘전미숙 교정·보철 전문의 303호’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에서 10년째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전미숙씨는 국내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뒤 에콰도르로 건너가 에콰도르국립중앙대학 치대에서 공부를 해 치과의사의 꿈을 이뤘다. 키토 시내 북쪽인 보산데스 거리에 위치한 ‘리벤사 메디컬 센터’ 치과 진료실에서 전씨가 충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박상주 제공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에서 10년째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전미숙씨는 국내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뒤 에콰도르로 건너가 에콰도르국립중앙대학 치대에서 공부를 해 치과의사의 꿈을 이뤘다. 키토 시내 북쪽인 보산데스 거리에 위치한 ‘리벤사 메디컬 센터’ 치과 진료실에서 전씨가 충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박상주 제공

적도탑이 있는 곳에서 놀랍고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달걀을 깨지 않고 똑바로 세운 것이다. 콜럼버스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그것도 좁디좁은 못 대가리 위에 달걀을 오뚝하니 바로 세운 것이다.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북쪽으로 22km 지점의 작은 인디오 마을인 시우다드미타델문도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구의 중력이 남북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는 적도선상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2년제 전문대학을 나온 사람이 의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한국에서 달걀을 똑바로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달걀을 똑바로 세우는 게 불가능하지만 에콰도르에서는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전문대 출신이 의대나 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지만 에콰도르에서는 활짝 열려 있다. 지금 키토에서 10년째 치과의사로 일하는 전미숙(37)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씨는 한국에서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한 뒤 서울 강남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1년 동안 단순사무직으로 일하다 어느 날 홀연히 에콰도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콰도르에 도착해서는 국립대학인 에콰도르국립중앙대학(우니베르시다드 센트랄 델 에콰도르)에서 치의학을 공부했다. 5년 동안 하루 4~5시간만 잠을 자는 고통스러운 공부 끝에 치과의사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키토 시내 북쪽인 보산데스 거리에는 중소 규모의 병원 건물 네댓 채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중 깔끔한 유리벽으로 외관을 한 7층짜리 건물에 ‘리벤사 메디컬 센터’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안내판에는 외과·내과·산부인과·소아과·치과 등 과목별 병원과 의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303 DRA MISOOK JUN / Protesis Fija’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어로 ‘전미숙 교정·보철 전문의 303호’라는 뜻이다. 대학 동기인 안드레아와 함께 2011년 파트너십으로 개원한 치과병원 ‘덴탈 플래너’(Dental Planner)였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문양이 그려진 흰색 가운과 푸른색 마스크, 플라스틱 보호안경 차림을 한 전씨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잠시 뒤 진료를 마친 전씨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말했다.

“아주머니의 어금니가 많이 썩었네요. 이곳 사람들은 아직 치아 관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충치 환자가 많습니다. 이빨을 뽑아야 하는 환자도 많고요. 그러다보니 크라운 등 보철을 해야 하는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키토엔 한국 사람이 450명 정도 살고 있어요. 최근 들어 한국 환자분들이 오시더라고요. 나이 드신 한국 어르신들이 제가 여기서 치과를 하는 걸 아주 좋아하십니다. 병원에 오실 때 김치나 미역, 김 등을 싸들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땐 정말 부모님 생각이 나지요.”

20대 중반에 훌쩍 집을 떠난 딸이 이처럼 어엿한 의사로 성장한 모습을 부모님은 보셨을까. “2012년 초 제가 결혼할 때 엄마·아빠가 오셨어요. 그때 저랑 제 남편이 두 분 이빨을 봐드렸지요. 제 졸업장을 보여드릴 때만 해도 긴가민가하시더니 이빨 치료를 받으시고 나서는 진짜 의사 맞네, 그러셨습니다. 모처럼 효도한 기분이었어요.”

소심하고 겁 많은 ‘범생이’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적 인생 전환’을 꿈꾼다. 코페르니쿠스적 인생 전환은 자신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기존 인식과 관습의 사슬을 깰 때만이 가능해진다. 전씨는 학벌 신분제 한국 사회의 낡은 관습을 훌훌 털고 코페르니쿠스적 인생 전환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 몸담아온 고향과 가족, 친구들과 이별한 채 낯선 외국 땅으로 떠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어떤 계기로 먼 에콰도르까지 와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를 다녔어요. 그곳의 송정규 목사님이 에콰도르 선교에 관심이 많으셨죠. 지난해 작고하기 전까지 에콰도르에서 선교기지로 농장까지 운영했던 분입니다. 송 목사님은 교회의 젊은 친구들을 치과의사로 키워 선교 현장에서 봉사 임무를 맡기고 싶어 하셨어요. 전문대를 다닐 때부터 송 목사님이 저에게 ‘미숙이 너 의사 한번 해볼 생각 없니?’ 하고 물으시고는 했어요. 그 물음에 어느 순간 ‘네’ 하고 대답한 것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정말 모험과는 담을 쌓은 소심하고 겁 많은 ‘범생이’였어요. 그런데 딱 한 번 눈 꾹 감고 모험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에콰도르행 비행기를 타는 일이었어요. 그게 제 인생의 진로를 180도 바꿔놓았어요.”

키토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5796m의 코토팍시산을 비롯해 4천~6천m급 안데스 영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도시다. 산허리까지 기어오르며 다닥다닥 형성된 시가지 곳곳에는 하얀 구름이 잔뜩 걸려 있었다. 적도가 바로 머리 위를 지나는 도시인데도 긴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했다. 해발 2850m 고원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에콰도르국립중앙대학 뒤편으로 4784m 높이의 웅장한 피친차산이 솟구쳐 있었다. 피친차산은 1999년 10월 폭발하면서 화산재로 도시를 뒤덮은 활화산이다. 1822년 5월24일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지휘하는 라틴아메리카 독립군이 스페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에콰도르 독립의 발판을 다진 곳이기도 하다.

전씨는 다시 만나기로 한 오후 1시30분에 정확하게 대학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공부한 장소를 함께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치과대학은 정문을 들어가자마자 바로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토색 칠을 한 ‘ㄷ’자형 4층 건물이었다. 건물 근처에 가까이 가자 치과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저는 1999년 6월13일 키토에 들어왔습니다. 한 해 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한 뒤 2000년 9월 에콰도르국립중앙대학 치과대학에 입학했어요. 제 학번 친구들만 700명 들어갔습니다. 그중 졸업한 학생은 12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정말 살벌할 정도로 우수수 떨어져나가더라고요. 처음엔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공부를 했는데 차츰 아이들이 하나둘 그만두더라고요.”

세상의 이치는 ‘고진감래’

수업이 끝나면 현지인 친구들의 노트 몇 권을 얻어서 복사를 했다. 그걸 들고 집에 와서는 우선 자신이 받아적은 것과 친구들 노트를 비교하면서 종합하는 작업을 했다. 그다음 수업 녹음한 것을 들으면서 나머지 빈 부분을 채워넣었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완전히 채워넣을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담당교수의 수업을 100% 노트에 복원하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탈락에 대한 공포가 워낙 컸다. 어느 날부턴가 에콰도르 학생들이 전씨가 정리한 노트를 빌려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의 제 생존 전략은 죽기 살기로 암기하는 거였어요. 처음엔 무조건 외웠습니다. 해부학과 생물학에서 과락 위기에 몰린 적이 있습니다. 7점을 따야 과락을 면하는데 두 과목 모두 6점밖에 안 나왔더라고요. 수업 시간에 에세이 발표를 하면 추가 점수를 딸 수 있었어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과락을 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에세이 발표를 몇 번 신청해야 했어요. 10분 정도 분량의 에세이를 교수님과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거예요. 우선 에세이를 작성한 뒤 달달 외웠습니다. 그러고는 기계처럼 발표를 했어요. 중간에 교수님이나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그다음 발표를 이어가지 못했어요.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어요. 그렇지만 저의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교수님들이 인정해주시더라고요. 처음엔 무조건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왔어요. 성적도 잘 나오기 시작했고요.”

한국인의 DNA에는 ‘젓가락 문화’로 상징되는 특별한 손기술이 정말 들어 있는 걸까. 한국인의 손기술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부터 측우기, 철갑선을 개발했고, 현대 들어서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휴대전화, 배 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 여성들이 세계 무대에서 양궁과 골프를 제패하는 원인은 섬세한 손기술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손기술은 세계 의학계에서도 이미 인정을 받고 있다. 꼼꼼함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외과수술 분야와 성형시술, 내시경 로봇수술, 불임클리닉 등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섬세한 손기술을 필요로 하는 치과 분야에서도 한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3학년까지의 수업은 주로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학과 공부입니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을 따라가느라 많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4학년부터는 수업이 현장 실습 위주로 진행됩니다.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실습을 하게 돼요. 일주일에 세 번, 하루 서너 시간씩 환자 진료를 했습니다. 현장 실습을 하면서부터는 현지인 친구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교수님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치과대학 5년의 과정은 천 길 낭떠러지 끝을 걷는 듯이 아슬아슬했다. 시험 때마다 살 빠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밤을 새우며 고통스러운 공부를 해야 했고, 에세이를 발표할 때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공포와 맞닥뜨려야 했고, 현장 실습을 할 때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고진감래’다. 2005년 10월12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700명 입학생 가운데 살아남은 120명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것도 전체 120여 명의 졸업생 중 8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고통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손길

치통은 저릿저릿하고 욱신욱신하고 꼬챙이로 찌르는 듯 아찔하다. 참 다양하고 고약한 형태의 아픔이다. 전씨는 일평생 얼마나 많은 에콰도르 사람들을 그런 고통에서 해방시켜줄까. 그는 이미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생각했던 하늘의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 하나의 고통을 치유해주기 위해 환자 앞에 선 치과의사 전미숙의 모습이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박상주 자유기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