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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기’만큼 중요한 ‘중국에서 생존하기’ 제1계명
등록 2014-01-08 14:11 수정 2020-05-03 04:27
중국인은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이런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말을 외국인이 무심코 던졌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인들이 베이징 도심에서 오성홍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중국인은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이런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말을 외국인이 무심코 던졌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인들이 베이징 도심에서 오성홍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중국에서 생활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중국에 처음 오는 ‘초짜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길 건너는 법부터 배우세요. 길 건너기가 가장 무섭거든요. 신호등만 보지 말고 사람들이 건널 때 같이 건너세요.”

‘중국식 길 건너기’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중국에서 길 건너기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생존법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서 대답을 한다. “절대로 중국인들과 싸울 생각을 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중국인들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마세요!” 한국에서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로 동사무소나 관리사무소, 심지어 파출소에서조차 ‘버럭질’을 하며 분노하고 항의했던 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에서 10년 이상을 살아온 지금까지도 그 버럭질 탓에 값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2년 전, 딸아이의 비자가 만료된 걸 모르고 있다가 만료 한 달여쯤 뒤에야 헐레벌떡 사색이 되어 베이징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은 적이 있다. ‘법대로’ 하자면 벌금이 불법체류 최고치에 달하는 5천위안(약 86만원)이지만, 중국에서 어디 ‘법대로’라는 게 있는가. 조금 ‘사바사바’하면 벌금을 최소화할 수 있거나 운이 좋으면 그마저도 면제받을 수 있을 거라는, 지금 보면 아주 깜찍하고 당돌한 생각을 갖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에 서 있던 한 외국인 학생 역시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고 후견인으로 보이는 한 중국 여성이 담당 공안과 면식이 있는 듯 서로 웃으며 몇 마디 나누더니 벌금을 면제받고 바로 연장 수속을 밟는 것이다. 앗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사정을 설명하고 담당 공안의 처분을 기다리는데, 그의 입에서 예상과 달리 ‘법대로’ 벌금 5천위안이 선고되는 게 아닌가. 순간 머리에서 ‘열’이 모락모락 올라오면서 나도 모르게 버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방금 전 바로 앞에 있던 학생도 내 딸처럼 한 달 이상 만료일이 지났는데 왜 걔는 벌금 안 때려요? 보아하니 아는 사람 같던데, 누군 봐주고 누군 안 봐줘요? 아무리 중국이 법과 제도가 엉망이라고 해도 바로 눈앞에서 똑같은 경우를 다르게 처리하는 게 말이 돼요? 이러니까 중국을 빗대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엔 대책이 있다는 풍자말이 나오지요! 어디 이러고도 법대로라는 말을 해요!” 나의 버럭질은 비록 창대하고 위대했으나 그 결과는 비참하고 참담했다. 벌금 최고치 5천위안을 선고받은 건 물론이고 거기에 아마도 괘씸죄까지 작용한 탓인지 출입국관리사무소 컴퓨터망의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랐다.

지난해 12월 초, 베이징 길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외국인이 한 중국 아줌마를 가볍게 들이받은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외국인 역시 나처럼 버럭질 한번 잘못했다가 ‘골’로 간 경우다. 그 사건은 한 중국인이 우연히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얼핏 보면 마치 중국 아줌마가 다치지도 않았는데 엄살을 부리며 외국인에게 치료비 명목의 ‘삥’을 뜯으려는 것 같았고 언론매체에서도 처음에는 그 아줌마를 비난하며 중국인들의 못된 근성이라고 비판했지만, 동영상에 녹음된 외국인의 목소리가 공개되면서 사건은 일대 반전을 했다.

동영상 판독 결과, 그 외국인은 아무 상처도 없는데 치료비를 요구하는 중국 아줌마에게 대뜸 욕부터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수 없게 억센 중국 아줌마를 만났다고 외국인을 동정하던 여론은 그의 욕설이 알려지자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해당 경찰서도 이에 떠밀려 재조사를 했고, 결국 외국인은 걸릴 수 있는 모든 ‘법 조항’에 걸려서 벌금과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마저 취업비자 없이 중국 내에서 일했다는 ‘죄’로 벌금과 구류형을 선고받고 추방됐다.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 아무리 억울한 외국인이라고 해도 가차 없이 ‘법대로’ 처벌될 수 있음을 보여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니 중국에 오는 ‘초짜분들’은 제발 명심하시길.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중국인들과 싸우거나 그들을 욕하지 말 것. 싸우더라도 절대로 그들의 체면을 뭉개는 언행을 하지 말 것. 10년 이상 중국에서 살아본 결과 이건 ‘길 건너기’보다 더 중요한 생존법이다.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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