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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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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할머니들 다 중국 같았으면



‘돈다발로 빰을 쳐도 딸네 식모살이 안 한다’는 한국 친정엄마
조부모가 육아·살림 책임지는 중국선 황혼육아가 삶의 윤활제
등록 2013-05-24 20:39 수정 2020-05-03 04:27
#친정엄마

“워메, 징하다 징혀. 얼매나 쌔가 빠지게 일했으면 그동안 징그럽게도 안 빠지던 살이 다 빠지냐. 내가 지금 한국 집에 있으면 편안허게 누워서 드라마나 보고 산으로 들로 나물 뜯으러 다니고, 친구들하고 재미지게 놀러 다니고 헐 것을. 느그들 다 커서 독립해서 나가고부터 이 엄마는 새 인생을 살고 있단 말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보고 꽃순이 팔자라고 부러워해. 자슥들 커서 집 나가서 다 잘 살지, 다른 남편들은 은퇴다 퇴직이다 해서 집에 들러붙어서 삼식이(하루 세끼를 차려달라고 하는 남편)도 모자라 ‘종간나 새끼’(하루 네끼를 차려달라고 하는 남편) 노릇을 하고 있다는디 니 아빠는 다 늙어서도 저렇게 나가서 단돈 몇 푼이라도 벌어다 따박따박 갖다줘. 아침이면 실컷 자고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돌고 에어로빅 갔다 와서 친구들하고 맛난 거 먹고 한나절 내내 수다 떨고 와도 누가 나한테 밥해달라고 해, 유치원 다니는 손자 마중을 나갈 일이 있어. 밤에도 영감하고 둘이서 재미지게 드라마나 보면서 쇠주 한잔 걸치고 드르렁 코 골고 자면 땡이여. 근디, 느그 집에 와서부터는 식모살이도 이런 식모살이가 없구만. 온몸 천지가 안 쑤신 데가 없어. 느그 시부모 오시면 참말로 업고 다녀야 쓰겄다.”

지난 3월 말, 일이 생겨서 잠깐 고향에 내려간 시부모를 대신해 한국에서 ‘급파’돼 온 친정엄마는 “딸년네 식모살이하다가 골빙 나 죽겠다”고 매일같이 핵폭탄 같은 엄살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아무리 한두 달이라지만 팔자에도 없던 ‘황혼육아’를 하고 있자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앞으로 니가 아무리 돈다발로 내 뺨을 후려치며 오라고 해도 다시는 안 온다”며 한국에 돌아갈 날만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자녀들 출가시키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 달콤함을 누릴 시간은 길지 않다. 한 60대 여성이 손주를 돌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자녀들 출가시키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지만 그 달콤함을 누릴 시간은 길지 않다. 한 60대 여성이 손주를 돌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시어머니

“얘야, 나다. 잘 있지? 애들도 잘 있고? 아이고 진짜 애들이 너무 보고 싶다. 일 보러 왔던 거 다 봤다. 다음주 토요일에 올라가려고 기차표를 예매하려는데 괜찮지? 애들 밥은 잘 먹고 있냐?”

고향에 ‘일 보러’ 가신 시부모로부터 다시 ‘오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에 간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그 사이 손주들 누가 업어가기라도 했을까봐 온통 손주들 걱정에 애가 끓는 모양이다. 첫째와 둘째를 낳고 근 3년을 같이 살았던 시어머니는 최근에 첫째가 초등학교를 입학한 뒤에는, 아예 시아버지와 함께 베이징의 우리 아파트 바로 옆동으로 이사를 오셨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하루 세끼 식사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벅찰 정도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말년에 육아와 살림에서 해방된 친정엄마나 역시 말년에 다시 황혼육아를 하고 있는 중국 시어머니는 똑같이 ‘꽃순이 노년’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늘그막에 황혼육아 재미에 푹 빠져 사는 시어머니는 젊은 시절 육아와 살림을 직접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여성이 일을 하는 중국에선 육아와 살림은 대개 조부모 세대가 담당하는 ‘격세대 육아’를 하고 있다. 아이를 셋이나 낳은 시어머니지만 실제 자기 손으로 아이를 길러본 경험을 한 것은 손주들이 태어나고부터다. 더군다나 퇴직 뒤 이렇다 할 ‘노년의 삶’이 없는 중국 시부모 세대에게 황혼육아는 뒤늦게 육아와 살림살이의 재미를 맛보게 하는 노년 생활의 윤활제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돈다발을 안겨주고 뺨을 때릴지라도 다시는 안 오겠다는 친정엄마와 달리, 시어머니는 며느리와 멱살 잡고 싸우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황혼육아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이런 중국 시어머니가 나에게 주문처럼 하는 부탁. “얘야, 넌 애들이랑 살림 걱정하지 말고 돈이나 열심히 벌어.”

박현숙 베이징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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