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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

국제결혼은 애국심을 죽이는가

제524호
등록 : 2004-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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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국가 사이 사랑’ 막은 서구 인종주의와 일본의 신생 국수주의… 조선에선 소수 개화주의자들만 혼인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필자가 한국에 살면서 인상 깊게 남은 일 중 하나는, 몇 차례 일부 보수적 성향의 중년 남성들과 필자의 국제결혼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평소에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흔적이 보였던 그 남성들은 필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하면 거의가 “아이고, 우리나라 여자 하나 훔쳐갔군!” 같은 반응을 보였다. 물론 반농담 투라 정색하며 따질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 필자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최근 한 세기 넘은 외세의 침략이 한국인의 집단의식에 큰 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모를 바 아니었지만, 여성을 꼭 남성이 주체되는 행위의 단순한 대상물이나 한국 남성들의 집단적 재산쯤으로 보는 잠재된 마초주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두 사람의 개인적 일인 결혼이 왜 현대판 노비문서인 여권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민족’과 ‘남’을 가르고 집단적인 관심사가 돼야 되는가?


“피를 섞자” vs 단일 민족 신화

최근 150년 동안의 동아시아에서, 실제로 국경을 넘은 결혼 이상으로 더 정치화·이념화된 문제는 없을 정도였다. 물론 국가적 규율이 옛날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서 엄격했던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근대 이전에도 ‘국경을 넘는 사랑’이란 쉽지 않았다. 한 예로 조선왕조의 몇 안 되는 대외 창구였던 부산 등지의 왜관(倭館·일본 장사치의 거류지)의 경우에는, 기생을 포함한 조선 여인들의 출입은 엄금됐으며 불법 출입시에 사형(!)에 처해졌다. 가족도 데려올 수 없었던 일본인 체류자들의 유일하다 싶은 위안은 조선의 탁주와 고향의 청주였다.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동양인으로서는 예외적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서재필(왼쪽)과 일본 여성과 가정을 꾸렸음에도 결혼신고를 하지 못했던 영국 외교관 사토(오른쪽).
그러나 나라의 경계를 넘는 사랑의 정치화는 근대에 접어들어 질적으로 다른 수준에 달했다. 지금까지 쓰이는 메이지시대의 용어인 ‘국제결혼’을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자명해진다. 여권 색깔이 다른 사람 사이의 결합이란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국제’, 즉 ‘나라간’의 문제로 언어상 규정돼버린 것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nation’이라는 어법에 대한 반감이 최근에 거세져 ‘international marriage’(국제결혼)보다 ‘intercultural marriage’(문화간의 결혼)라는 표현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지만, 우리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국’자가 쉽게 빠지지 않는다. ‘개인’이기 이전에 ‘국민’인 셈이다.

‘국제결혼’이라는 용어를 만든 메이지 일본에서는 ‘국가간’의 결혼을 때로는 ‘국민’을 살리는 방법으로, 때로는 ‘반국민적 행각’으로 치부했다. 재미있는 것은 정반대의 이 두 가지 논리가 사회진화론이라는 공동의 이념을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1870년대 후반부터 일본 지성계를 풍미했던 서구 중심주의적 사회진화론에서는 체구가 왜소한데다가 ‘문명발달이 늦어진’ 일본 ‘인종’은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여 멸종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 ‘도태의 위험’을 막고 ‘아시아에서의 유럽적 제국 건설’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급진파의 부르주아 이념가들은 ‘우등 인종’들과 피를 섞자고 제안했다. 거물 근대주의자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제자였던 다카하시 요시오는 1885년의 <일본인종개량론>에서 일본인과 서구인의 ‘국제결혼’을 장려하여 ‘백인종에 준하는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편, 국수주의적 보수파는 생존 방법을 반대로 ‘순수한 단일민족’으로서 천황을 중심으로 대가족 국가로 단결하자고 주장했다. 개인의 대결에서는 일본인이 서구인에 비해서 열등하다 해도, 집단적인 정신력으로 국가간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무라이 사회진화론’적 사고였다. 결국 1890년대에 엘리트가 보수화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한 뒤에는 후자의 ‘단일 순수혈통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지배담론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조선인 등 식민지 백성의 ‘동화’(민족말살)에 도움이 된다 싶었던 ‘내선(內鮮·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 등은 예외였지만, 대개의 ‘국제결혼’은 ‘국민’의 대열에서 탈락돼 ‘남’이 되거나 어정쩡한 회색지대로 들어가는 일이 됐다. 한국의 지성계까지 정복한 이 ‘단일민족’의 신화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얼마나 일그러뜨렸는지 우리는 최근까지의 한국 역사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의 영국 외교관, 동거만 하다

‘국제결혼의 선구자’ 윤치호(왼쪽). 윤치호 왼쪽은 어머니, 오른쪽은 중국 출신 마아이팡 여사의 요절 이후에 재취한 백매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 ‘국제결혼’이 비교적 드물었던 원인을 꼭 일본 지배층의 국수주의적 경향에서만 찾으면 안 될 것이다. ‘잡혼에 의한 인종개량’이 탁상공론밖에 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뭉쳤던 그 당시의 구미 지역에서도 아시아인과의 결혼이란 통상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거야 가능했지만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공식 결혼의 절차를 밟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예컨대 조선에 대한 정보를 모은 것으로 유명한 학자적인 영국 외교관 에르네스트 사토우(1843~1929)는 다케다 가네라는 일본 여성과 1872년부터 사실혼 관계를 가져 슬하에 2남1녀를 두었음에도, 외교관이자 ‘신사’의 신분상으로는 끝까지 결혼신고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 그의 차남인 다케다 히사요시(1883~1972)가 나중에 국제적인 식물학자이자 자연보호 활동가가 된 것은 메이지시대의 ‘국경 넘은 사랑’의 재미있는 연속이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이나 조선, 중국에서 거주했던 비외교 계통의 구미 지역 남성들에게도 이와 같은 ‘부인이 될 수 없는 현지처’들이 있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치 서구의 인종주의와 일본의 신생 국수주의는 ‘국가 사이의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데에 서로 손잡은 듯하다.

개화기와 그 뒤의 조선에서도 ‘내·외국인 잡혼’에 대한 의식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완전한 서구화를 희망했던 소수의 엘리트 개화주의자들에게, ‘개명한’ 외국인과의 결혼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다. 서재필(1866~1951)이나 이승만(1875~1965) 등 구미인 여성과 결혼한 초기 개신교 개종자들 외에, 윤치호(1865~1945)처럼 기독교 가정 출신의 중국인 여성과의 결혼도 ‘문명개화적 국제혼인’의 한 방법이었다.

이승만과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평소에 중국과 중국인들을 야만시하는 윤치호였지만, 부인 마아이팡(馬愛芳·1871~1905)은 거의 끔찍하다 할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마애방이 요절한 뒤에 ‘하늘에 가 계시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쓰인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읽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일본 국수주의자 못지않게 한국의 개화 엘리트들도 ‘국제결혼’으로 인한 ‘애국심 저하’를 걱정했다. 예컨대 기독교 개종자들이 주종이 됐던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1월10일에 “내·외국인의 상혼(相婚)의 금지가 가능하다”는 주제의 논설을 내보냈다. “외국인과 결혼하여 자손을 낳으면 분명히 종족의 경계도 모호해질 것이며, 국가의 경계도 모호해질 것이며, 애국 관념도 어느 나라에 대해서 생기겠는가? (…) 유학 나가는 사람 중에서 외국 여성을 데려오는 사람은 더러 있는데, 외국 여성과 결혼하는 날은 바로 애국심을 죽이는 날이 아닌가?”

사실, 일제와 싸웠던 연해주의 재러동포 초기 공산주의자 중에서는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애국심이란 <대한매일신보>가 서구·일본 인종주의자들로부터 배운 혈통주의적 국가주의가 아닌, 조선을 포함한 전세계를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인종주의적 망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무산계급의 국제주의적 애국심이었다.

무산계급의 국제주의적 애국심!

근대 초기에 ‘국가’ ‘인종’ 등의 헤게모니적 담론에 좌우됐던 “국제결혼”은, 이제는 국제적 경제력의 우열에 좌우된다. 우리는 경제력으로 필리핀, 중국 등지의 여성을 ‘데려올 수’ 있으며, 또는 ‘국제결혼’은 ‘선진국’으로의 이민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국가’나 ‘경제력’의 포로가 될 여지가 많은 이 자본주의적 ‘문화간의 결혼’은 언제쯤 순수한 개개인의 사랑 문제로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라는 저주를 인류가 벗어난 뒤일 것이다.

[참고문헌]
1. 오구마 에이지(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민족 신화의 기원>, 소명출판사, 2003
2. 윤건차(이지원 옮김),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 문화과학사, 2003
3. 박성진, <사회진화론과 식민지사회사상>, 선인, 2003
4.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민족·섹슈얼리티·병리학>, 책세상, 2001
5. 윤치호(송병기 역), <국역 윤치호일기> 상·하권, 탐구당,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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