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이 식민지에서 저질렀던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주장은 사실일까…식민지 주민 강제동원은 열강의 공통점이나 정체성 박탈 정책 등은 유례없는 사례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유례없는 만행’ ‘본국 일본보다 더 심한 파쇼적 광란으로 인한 조선인 생활의 파멸’. 필자가 학생 시절에 교과서 격으로 공부했던 현대 한국 사학의 거목인 강만길 선생의 에서 일제 말기의 조선인 총동원에 대한 평가는 대충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만행’이었다. 1970년대 이후 국내의 진보적 탈식민 사학의 의견도 그렇지만 소련의 교과서에서도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의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잔인성’이 강조됐다.
황민화와 사미족의 노르웨이화
그런데 좌파적 경향의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면 일본의 학계는 식민지 말기의 총동원을 포함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지배의 ‘일반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려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우파적 성향의 학자들은 아예 ‘산업 개발’ 등을 들어 ‘자원 이용에만 관심이 있던 서구 열강’에 비해 일본이 그 식민지에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으로까지 간다. 일제 식민 지배의 ‘보편성’, 그리고 일제 시대의 ‘개발’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국내의 ‘뉴라이트’들도 같은 성향에 속하는 모양이다.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조선인에 대한 총동원을 비롯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서구인들이 그 식민지에서 저질렀던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주장부터 검토해보자. 일본의 징용, 징병 등과 같은 조처들은 일국사가 아닌 세계사의 차원에서 봤을 때에 ‘특수’인가 ‘보편’인가?
물론 전시 국민국가가 그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일 정도는 ‘보편’이라 해도 일제의 행위에선 다른 곳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특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45년 독일 영토에 진출한 소련 군대가- 일부 사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약 200만 건의 독일 여성 강간 사건을 일으키는 등 군대와 성폭력이 원래부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도, 일군 ‘위안부’와 같은 제도화된 성노예화는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동원 피해 규모의 차원에서도 조선의 사정이 좀 특수했다. 현역병 징병의 피해 규모가 9만 명 안팎이었지만, 노무자와 ‘위안부’ 강제 동원을 포함한 전체 동원의 규모는 700만 명, 즉 당시 조선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육박했다. 일본보다 한층 더 강한 중앙집권적 ‘국가 자본주의’ 체제를 갖췄던 스탈린의 소련에서라도,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코카서스의 작은 속령인 그루지야 같은 지역에서는 군 복무와 징용(trudarmiya·군사화된 강제 노동)에 차출된 인구는 총인구의 17% 정도뿐이었는데, 이는 당시 코카서스, 중앙아시아라는 소련의 식민지 지대에서 비러시아인의 전쟁 동원의 평균 수준이었다. 동원 피해의 규모 못지않게, 동원을 수반한 ‘황민화’라는 이름의 강제 동화 정책의 심도도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에 상당히 예외적이었다. 예컨대 소련만 해도 1930년대 후반부터 중앙아시아의 토착 민족(우즈베크·카자흐 등)에게 자국어 표기를 위해 러시아 키릴문자의 사용을 강요하고 러어의 보급을 강제적으로 실시했지만 전시 동원 시기의 조선과 달리 교육의 언어는 그대로 토착 언어로 일관됐으며, 토착 언어 신문의 발간도 계속됐다.
‘내지’의 언어를 식민지 주민들에게 주된 학교 교육 언어로서 강요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주로 특정 국가의 영토 안으로 오래전부터 편입된 내부 식민지에서 자주 행해진 일이었다. 예컨대 중세 이후로 노르웨이 당국의 지배를 받아온 노르웨이 북부의 원주민인 수만 명의 사미(sami)족은 1959년까지 노르웨이어로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1969년에 이르러서야 첫 ‘민족고등학교’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노르웨이가 자유와 복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미족에 대한 노르웨이 당국의 노르웨이화(fornorskning) 정책은 어떤 면에서 악명 높은 황민화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내부 식민지가 아닌 비교적 늦은 시기에 획득한 외부 식민지의 경우에는 황민화와 같은 강제적인 정체성 박탈 정책은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본다면 일제 말기의 만행이 “유례없다”고 이야기해도 꼭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네갈에 정식 징병제를 실시한 프랑스
그런데 식민지 주민에 대한 전시 징병 그 자체는 과연 일제의 ‘특수’였던가? 제정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 주민들을 징용에 징발하려는 시도는 1916년에 대대적인 반러 무장해방 운동을 촉발했지만, 실제적으로 식민지 처지였던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주민들을 형식상 ‘공민’으로 취급했던 소련은 제2차 대전 때에 그들을 주저 없이 대규모로 징병했다. 1937년에 ‘일본 간첩 방조’와 같은 허위적인 명분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경우에는, 박해를 받는 처지에서 현역병 징병을 면했지만 징용의 고통을 안게 됐다.
지금 우즈베키스탄 북부의 카라칼파크 지역에서 살고 있는 발레리 홍(1926년생)은 시베리아 벌목장에 징용됐던 시절을 악몽으로 떠올린다. “옆 막사에서 살았던 죄수들이 우리를 불쌍히 여길 정도로 우리의 강제 노동 수용소 생활이 비참했다. 빈대가 하도 많아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우리는 하루 12시간씩이나 벌목을 하고, 석탄을 나르는 노역에 종사했다. 먹을거리는 최하 질의 빵과 썩은 양배추로 만든 수프 정도였다. 수모와 막노동의 생활은 강제 이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강제 이주를 당했을 때에 적어도 가족은 곁에 있었다.” 소련의 형법 체제로 봐도 개인적으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채 이렇게 징용에 걸려 죄인 이하의 대접을 당한 고려인들은 적어도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일제 말기의 한반도 주민에 대한 징병, 징용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고 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이 ‘가난한 사촌’쯤으로 대해주는 머나먼 중앙아시아 체류의 동포들에게 이미 몰락한 소련 국가가 저질렀던 만행을 누가, 어느 시기에 파헤쳐 보상을 요구할 것인가?
식민지 주민을 총알받이로 삼는 것은 어찌 소련뿐이었던가? ‘톨레랑스의 본고장’ 프랑스는 19세기 중반부터 서부 아프리카 식민지의 주민들을 병사로 이용했으며, 1912~60년에 세네갈과 같은 일부 서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정식 징병제까지 실시해 대규모의 총알받이 차출을 단행했다. 애초에 프랑스인들은 토착 추장들의 노예를 마구 사들여 다른 추장들의 영지 정복에 이용하거나, ‘원주민’들을 납치에 가까운 방법으로 무조건 강제 차출하거나, 피정복 지대의 ‘원주민’들에게 그들을 살려주고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군 복무를 강요해 19세기 말에는 상당수의 아프리카 빈민들이 군에 지원하기도 했다.
식민지적 약탈 경제라는 상황에서 군 복무는 수많은 가난뱅이들에게 아사를 면해 나름의 신분 상승을 이루는 유일한 방편으로 보였다. 열대 지역에서 기후와 전염병에 약한 백인 군인보다 흑인 군인들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계산 아래, 모로코 정복(1907~12)과 같은 새로운 식민지 침략에서 세네갈 군인들이 정예 병력으로 이용됐다. 아프리카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에 프랑스의 서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약 21만 명이 징병됐으며, 그중에서 3만 명이 전사했다. 1918년에 종전이 되자마자 군 당국은 ‘토박이’ 프랑스인들을 우선적으로 전역시키고, 아무 권리도 없는 아프리카 병사들을 라인강 지역 점령 등 전후의 대독일 정책 실시 때 이용하려고 추가적으로 몇 년 동안 더 군에 두기도 했다.
강점기 말기의 동원 규모라든가, 그 동원의 정신적 기반을 조성해야 할 조선인 ‘동화’ 캠페인이 일상에 침투한 정도, ‘위안부’ 연행과 같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만행 등으로 봐서 일제의 강제 동원이 ‘특수’했다 해도, 식민지 주민에 대한 강제 동원 그 자체는 프랑스, 소련, 1920년대 이후의 일본처럼 식민지 경영을 ‘내지 연장주의’(본국 통치 연장으로서의 식민지 통치 개념)에 입각해서 실시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공통점이라 하겠다. 공통점인 만큼 우리가 일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공화주의’ 구호를 내걸고서 유럽에서 열강 사이의 싸움에 아프리카인들을 총알받이로 마구 이용했던 프랑스나,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서 1941년부터 고려인을 비롯한 ‘불온 민족’들을 징용에 끌고 갔던 소련 등도 아울러 비판하는 것이 더 보편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친일 청산, 권위주의적 동원 청산부터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문제는 프랑스, 소련, 일본과 같은 식민모국들의 강제 동원이 탈식민 ‘민족국가’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납치에 가까운 프랑스인들의 ‘원주민 병사’ 차출 방법을 본떠서 지금도 기니나 차드와 같은 구 프랑스 식민지에서 소년병사들을 강제 모집하고 있으며, 소련이 망한 뒤에도 그 모든 ‘독립국가연합’의 국가에서 고참들의 구타와 장교들의 횡포 등이 횡행하는 징병 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러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계승 국가 일부에서 그나마 최근에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가 인정되기는 했지만, 일제 말기의 징병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남한에서는 해마다 700~800명에 달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계속 수감된다. 오늘날의 지배자들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식민지 통치의 유산이 지금도 살아 숨쉬기에 ‘친일 청산’이 그렇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진정한 ‘친일 청산’은 ‘민족 정기’와 같은 국수주의적 관념에 입각하는 것보다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권위주의적 동원 체계를 인권적, 민주적 기준에 따라 뜯어고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hr>
참고 문헌:
1. 〈The Comparative Study of Conscription in the Army Forces〉, L. Mjoset & S. Van HoldeOxford: Elsevier Science, 2002.
2. “Трудовая армия: второй удар судьбы по корё сарам”: Людмила Борисовна Хван, http://world.lib.ru/k/kim_o_i/u2-1.shtml
3. 〈일제 말기 식민지 지배정책 연구〉 최유리, 국학자료원, 1997.
4. 〈조선총독부의 ‘총동원체제’(1937-1945) 형성 정책〉안자코 유카, 고려대학고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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