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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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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20세기의 피비린내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독도·대만·북방 네 개의 섬은 언제부터 우리의, 그들의 땅이었나

▣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중세인의 머릿속에 주기도문이나 삼강오륜이 박혀 있었듯이, 근대인의 머리에 ‘저장’돼 있는 것은 세계 지도의 이미지다. 홋카이도의 최북단부터 오키나와까지 같은 색깔로 칠해진 일본, 히말라야의 기슭부터 태평양까지 동일한 색깔로 처리된 중국…. 한반도가 인접 지역에 비해 동질성이 강한 인구 구성을 가져 종족의 현실적 다양성과 근대적 ‘영토’ 관념의 획일성 사이의 갈등을 경험한 일이 없어서인지, 같은 색깔로 칠해진 지도상의 이미지 뒤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숨어들어가 있는지 우리는 잘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근대 국가의 국제법적 의미의 ‘국경’이 요구하는 획일적인 ‘영토’ 관념과 동아시아의 종족적·문화적 다양성의 충돌이야말로 이 지역의 가장 큰 비극들을 계속 빚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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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직후 에조치가 훗카이도로

오늘날 상당수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각각 ‘우리의 신성한 국토’라고 인식하는 독도, 대만, ‘북방 네 개의 섬’을 위해 심신을 다 바쳐 자기 희생을 할 ‘애국적’ 각오를 보이고 있지만, 국토의 근대적 관념이 동아시아에 도입된 지 약 15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특정 국가의 지배 영역이라는 의미의 강역(疆域)은 이미 전통 시대에도 인지됐지만 그 사이의 경계선은 오늘처럼 절대시되지 않았다. 예컨대 18세기 말 이전까지의 일본 지도에서는 ‘일본’(즉, 에도막부)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가 뚜렷하게 표시돼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경선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6세기의 ‘조선팔도지도’를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 지도에는 대마도가 ‘일본 영토’라는 표시 없이 그려진다. 대마도의 도주(島主) 소(宗)씨가- 비록 조선에도 조공을 바쳐 형식상의 관직을 받기는 했지만- 일차적으로 일본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조선에서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국경선을 표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영토 귀속을 신성시하는 근대적 ‘국토’ 관념이 없었던 것이다. 국가지배 영역에서는, 다양성과 복합성은 인정됐다. 예컨대 1790년대 초반에 티베트를 침략하려는 네팔군을 중국이 격파해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한층 높였음에도, 티베트에서 중국의 대표자인 주장대신(駐藏大臣)이 토착 지배자인 달라이라마나 반첸라마로부터 대외정치와 관련한 일부 권한을 빼앗았을 뿐이지 내부 행정 문제에서는 군림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역 호족이나 큰 사찰을 거점으로 매우 느슨하게 통치됐던 라싸 계곡 이외의 티베트는, 중국인에게는 물론 달라이라마나 반첸라마에게도 형식적으로만 복속됐을 뿐이다. 이와 같은 중첩적이고 느슨하며 지역 자치 중심의 통치를 근대적 ‘영토 주권’의 관념에 맞춰서 “티베트가 이미 전통시대에 중국의 영토이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근대주의적 아전인수 이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열강의 침략이라는 위협하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적으로 재편되면서 그 국경선을 굳히자 변경의 회색지대들이 하나하나 ‘국가화·국민화’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 같으면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직후인 1869년에 “러시아 남하로부터의 방어 제일선”인 아이누의 땅 에조치(蝦夷地)가 홋카이도로 개칭돼 ‘제국의 북문’으로 명명됐다. 에도시대에 그나마 가능했던 아이누들의 자치는 사라졌고, ‘개척’의 미명하에서 아이누의 언어와 풍습이 말살되고 말았다. 지금은 ‘일본 땅 홋카이도’가 당연해 보이지만, 홋카이도는 일본의 획일화된 ‘국토’에 편입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식민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 하나의 회색지대인 류큐(琉球)도 마찬가지였다. 1609년 이후에 일본의 사쯔마(薩摩)번 영주의 느슨한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쳐 명분상 중국의 ‘번국’(藩國)이었던 류큐 왕국은, 근대 국제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중 복속’ 상태에서 중-일 중계무역의 이득을 행복하게 챙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가 중국과의 전쟁을 불사하면서 1879년 류큐를 무리하게 ‘오키나와’의 이름으로 하나의 현으로 편입시킨 뒤로는, 수많은 영향들을 아우른 류큐왕국 문화의 독특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보통어’(일본어)와 보통복’(일본 복식과 양복)이 오키나와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역사 교과서들이 류큐인들을 ‘일본인의 동족’으로, 그리고 류큐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각각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본이 그렇게 해서 아이누 문화, 류큐 문화의 폐허 위에서 그 ‘완성’을 본 것이다.

변경을 빨아들인 ‘중화의 국토’

열강의 중국 분할 위협 때문인가? 중국에서야말로 근대 초기 국토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와 같은 민족주의 주간지들이 1900년대 초반 그 표지에 즐겨 그렸던 중국의 지도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만주족의 청나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 간행물의 표지에는, ‘중화의 국토’는 바로 청나라의 국토로 그려진다. 웨이우얼족 등이 사는 신장(新疆)도, 중국인에게는 물론 라싸 행정부에도 거의 복속돼 있지 않은 수많은 자치 공동체의 티베트도 다 똑같이 ‘중국’으로 색칠된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이 만주족의 통치를 불만스럽게 여겼지만, 만주족에게 느슨하게 복속된 변경의 회색지대들을 하등의 의심 없이 중국으로 인식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외부 지역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공고히 하지 못하고 있었던 ‘약체 청나라’는 비난을 받곤 했다. 예컨대 1903∼04년 영국의 영허즈번드(F. E. Younghusband, 1863∼1942) 대령 휘하의 탐험대가 라싸에 들어가서 티베트 행정부와 협약을 맺은 직후에는, 온건 민족주의자들의 대표 격인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가 ‘슬프다, 티베트여’(哀西藏)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티베트 상실 위기에 대한 슬픔”을 강하게 나타냈다. “원나라 시절부터 중화에 조공을 바쳤던” 티베트를, 량치차오가 “유럽적인 용어를 굳이 쓰자면 우리의 식민지”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면서, “식민지 티베트에 대한 우리의 주권 확립”을 청나라 정부에 요구했다. 이 주권을 확립하려는 쓰촨성 총독 자오얼펑(趙爾豊)의 침략군이 1910년에 라싸를 짓밟아 달라이라마로 하여금 인도로 망명케 했을 때, 이 행동에 반대한 민족주의적 지식인은 중국에 없었다. ‘우리 민족의 국토’가 완성되기 위해서 변방의 약소 종족의 자주 의지가 무시된다는 것은 ‘영토 주권’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민족주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에는 웨이징성(魏京生)과 같은 중국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도, 티베트에서의 식민주의적 정책과 티베트인에 대한 차별이 끼쳐온 폐해들을 인정해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화를 요구하면서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영토 주권”이라는 대전제를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근대의 정치 문화에서 ‘신성한 국토’를 한 치라도 ‘양보’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자격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성한 영토’가 ‘우리’와 애당초 관계가 없음에도, 거기에서 살아온 이들의 대다수가 아직도 ‘우리’의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를 외국 침략자로 인식한다 해도, ‘국토 포기’란 근대의 정치사전에 없다.

독도, 일본 민중과의 연대부터

대한민국에서는 좌우가 아무리 치열하게 대립해도 ‘신성한 국토’로서의 독도 문제가 ‘터지기’만 하면, 원칙상 ‘국제주의적’이어야 하는 민주노동당부터 오히려 독도 사수 의지의 경쟁에 가장 열심히 뛰어든다. 일제침략이라는 아픈 외상의 후유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각종 ‘국민화’ 기제에 비판적이어야 할 사람들까지 ‘신성한 국토’라는 주술에 그대로 걸려드는 것은 어설프게 느껴진다. 독도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독도 관련 망언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본의 극우들에 대항해서 일본의 진보 단체들과의 튼튼한 연대부터 만드는 것이 근대의 야만을 극복하려는 이들로서는 급선무가 아닐까? 독도 문제로 의견을 달리한다 해도, 일단 일본 민중과의 연대와 친선은 자본주의 국가가 만들어놓은 영토의 복잡한 관계보다 더 일차적이지 않은가? ‘국토’라는 근대의 유사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20세기의 살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1. 하권, 푸레젱(傅樂成) 지음, 신승하 옮김, 지영사, 1998, 781, 883쪽
2. 량치차오(梁啓超), 상하이, 廣智書局, 1907, 時局篇, 117∼130쪽
3. 요시자와 세이치로(吉澤成一郞) 지음, 정지호 옮김, 논형, 2003, 118∼134쪽.
4.“The Position of Tibet in International Law” - 〈The China Quarterly〉 No. 35, Alfred Rubin, 1968, pp.1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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