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2800시간, 공휴일에도 ‘자발적’으로 근무하는 ‘꿈의 피지배민’의 나라…‘회사주의’의 탄생·보급·내면화는 전후 대자본과 정부가 벌인 대작전의 결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일본 ‘버블 경제’가 종언을 고한 뒤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일본형 경영’을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일부 우파적 일본학자들의 중요한 돈벌이였다. 전형적 사례는 1979년에 서점을 강타한 하버드대학 에즈라 포겔 교수의 이다. 주기적인 경제 침체와 베트남에서의 패주로 인한 자신감 상실, 반체제 운동의 활성화로 인한 불안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미국 지배층에게 그 당시의 일본이 과연 무슨 ‘교훈’을 줄 수 있었는가? 포겔의 책에서 그려지는 일본은 가히 ‘자본주의적 유토피아’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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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집단적인 생활의 즐거움을 배우고, 회사에서도 동료와의 동지애로 인해 공휴일에도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포겔 교수의 ‘모범적 근로자로서의 일본인’들은, 대규모 파업, 흑인 빈민가 폭동, 감옥 죄수 반란 등을 벌이는 1960~70년대 신세대 서민들로 머리가 아팠던 미국의 지배자들이 바라고 바라던 ‘꿈의 피지배민’이었다. 미국에서 ‘일본학 고전’의 대열에 오른 은 일본에서도 약 70만 부나 팔려 일본 관료들이 가장 인용하기 좋아하는 양서가 됐다.
상사의 전화 한 통에…
그의 ‘뜨거운 일본 사랑’에 의아함을 표명하는 이들에게 포겔은 “나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마음에 담아 을 썼다”고 답하곤 한다. ‘미국의 이해관계’ 대신 ‘미국 자본계급의 이해관계’라고만 고쳐 쓴다면 이 답은 진실일 것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평균 일본 남성 근로자는 미국인 근로자보다 훨씬 더 많은 연간 2600시간을 일했다. 유급 잔업은 정부의 통계에 잡혔겠지만 (특히 사무직 근로자들의) 무급 잔업은 공식 통계에 제대로 잡힐 리가 없고 따라서 근로시간은 주로 비공식 통계인 실제 근로시간에 대한 표본조사에 의해 밝혀진다. 최근의 조사 결과로는 평균 일본 사무직 근로자의 월간 무급 잔업 시간은 약 40~60시간에 달한다. 1990년대 초반 같았으면 사무직 노동자가 실제로 1년 동안 직장에서 보냈던 평균 시간은 유·무급 잔업을 포함해 도합 2800~2900시간에 가까웠다는 것은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믿기 어려운가? 지금 일본의 한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지인만 해도, 밤 10~11시가 돼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무직·연구직 근로자들을 자주 본다고 한다. 상사의 전화 한 통에 일요일 가족 나들이 일정을 취소하고는 직장에 와서 심신을 바쳐야 하는 나라는, 경쟁국가 자본가들의 학술적인 대변자에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모범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겠다.
1980년대 이후로 연간 근로자 1천 명당 파업손실 일수가 미국의 10%도 못 미치는 일본을 ‘기업의 요구를 따르는 사회’로 묘사해도 큰 거짓이 아니기에 포겔의 주장을 단순히 ‘기만’ 내지 ‘궤변’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의 말대로 일본 근로자들이 기업 위주의 집단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회사를 섬기는 기쁨으로’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즐겁게 감수’하는가? 우경화돼가는 오늘날의 일본에서 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지만, 적극적인 저항이 거의 표면에 나타나는 않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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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대다수의 20대 ‘초년생 근로자’들은 노동을 단순히 ‘생계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만 간주하며, 소득이 약간 감소하더라도 노동시간 단축을 희망하며, 그들 중 30%는 직장생활 첫 3년간에 이미 첫 이직을 한다. 그럼에도 1990년대 중반만 해도 25% 정도이던 노동조합 가입률이 지금은 18~19%밖에 안 되는 등 조합화와 같은 초급적인 수준의 저항적 움직임마저도 보기 힘들다.
노조가 ‘노동 문제 조정관’이 되기까지
그러면 포겔류의 주장대로 일본인들은 거의 태생적으로 “상하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고 상급자에 대한 진정한 존경을 품는 순응형 인간”들인가? 그들의 근로생활의 일상은 정말로 ‘자발적’인가? 나로서는 피지배민의 복종이 ‘자발적’이라는 주장들은 늘 의심스럽다. 박정희 시절의 한국 노동자들이 “민족중흥을 부르짖었던 국가의 내셔널리즘에 자발적으로 호응해 대중 독재의 공범이 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주장은 초등학교부터 선생님의 매로 만들어져 나중에 군에서의 기합으로 굳어지는 관제(官製)의 복종 습관도, 중정의 고문실과 경찰 진압봉의 현실도 무시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회사형’ 인간들이 단순히 ‘집단을 우선시하는 문화적 가치’ 따위에 의해 만들어져 ‘자발적으로’ 착취자들의 이득에 봉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회사주의’ 이데올로기의 탄생·보급·내면화는 전후 일본 대자본과 정부의 ‘대(大)작전’의 결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일제의 패망에 활기를 되찾은 일본의 좌파는 1945~47년에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을 듯한 인상을 주곤 했다. 1946년 5월1일의 메이데이 때만 해도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도쿄의 천황 궁전 앞에서 데모를 벌여 천황제 타도를 외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 적화의 위험’에 위기감을 느꼈던 미군 쪽과 그 주니어 파트너인 일본의 보수 집단은 1947년부터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을 벌였다. 약 2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공공·민간 부문에서 해직을 당했고, 급진적인 운동가를 비롯한 약 80만~90만 명의 근로자들은 정치적 동기가 뻔한 1949~50년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되었다.
즉,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의 꿈을, 일본 노동자들이 꾸어보지 못했다기보다는 미군의 총검과 보수 정권의 탄압으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일본의 전교조’라 할 만한 닛교소(日敎組)라는 교사조합을 비롯한 몇 개의 전국적 노련들은 1980년대 말까지 급진성을 잃지 않았지만 경영 쪽의 ‘불온분자’ 고립, ‘협조적’ 노조 관료 우선 승진, 노조 간부층에 대한 집중 매수 전략과 전후 경제 성장으로 인한 소비 수준의 증가가 주효해 다수의 노조들이 1960년대에 접어들어 제한적인 경제적 요구만 아주 ‘온건하게’ 할 줄밖에 모르는 기업의 ‘노동 문제 조정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맹목적인 복종의 습관을 군홧발로 몸에 배게 할 수 있는 징병제 군대가 없어진 1945년 이후의 일본이기에,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도 병영식 생활을 통해 ‘윗사람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인정을 가르치는 자위대·선불교 사찰·‘윤리센터’ 등의 합숙 훈련 프로그램에 거의 전원의 피고용자들을 보내는 것이 일반화됐다. 그렇게 해서 절반 정도의 어머니·배우자들이 아들 내지 남편이 과로로 죽을 것을 늘 두려워하고 있는 오늘날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법인 자본주의의 왕국 일본이 탄생됐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과로사가 두렵다
결국 ‘자발적 복종’의 실체는 역사 속의 탄압으로 인한 대안의 부재와 소비생활의 달콤한 ‘당근’, 그리고 유치원부터 입사 이후의 훈련 프로그램까지의 철저한 순치 과정이다. 일본을 우리가 보통 ‘선진국’이라 부르지만 과연 근로자로서 살고 싶은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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